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카자흐스탄1)

카자흐스탄의 기적, 고려인은 인구 0,6%이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

편집인 | 입력 : 2026/05/14 [19:51] | 조회수: 90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때문에 연해주에서 30-40일을 달려가 내린 곳은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였다. 

 

 

 

 

 

 

 

 

그들은 6000키로 이상을 달려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에 도착했다. 

 

 

 

12살 때 가족과 함께 우슈타베에 온 고려인 1세 미하일 천씨는 "한 달간 화물열차를 타고오며 많이 죽었소. 죽은 사람들은 역에 설 때마다 소련 경찰들이 버렸는데 어디에 묻었는지 아무도 모르오." 라고 회상했다. (연합뉴스 2013. 12. 27)

 

  

 

"도착해서는 카자크인 집의 창고나 축사 등을 얻어 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들판에 토굴을 파고 살기도 했소." 그는 말을 이었다.

 

현재 수도 알마티는 상당히 발전된 도시로 인구 10만 명이 살고 있다.

 

 

  

 

알마티 인구 4분의 1인 고려인이 2만 5천명이 살고 있다.  현재 고려인들의 집단 정착지는 잘 지어진 주택들이다. 

 

 

 

알마티 수도에는 LG간판도 보인다. 

 

 

  

 

시장에서 고려인들은 여전히 한국음식을 위한 재료를 팔고 있다. 

 

  


고려인들은 우슈토베에서 벼농사가 불가능한 지역을 옥토로 만들었다. 

 

  

 

  

 

기후로 따지면 너무나 추워서 벼농사가 불가능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해냈다. 강줄기를 만들어 멀리서 물을 끌어왔다. 

 

  

 

  


고려인들은 교육열이 투철해 연해주에서 배운 경험으로 대학까지 세웠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처음으로 서구의 교육을 경험했다. 러시아정교회는 교회와 학교를 많이 세웠다. 학교를 세운 것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다. 

  

  

 

상원위원

 

고려인 중에 상원의원까지 나왔다. 김게오르기 위원은 카자흐스탄에서 '장군' 칭호를 받는 최고위급 국가 원로다. 초대 상원의원에 이어 3선을 지냈고, 검찰청 부청장, 법무부 장관, 대통령 고문을 역임했다. 김 위원의 가문은 법조 명문가로 꼽힌다.

 

부친은 현행법 제정에 기여한 저명한 법조인이었고, 아들은 검찰총장 수석보좌관으로 법조인의 대를 잇고 있다.

 

  

 

 헌법위원장까지 고려인이 장악

 

김유리 알렉세예비치는 1940년에 카자흐스탄 고려인출신으로 탈티코르간주에서 출생하여 지난 2000년에 사망한 고려인 주요인사로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카자흐스탄 헌법위원회 위원장직을 역임한 대표적인 고려인 엘리트이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사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조성하고, 기념식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직접 참여하는 등, 그는 고려인 사회뿐만 아니라 전 카자흐스탄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자랑스러운 한민족 동포이다.

 

고려극장

 

고려인들인 이외에 고려극장을 만들어 한국과 관련한 연극과 춤을 꾸준히 재생산했다.   

 

 

  

 

고려인들에 대한 평가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고려인들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고려인들은 무척 적극적입니다"

 

  

 "고려인들은 자신의 문화나 뿌리를 잊지않는 훌륭한 사람들이죠"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는 고려인들

 

고려인 후손 중에 카자흐스탄 10대 건설회사에 중요한 보직을 차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도 대국민 연설에서 고려인들을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려인들에 대한 평가는 근면하고 똑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제이주를 당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자무식한 사람들이었다. 현재 카자흐스탄 인구 16,00만 명 중에 고려인은 10만명 정도이다. 0,6%이다. 

 

그러한 0.6% 중에 고려인들은 헌법재판소장, 상원의원, 올림픽 피겨선수, 건설업, 금융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잊지않기 위해 꾸준히 한글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고려인들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다. 우슈타베에서 한인들은 어떻게 살아갔나?

 

  

 

한달 가량 짐승처럼 화물객차에 실려 처음으로 부려졌던 곳이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역이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그들은 우슈토베에 도착하자마자 토굴을 만들어야 했다. 토굴집이다. 

 

  

 

우슈토베

 

카자흐 옛 수도 겸 경제도시인 알마티에서 북동쪽으로 300㎞ 떨어져 있는 우슈토베란 소도시는 고려인들, 이들과 함께 강제이주됐던 체첸인, 독일인이 모여 살면서 도시로 발전했다. 한때 인구가 수만명에 달했지만 현재는 2만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 당시의 토굴촌은 지금은 공동묘지로 변하였다. 

 

  

 

고려인들의 언론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들은 1923년 창간된 한글 신문 ‘선봉’을 모태로 한 고려일보와 설립 90주년을 맞은 고려극장을 운영하는 등 전통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려일보는 선봉과 레닌기치의 맥을 잇고 있다. 연해주에서도 고려인들은 언론을 중시하였다. 

 

대동공보

 

당시 이강이 편집국장이던 대동공보는 이등박문 살해의 배후역할을 하였다.  안중근은 대동공보를 통하여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온다는 고급정보를 입수했다. 

 

 


대공공보의 편집국장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1세인 감리교도 이강이었고, 그는 배후에서 안중근을 지도했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저격이 성공으로 마치자, 대동공보는 다음과 같이 기사를 쓴다. 

  

"일본에 정치가로 유명한 이등(伊藤)이가 할빈(하얼빈·哈爾濱)으로 오난 길에 마침 정거장에 내릴 때에 한국사람 하나가 이등을 향하야 총으로 쏘아 중상한고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일어난 지 이틀 뒤인 1909년 10월 28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한인 신문 '대동공보(大東共報)'는 이를 신속 정확하게 보도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 한인 신문이야말로 바로 안중근 의거를 주도한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모의가 이뤄진 곳이 바로 대동공보사의 사무실이었고, 안중근 의사는 이 신문의 통신원이었다. 

 

  

 

재정을 담당한 사람은 최재형이었다. 

 

  


개신교와 달리 천주교에서는 안중근을 살인자로 취급했다. 당시 조선교회의 최고 책임자인
뮈텔 주교는 “안중근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공적인 표지를 보이지 않는 한 가톨릭교회의 자녀로서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천명했다.

 

런던타임즈는 “상당수 한국인이 암살을 접하고 환희하고 있다”는 비판 기사를 실으면서 안중근은 ‘정치적 광분자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또 뉴욕타임즈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제국주의 국가는 제국주의 일본을 옹호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의사를 사실상 복권한다. 김 추기경은 “일제 치하 교회가 안 의사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러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해 연대 책임을 느낀다” “의거는 일제의 무력 침략 앞에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행위였으므로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했다.  

 

 

  


고려인의 언론: 선봉, 레닌기치, 고려일보

 

소련 말기인 1988년 소련민족우호훈장을 받은 『레닌기치』신문은 소련붕괴 이후 신생독립국인 카자흐스탄에서 1991년 고려인 국제신문 『고려일보』로 개명되었다. 고려일보가 오기까지 먼저 선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제이주가 발생한 1937년 당시 선봉신문은 제6대 편집장인 최호림이 이끌고 있었는데, 최호림을 비롯한 선봉의 모든 직원들은 강제이주 직전 소련내무부 인민위원회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 가운데 농업부장이었던 황동훈만이 살아남아 강제이주로 정착한 크즐오르다에서 『선봉』을 이어받는 『레닌기치』로 중앙아시아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레닌기치는 1923년부터 연해주에서 '선봉'이란 제호로 발간되다가 1938년 강제이주 후 '레닌기치'로 바뀌었다. 

 

'레닌기치(Lenin Gichi)' 신문은 ‘재소한인’ 연구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이 신문은 50년 넘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대표적인 순한글 고려인 신문으로, 러시아지역 한국학 연구를 위해 주로 활용되었으나, 재외동포의 민족어 또는 계승어(heritage Language) 연구를 위한 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고려일보 

 

  

 

 

지금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일보'가 명맥을 잇고 있다.

 

한반도 밖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글신문인 '고려일보'의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가 카자흐스탄에서 지난 2023. 3. 6.(월)까지 열렸다. 

 

 

  

  

『고려일보』는 『선봉』신문을 기반으로 발전한 소비에트 고려인 신문인『레닌기치』의 뒤를 잇는 신문이 되어, 한반도 역외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발행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923년 창간한 고려일보는 민족신문으로서 지금까지 고려인사회를 대변해왔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와 한국어 교육 금지, 독자 감소 등 어려움이 이어졌지만,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사명 하나로 꾸준히 신문을 제작해온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신문은 주간지로 발행하며, 총 16개 지면 중 4개면은 한글 지면이다. 고려인들에게 모국어인 한글을 잊히지 않기 위해서다.

 

이처럼 고려일보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중앙아시아에서 한글의 문화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나랏말씀이 중앙아시아까지 이주한 것이다. 한글도 강제이주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고려인들 0.6%가 카자흐스탄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은 교육의 영향이다.

 

고려인들은 조선이나 러시아에서 배운 기독교식 학교와 교회를 통해 일찍부터 서구의 근대화에 눈을 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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