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바위의 진위성 여부

언어와 마애불을 통한 접근

편집인 | 입력 : 2026/05/21 [09:52] | 조회수: 70

도마바위

 

평은면 강동리 왕유동에 ‘도마바위(예수의 제자)’가 있다. 

 

유우식 교사의 발견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였던 영등포 여고 교사 유우식(兪禹植)이란 사람은 1987년 여름에 성도들과 철야기도회를 하고 있을 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우식아, 영풍군 평은면 왕유리에 가서 석상(도마상)을 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음성이 들렸다.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역사적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튿날 아들과 배낭을 챙겨 영주행 열차를 타고 평은면 소재지까지 와서 왕유리에 도착하여 마을 어르신께 물었더니 ‘언덕배기 산 밑에 두상이 없는 부처바위가 있다’고 해 그 곳으로 달려가 파헤치기를 시작했다.  

 

풀숲을 헤치고 가까이 가보니 집채만 한 크기에 높이는 5m가량 되어 보였고, 이끼와 솔잎이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 집사는 바위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기를 ‘주님, 이곳까지 인도해 주셔서 왔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감동해 깨달아 알게 해 주소서…’ 기도 중에 “그 바위의 이끼를 벗겨 보라”고 하셨다. 

 

  


바위의 이끼를 벗겨보니 수백 아니 수천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나타나 여러 차례 답사를 하고 탁본을 해보니 일명 ‘도마상’의 실체가 세상에 알리게 됐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우편에 있는 조각무늬가 히브리어 글자로 보이게 되었다.  

 

  

 

A. 언어학적인 접근

 

  1)  히브리어 

 

예수 당시 언어는 아람어, 문서는 헬라어

 

아람어(ארמית / ܐܪܡܝܐ 아라마야 / 아라미트)는 한때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800년경부터 기원후 600년 무렵까지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국제어로 사용되었으며, 아프로아시아어족의 셈어파의 북서셈어군에 속하는 언어이다. 고대에는 아람 문자로 표기했으나, 현재는 아람 문자에서 파생된 시리아 문자를 쓴다. 

  

아람어는 기원전 8세기 중반부터 아시리아 본토에서 아카드어와 더불어 공식어가 되었다. 기원전 500년경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광대한 제국에 사는 모든 민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찾다가 아람어를 선택했다.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도 아람어는 중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유대 팔레스타인 아람어(Jewish Palestinian Aramaic) 는 유대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언어로 예수도사용하였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도 알파벳이 유사했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였다. 예수의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마태는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였다.

 

물론 마태는 유대인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히브리어로 기록했다. 그러나 언어는 아람어가 통용이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준 페르시아는 아람어를 채택하였으며 당시 팔레스틴은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BC 538년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곤 아람어를 공용어로 선언한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대신 일상어로 아람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시절 일본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이스라엘(남유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미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익숙했다.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하고 칙령을 내린 기원전(BC) 537년에 1차로 귀환이 이루어졌다. 2차는 (BC)  458년, 3차는 (BC) 444년에 이루어진다.  

 

 

 

포로기 이후에도 이스라엘에서 아람어를 줄 곧 사용했다. 예수의 주 활동 무대였던 갈릴리는 이방인과의 교류가 잦아 아람어가 널리 쓰였다.

  

갈릴리 출신 예수와 제자들의 일상 언어는 당시 널리 쓰이던 아람어였다는 견해가 강하다. 복음서에 남아 있는 "에바다", "아바", “탈리타 쿰”,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게바" 같은 표현도 아람어 흔적이다. 

 

성경에도 아람어가 자주 사용되었으며 예수도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마가복음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마가복음 14:36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ܐܠܝ ܐܠܝ ܠܡܐ ܫܒܩܬܢܝ)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 ܛܠܝܬܐ ܩܘܡܝ)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요한복음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상 성경상의 언어로 보았을 때, 예수는 아람아를 사용한 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도 아람어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예수 제자들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한 것을 보았을 때, 예수의 제자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약하다. 

 

반면, 히브리어는 성전에서 율법을 읽거나 종교적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굳어져 일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소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했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했다. 

 

그러나 2세기 중반 소아시아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였던 파피아스는 “마태는 히브리어로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고 다른 이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대로 그것을 번역했다”고 했고, 2세기 후반에 프랑스 리용의 주교인 이레니우스는 “마태는 히브리인들 가운데 그들 고유의 방언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했다.

그러나 근거는 없고, 현재 마태복음은 헬라어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를 잘 아는 바울도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했다. 

 

도마행전

 

114개의 어록 형식으로 구성된 외경 복음서이다.

 

도마행전은 초기 그리스어와 고대 시리아어, 그리고 콥트어(고대 이집트어)로 기록되었다. 문서 종류에 따라 원본과 발견된 사본의 언어가 다르다.

 

 

  


사도 도마의 선교 여행을 다룬 이 외경의 원작은 시리아어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나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사본은 이집트 고대어인 콥트어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작성된 도마 행전은 없다.

1898년에 이집트 옥시링쿠스에서 파편으로 발견된 원본 사본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는데 그리스어 문헌과 내용이 일치함을 확인했다. 통설상 2세기 중반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도 헬라어로 성경작성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도 구사할 수 있었으나,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이자 국제어였던 헬라어를 선택해 편지를 작성했다. (성서공회, https://www.bskorea.or.kr/bbs/board.php?bo_table=society1&wr_id=14)

 

그러나 도마바위는 도마를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하였다고 본다. 도마가 기록했다면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이거나 헬라어로 표기해야 했다.

 

이 히브리어 아람어식 발음인  타오마(תאומא)(Teoma)'에서 '도마'라는 이름이 유래했으며, 이를 그리스어(헬라어)로 번역한 이름이 '쌍둥이'를 뜻하는 디디모(Didymos)이다.

 

  • ת (타브), א (알렙),, ו (바브), מ (멤), א (알렙)

제대로 표기되려면 도마를 뜻하는 테옴(תאום, Teom)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위의 모습은 테옴이라는 히브리어 문자의 형태라기보다는 불교 예술가들이 주장하는 감실의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언어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도마가 조각하였을 가능성은 없다. 도마는 어부이거나 목수, 석공출신이었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나 헬라어에 더 익숙하였을 것이다.   

 

 2) 한문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는 지전행(地全行)이란 글자는 한나라 시대(BC202-AD220)의 예서체 한자로 ‘땅 끝까지 다닌 사람’이란 뜻이다. 예서체는 전서체에서 한단계 발전한 문체이다. 

 

 

  

  

 

지전행은 한나라 시대의 예서체이다. 

 

  

 

  

 

한나라의 대표적인 조전비의 탁본도 예서체이다.

 

  

 

그렇다면 한나라시대의 예서체를 아는 사람이 바위에 새겼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의 예서체는 한나라 시대의 예서체와는 다르다. 광개토왕비도 예서체로 되어 있지만 한나라 시대의 예서체와는 조금 다르다.
 

  

 

불교계와 국가의 입장

 

일부 기독교인들은  불상의 감실형 조각을 도마의 기도하는 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의 바위는 기도하고 있는 손이 보인다.

 

  

  

B. 불상을 통한 접근 

 

 1) 손모양

 

 손모양은 구미 황상동 마애불상과 유사하다. 

 

  구미 황상동 마애불상 

 

  2) 감실형 조각

 

불교계는 도마 바위가 아니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며 히브리어 도마나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은 사실상 불상의 감실형 조각(그림을 참고)으로 4개의 작은 불상을 돌에 새기다가 미완성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다음처럼 불상을 만드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3) 발가락

 

발가락을 그대로 묘사한 마애불이 여럿 있다. 영주 도마 바위 하단에는 도마의 발가락도 보인다.

 

  

 

  

다른 불상에도 발가락을 그대로 묘사한다. 

 

법주사 마애불은 손과 발가락이 같이 있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

 

서산 마애 삼존불에도 발가락이 보인다.  

 

  

 

  서산마애삼존불

 

중국사천성에도 마애불의 발가락이 보인다. 

 

  중국 사천성 마애불상

 

인도 부조에도 부처의 발가락이 보인다.  

 

  

 

 4) 한자

 

인천보문사 마애불에도 한자가 새겨져 있다. 

 

  



국가유산청의 입장

 

불상의 감실형 조각은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파거나 만든 작은 방 또는 공간 형태의 구조물 안에 조성된 조각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마애불(바위에 새긴 불상)이나 석굴 사원에서 나타나는 양식으로, 불상을 신성한 공간에 모셔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역할을 한다. 

 

국가유산은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마애불로서 불두는 단절되었으나 부변의 흔적등으로 미루어 보아 丸彫로 조각되었음을 알수 있다. 불두 뒷편 바위면에는 광배의 조각선이 남아있고 발아래에는 운문과 삼겹의 연화좌가 조성되어 있다. 수인은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가슴 위에서 손바닥이 밖을 향하는 특이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 오른손에 잡고 있는 연꽃가지가 왼쪽 가슴위에 놓여져 있다."고 하여 마애불로 보고 있다.

 

  

 

  

 

 5) 다양한 한국의 마애불상


이처럼 국가는 도마바위에 대해 고려시대 유행했던 마애불상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마애불상이 많이 있다. 

 

 

  

  

 다른 마애불상을 보면 영주의 분처상과 유사한 면이 많이 있다. 

 

  

 

  안동 이천동 마애불상

 

  인천 보문사 마애관음보살좌상


고창 선암사에도 마애불상이 있다. 고창 마애불도 도마 바위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이 이외에 통일신라 시대도 마애불상이 있다.

 경주남산삼릉계곡상선암마애불좌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초반. 높이 6미터.

 

 

  익산 여래불상

 

 6) 영주 불상


이러한 여러 불상의 특징으로 미루어 당시의 조각수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영주는 유독 바위에 불상을 많이 새겨 놓았다.  

 

  

 

  

 

  

 

영주 휴천동에도 바위에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7) 삼국시대의 마애불상

 

고구려도 백제와 싸워 충주 봉황리에 마애불상을 짓기도 했다. 

 

  


신라시대도 감리마야여래상이 있다 

 

  

 

남원에도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은 6세기 말에 제작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은 서산마애삼존불이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제작된 백제 시대의 마애불로,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온화한 미소로 유명하며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결론


도마바위에 새긴 문자체는 히브리어와 한문이 나오는데 도마나 제자들이 한문이나 히브리어를 조각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도마나 당시의 제자들은 아람어와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한문을 쓸 줄 모른다. 

 

한나라 시대(BC202-AD220)라면 적어도 시기적으로 도마가 한반도에 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언어상으로 보았을 때 도마나 도마제자가 왔을 가능성은 약하다. 적어도 그들은 한문과 히브리어를 구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글자를 표기하려고 했다면 헬라어로 표기해야 했다. 도마복음서도 헬라어로 표기되었다. 

 

  


히브리어로 표기된다고 하더라도 4글자로 표기되어야 했다. תאומא (타오마)로 표기되어야 한다. 

 

그런데다가 도마바위같은 상이 기독교국가에서도 만들어진 것이 없다. 특히 기독교는 그림은 많이 있지만 마애불처럼 초기 기독교전파된 중앙아시아 지역에 제자들이 바위에 새겨진 사람의 형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군다나 손과 발가락, 감실, 한문이 새겨진 유사한 마애불이 많이 나타나고 인간과 관련한 형상을 우상으로 보는 기독교에서 사람의 형상을 바위에 조각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결론적으로 영주의 분처상은 손과 발의 모양이 기존의 마애불과 유사한 면이 있고, 한자가 사용되고, 히브리어보다는 불교의 조각상에 나타나는 감실과 유사한 면이 있어 도마상이라고 보기에는 구체적인 확증이 없다. 

그런데다가 인도의 첸나이처럼 도마가 왔다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도마가 왕래했다는 주장만 있는 실정이다. 

 

도마의 순교에 관해서는 인도 첸나이 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인도에는 도마 기념교회, 도마 무덤 등이 있다. 히에로니무스의 '신앙인의 전기'에는 도마에 관해 "파르티아인, 메데아인, 페르시아인, 카르마니인, 힐카니인, 박트리인, 마기인에게 전도하였고, 인도에서 순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인도에는 도마와 관련한 교회와 많은 유적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도마와 관련한 유적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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