나의 신앙유산답사기(부산4)

부산이 하늘의 역사를 만날 때

편집인 | 입력 : 2023/02/05 [12:31] | 조회수: 1076

 

제일영도교회(1896)

 

  


부산의 교회는 부산진교회(1892). 초량교회(1892), 영도제일교회(1896), 항서교회(1905)가 100년 이상된 교회로서 영도제일교회는 순수 한인에 의하여 1896년에 설립되었다. 영도제일교회는 고신교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1895년 김치몽씨가 고향 통영에서 핍박받던 서양 선교사를 도운 것을 계기로 입신하여 신앙생활을 해 오다가 1896년 부산으로 피신해 자신의 집에서 자신과 다른 두 가정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제일영도교회가 시작됐다.

 

  

 

이처럼 제일영도교회의 출발은 1896년 김치몽이 자기 집을 헐어 예배 처소를 만들고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로세영, 사보담을 초청하여 예배드림으로써 시작됐다. 

 

다행히도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초창기(1900년) 성도수가 100명으로 증가함에 따라 영도구 신선동 1가 107번지에 14평 기와집예배당을 신축하여 미국 북장로교 소속 로세영(Cyril Ross), 사보담(Richard H. Sidebotham) 두 선교사를 초청하여 헌당 및 설립예배를 드림으로 ‘영도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제일영도교홰 홈페이지 

 

 

1924년 11월 교회 예배에 처음으로 오르간을 사용하였고, 1927년 4월 3일 선영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19년 영도제일교회는 독립만세 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고 일제의 박해와 교회내부의 문제로 시련을 겪어오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일제시대 제일영도교회를 거쳐간 담임목사는 한득룡 목사를 비롯한 9명에 이르고 이춘서 장로를 비롯한 5명의 장로가 장립을 받았으며 청년 면려회 창립(1927.3.28)과 소년 면려회 창립(1963.9.27), 선영유치원(1927.4.3) 개원, 야간 성경학교(1927.11)를 개교하는 등 일제시대에 큰 성장을 하게 된다.

 

제일영도교회는 1944년 4월 9일 태평양 전쟁 말기의 긴박한 사정으로 당회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1946년 한명동 목사 부임 이후 당회를 부활시켰다. 교회 설립 이후 영도교회, 영선동교회, 영선정교회, 산수정교회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1953년 연초에 제1 영도교회의 교회명을 확정하였다. 

 

교회는 점점 성장해 신관을 새로짓기도 하였다.  

 

  


영도교회가 배출한 인물 중에 할렐루교회를 담임했던 김상복목사가 있다. 김상복 목사는 6.25사변으로 남하한 후 부산중학교를 마칠때까지 제일영도교회에 출석하면서 찬양대 지휘와 반주를 맡는등 하여 어려서 신앙생활을 하던 곳이다. 

 

 

 

이외에 이원홍 전 문공부 장관과 침구학계에 명성을 떨친 양의사 송태석 박사, 한국 의학계를 빛낸 박병국, 박영훈 형제, 경제학의 권위자인 정도영 박사, 한국굴지의 성악가인 이인영 교수, 건축가 이종식 장로등 각계각처에 유명한 인물등을 배출해 냈다.

 

그리고 얼마전에 소천한 L.A 은혜 한인교회 원로목사인 김광신목사는 영도제일교회를 설립하는데 산파역할을 했던 김치몽씨의 증손자이다. 김광신목사는 자신이 개척하여 약 5,000여명 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는 서울대, 탈봇신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개척을 하여 L.A 에서 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이처럼 제일영도교회는 많은 인물을 배출한 교회이기도 하다. 

 

항서교회(1905)

 

 

 


항서교회는 예장통합교단 소속이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5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보담(사이드 보탐)에게 감화받은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으로 역사가 깊다. 당시의 이름은 자갈치교회였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분열될 때 통합 측을 택해 예장통합 부산 노회에 속해 있다. 항남교회 등 부산 지역의 많은 교회가 항서교회에서 분파되었다. 

 

  


제일영도교회는 제5영도교회로까지 분교회 설립을 하였다.

 

 상애원(1910)

 

호주선교사들이 경남과 부산지역에 쏟은 정성은 미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 못지 않았다. 경북지역은 주로 북장로교, 호남지역은 남장로교가 담당했고, 부산지역은 초랑교회 근처는 북장로교회, 부사진 교회 근처는 호주장로교가 맡아서 선교를 하였다. 

 

상애원은 부산외국어대학이 있던 감만동 캠퍼스 부지에 1909년 문을 연 대한민국 최초의 나병원이다. 

 

호주 장로교는 1899년에 부산에 당도하였던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인해 약 13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 중의 한 명이 맥켄지였다. 호주장로교가 많은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이 나환자 병원설립이다.

 

맥켄지 선교사  

 

  


호주선교사중에서 맥켄지선교사는 한국선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상애원 원장으로서 나환자 병원을 운영했다. 여수 애양원에 포사이드가 있었다면 부산 감만동 상애원에는 맥켄지가 있었다. 

 

 

 

포사이드는  광주에 최초로  '광주나병원'을 세워  훗날 여수로 이동하여 애양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한센병자를 치료하였다.  

 

 

부산감만동에서는 맥켄지가 상애원이라는 나환자 병원을 만들어 수많은 나환자들을 치료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나환자들을 돌보는데 매진하였다. 호주 장로교가 부산 감만동에 상애원(相愛園)이라는 이름으로 500명을 수용했다.

 

상애원은 미국 선교사 어빈(C.H.Irvin)에 의해 1909년 설립됐다. 경영난 등으로 운영권이 대영구라회로 넘어간 뒤 호주 선교사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가 1912년 5월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30년 가까이 나환자에 쏟은 헌신과 노력으로 맥켄지는 국내 나병환자의 아버지이자 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상애원에도 입소하기 위해 많은 나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는 물론이고 의식주 심지어 교육까지 무상으로 받을 수 있어 상애원에 입소하려는 한센병 환우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경쟁률이 40대 1에 육박하기도 했다. 맥켄지는 자서전에서 "상애원 앞에 입소 대기자들이 장사진을 쳐 잔디가 길게 자라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1928년 일본이 작성한 `나병환자 처치에 관한 진정서'에 따르면 병원 개원 당시 환자는 5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맥켄지가 운영을 맡으면서 환자는 급격히 증가해 한때 650명까지 늘어났다.

 

1919년은 상애원 환우들에겐 `기적의 해'였다. 대풍자나무의 열매에서 추출한 기름을 정제한 주사약이 나병에 큰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 만해도 별다른 약이 없어 병원 내 환우들의 사망률은 25%나 치솟았다. 하지만 맥켄지가 대풍자유 주사약을 구입해 환자들에게 놓으면서 사망률은 1.5%까지 뚝 떨어졌다. 불치병으로만 여겼던 병이 완치돼 집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생겨났다.

 

상애원은 병사 31동, 진료실, 입원실, 교회, 학교 각각 한 동, 전염병환자 수용소 2동 등 40여 채가 `양지 바른 산기슭' 3만여 평에 자리 잡고 있다고 적고 있다.

 

당시 환자수는 608명. 성인 남녀 외에 6∼7세 어린이부터 20세 미만의 미성년자가 57명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34년 7월 4일 맥켄지를 취재하기도 하였다. 

 

  



맥켄지에는 매혜란, 매혜경이라는 두 딸이 있었다. 

 

 

 

이들은 훗날 성장해서 일신 기독병원을 세웠다. 

 

 

  

 

  

 

일신기독병원의 설립경위는은 맥켄지가의 두 딸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했다. 

 

일신기독병원은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된 맥켄지가(家)의 매혜란과 매혜영, 두 딸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1952년 당시 6.25전쟁으로 부산에는 수많은 피난민과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나, 그 당시 부산에는 의료기관이 전무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 병원을 통하여 아기가 298,000명이나 탄생했다. 

 

일신기독병원은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열악한 1950년대부터 선진화된 의술과 사랑과 관심으로 여성과 산모와 갓난 아기의 생명을 구해왔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농·어촌(대저,철마,다대 등) 지역을 중심으로 매주 2회씩 직접 무의촌을 방문 진료했다.

 

이와 같은 진료 체계로 무료진료금액이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 호주선교회에서는 맥켄지 화운데이션을 만들어 후원금이 전달되었다. 이런 진료 현장이 알려지면서 많은 환자와 산모들이 모여들었지만 전국 어느 병원에 비하여도 낮은 모성사망률과 높은 출생 수를 자랑하고 있어 1952년 이후 2000년 8월에는 250,000번째 아기를 출생하였고 개원 71주년을 맞이하는 2023년 현재까지 총 출생아기수는 약 298,000여명에 달한다.

 

 



 일신 기독병원 서성숙 원장은 예수정신으로 경영한다고 했다.

 

70년의 세월을 지나는 우리 일신기독병원은 단순히 의료적 행위만 하는 병원이 아니라 예수정신과 설립자 선교사의 목적이라는 가치를 담고 있는 뜻깊은 병원입니다. 즉 의료적, 기독교 신앙적, 사회요구적인 상황에서 알맞게 반응해야 하는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이 곳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은 예수정신으로 경영해달라는 설립자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며 기독의료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더 확고히 다지며,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정신으로 우리 병원을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과 입원하시는 환우분들을 섬겨 갈 것입니다. 앞으로 병원을 찾아 주시는 분들이나 이 곳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다 함께 행복해지는 곳이 되도록 의료의 질을 높이는 일과 친절과 감동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가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어진 자리에서 행복을 만들어가는 여러분들과 일신기독병원 공동체가 되시기를 축복하며 응원합니다.

 

 

  


재단이사장은 인명진 목사이다. 

 

  


맥켄지가는 호남의 유진벨가족처럼 대를 이어 봉사하였다. 

 

부산의 인물

 

부산의 주요 인물은 독립운동가 박재혁 선생,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안희제 박사, 송상현 동래부사,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핀 강필리 동래부사,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윤흥신 장군과 정발장군, 독도를 지킨 안용복 장군,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 선생,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가 있다. 

 

체육인으로는 최동원, 추신수, 김태균, 마해영, 박철순이 있고 권투선수로는 세계 챔피언이었던 박찬희, 장정구가 있으며, 탁구선수로는 현정화가 있다. 축구선수로는 해양지역이라 그런지 뚜렷한 선수가 없다. 

 

그리고 정치인으로 김영삼(거제도), 노무현, 문재인이라는 세 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가수로는 현인, 현철, 나훈아, 이동원, 문주란, 정훈희, 설운도, 조용필, 최백호, 자현, 김건모 등의 국민가수들을 배출했다. 

 

조선소

 

부산은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있다.

 

부산지역 제조업에서 선박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로 경남, 울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고 다른 산업에 비해 생산과 취업 유발계수도 높다.

 

  


 

  

 

 

 

무역항


부산은 물동량이 많은 최대 무역항이다.  

 

  

 

  

 

 

  

 

해운대는 국제 관광지로서 발돋움했다. 

 

 

 

결론


하늘의 구속의 역사가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 땅의 역사안에 침투할 때 예측할 수 없는 변증법적인 역사로 발전했다. 부산이 하늘의 역사와 만날 때 세계화로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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