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짧은 시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교육열때문이었다.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록에 의하면 한인 사범대학을 크즐 오르다에 배치시키는 것이 가능한지의 인식여부, 학교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에 대한 것을 논한 바 있다.
카자흐 공산등은 한인사범대학의 관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크즐 오르다에 전문가까지 파견한다고 하여 고려인 대학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크즐오르다 대학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사범학교(원동고려사범대학)는 1931년 한인 교사 양성을 위해 설립된 해외 최초의 조선인 대학이다. 경성대학교보다 먼저 세워졌다.
극동 지역 고려인 교육의 중심지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폐교되며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전되는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03-1905년 한인대상 정교회 학교가 35개나 되었다. 이처럼 한인들이 어렵게 이주하여 고난의 세월을 보내 러시아에서 얻은 것은 자녀들의 서구 교육과 기독교 신앙이었다.
고려인들은 우수리스크에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신앙
고려인들은 정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라는 창조주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대학교육을 통하여 성공한 김레오니드의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정교회 교인이었다.
김씨네 가문의 역사는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공동체와 긴밀히 연계되었다. 김씨네 선조인 예브게니와 예카테리나는 파타시 촌에 1879년부터 즉 한인이주민들이 이 촌을 설립한 후부터 등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농업에 종사하였다.
러시아 극동 국립역사문헌보관소(РГИА ДВ)에는 1913년 11월 17일자 농민 가족 명부가 보존되어 있으며, 이 명부에는 김 예브게니,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 아들 알렉산드르(훗날 레오니드 알렉산드로비치의 아버지), 딸 펠라게야가 언급되어 있다: “1913년 11월 17일자 가족 명부 (김 예브게니 33세, 아내 예카테리나 29세, 아들 알렉산드르 5세, 딸 펠라게야 1세)”.
정교회 신자였던 예브게니는 제1차 예비역 병사(예비군 병사)로 등록되어 있었으며, "이 가족은 주택 1채, 부속 건물 1동, 노동용 소 1마리, 돼지 1마리를 보유하고 있었고, 약 1헥타르(1데샤티나)의 땅을 경작해 곡물을 재배하였다.”
예브게니는 마을 공동체의 사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12년에는 ‘현물로 내던 식량세를 금전 납부 방식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결의안에 서명한 몇 안 되는 유식한 농민 중 한 명이었다.
연해주에서 정교회가 설립한 학교에서 서구의 교육을 처음 접하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까지 와서 대학을 통하여 지식을 얻은 것이 인구의 0.6%로 하여금 카자흐스탄의 중요 위치에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외에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믿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였을까? 레닌혁명 이후 교회가 소멸되다 보니 그들은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몰래 신앙생활을 하였다.
19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병합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동방 정교회가 전파되었다.
20세기 중반, 소련의 스탈린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일대로 수많은 소수민족(고려인, 체첸인, 체코, 독일인 등)을 강제 이주시켰는에 이 과정에서 유입된 독일인과 일부 슬라브족 기독교인들, 그리고 이후 고려인 사회에 정착한 복음주의(침례교, 오순절교 등) 신자들을 통해 카자흐스탄에 개신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콜린 더브론 저서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에 이미 침례교전도사들이 들어와서 고려인들을 전도하였다고 적고 있다.
무슬림이 공산주의와 함께 공존하고, 기독교전통도 깊이 뿌리내렸다고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침례교전도자들이 고려인에게 전도하니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공산치하에서도 복음이 전파되고 가정애서 개인신앙이 유지되었다.
이 책의 349, 355, 361p에 고려인중 침례교도가 있었다고 했다. 한 고려인은 자신들에게 파견된 침례교 목사가 있었다고 했다.
1863년에서 1873년 사이에 5만 8천 권의 러시아 성경책이 우크라이나 남쪽 지역과 카자흐스탄 서남쪽 빠벌로지에 보급됐다. 1901년에는 카자흐어로 된 4복음서가 출판됐다.
1920년부터 1929년까지는 특히 침례교의 선교 활동이 왕성했다. 1927년 카자흐스탄 전역에는 62개의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1945년까지는 카자흐스탄 북부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대규모로 거주하면서, 독일인 신자들이 유입돼 기독교가 활성화됐다. 소비에트 연방정부 시절, 1백여 종족들이 강제적으로 혹은 자율적으로 카자흐스탄에 들어오게 됐고, 이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 침례교, 로마 가톨릭 등 여러 기독교 종파들이 유입됐다. 즉, 카자흐스탄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자발적이라기 보단 강제로 이주되어 온 종족 집단이었다.
콜린 더브론도 침례교 전도사들이 카자흐스탄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외에 카자흐스탄에서도는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정교회가 존재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출판한 '까자흐딴의 고려인'(전경수 편,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이라는 책 290p에 공산치하시절인 1954년에 러시아 정교회가 카자흐스탄에 세워졌다고 보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고려인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만 예배를 본다고 했다.
러시아 정교회와 고려인들
외국어대 사학과 반병률교수는 러시아 정교회는 조선인들에게 1869년부터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여 1872년에는 남우수리주 조선인의 62%가 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대부분 신앙보다 정치적인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계명대 오새내 교수는 대동철학회 논문집 84집에서 1865년 지선허 마을에서는 최초의 이민자 촌장 최운국을 포함한 세 가정이 발레리안 사제에게 영세를 받은 것이 최초이고, 1875년에는 러시아에 등록된 한인 중 2252명 중 748명(32%)가 영세를 받았다고 했다.
주기도문 암송
실제로 학교에서는 주기도문과 마리아 기도문을 외우는 학생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학교가 시작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과는 눈에 보였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부르는대로 글자를 썼으며 주기도문과 성모마리아의 기도문을 외우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회를 세우는 한인들
정교회 사제들은 러시아에 있는 한인들의 영적인 면보다는 사회적 관리에 있었다.
이처럼 연해주에서 정교회를 통한 신앙의 힘이 카자흐스탄까지 이어져 대학을 설립하고 대학에서 공부하여 카자흐스탄 150여개 민족 중에서 최고의 민족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고려인을 고려인답게 만든 것은 정교회를 통한 서구의 교육방식이었다. 고려인들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을 때 대한민국 내지에서나 외지에서 고려인들은 항시 우뚝서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에서 1937년 강제 이주 후 나름대로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 신앙을 통하여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에서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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