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크츠크
지금까지 필자의 글은 주로 연해주에 머물렀다. 지선허, 연추,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이었다. 이번에는 동시베리아, 이르크츠크, 자바이칼, 치타에 관심을 두도록 한다.
이르쿠추크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이칼 호수 근처에 있는 도시로서 시베리아에 있는 러시아의 도시이자, 이르쿠츠크 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62만 99명. 이르쿠트 강이 안가라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시베리아에서 대도시로 인근에 바이칼호가 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러시아의 극동지역과 우랄 지역·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동부 시베리아의 교통 요충지이다.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쿠츠크는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좌가 놓여 있고 극장, 오페라 등의 문화 시설도 갖추고 있다.
발전된 문화와 예술로 현재도 소비에트 형식의 딱딱한 건물과 고전풍의 건물이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한국인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에게 중요한 근거지였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언뜻 보기엔 한국과 인연이 없을 법한 이 도시에도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있다.
이르크츠쿠가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공산당이 이 곳에서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연해주에서 1918년 4월 이동휘, 김알렉산드라가 주동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세웠다. 그 이후 2년만에 이르쿠추크 고려공산당을 세운다. 한인사회당을 세운 김알렉산드라는 일찍부터 볼세비키 당원이었다.
김알렉산드리아
김알렉산드리아는 연해주 1세 이민자녀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1914년 우랄산맥 일대로 이주했는데 철도 노동자(조선인, 중국인)들의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등 통역사이자 노동 협상가 역할을 하면서 노동권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1916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도 전에 한 정당에 가입했는데 이 정당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 이후 멘셰비키보다 더 급진적인 노선인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조선인으로서 가장 먼저 공산주의에 편승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남편은 정교회 사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러시아 혁명군인 적군에 편승하여 제정측의 백군과 싸우다가 총살을 당했다.
그는 볼셰비키당으로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위협을 느끼자 1918년 6월부터 100여 명의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으며 한인사회당 창당 단 5개월 만에 백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8년 9월 16일 처형당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공산당 김알렉산드라는 공산당이지만 항일투쟁을 하였다고 하여 이명박 정권시절 2009년 애국장을 받았다.
"김 알렉산드라는 한인(韓人)들을 모집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조직하여 일본군 및 백위군과 전투를 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9월 하바로프스크가 일본군과 백위군에 함락되었을 때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된 계기는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한인사회당(1918)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에 고무된 이동휘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조선독립 달성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 정당을 1918년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창설했다. 김알렉산드리아가 후원했다.
러시아는 이동휘와 김립 등을 주축으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한인사회의 친볼쉐비키화에 주력하였다.
이동휘의 제안에 찬성하는 좌파그룹 다수파는 볼쉐비즘에 찬동하고 조선혁명을 그 길로 촉진하자고 주장하여 볼쉐비키세력과 밀접한 연대를 강조하였다.
이르크추크 고려공산당(1920. 1)
1920년 1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당시 붉은 군대의 지도 아래 대한국민의회 회원들이 창당했다.
처음에는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이라고 했다가 1920년 전로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1년 5월 31일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정식 명칭은 '전로고려공산당'이었지만, 이동휘가 상하이에서 결성한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대비시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라 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통합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1921년 전로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이 과정에서 상해파에서 이탈한 김만겸, 여운형, 안병찬, 박헌영, 김규식, 김단야 등이 가담하여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를 결성한다.
상해 고려공산당(1921, 5)
1919년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동휘는 1919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동휘는 항일운동에 성공하기 위하여 레닌정권의 힘을 빌려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수단으로서 1920년 봄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이동휘의 심복인 박진순 · 김립 · 이한영) 등의 한인사회당 간부를 중심으로, 여운형 · 조완구 · 신채호· 안병찬 · 이춘숙) · 조동호 · 최창식 · 양헌 · 선우혁 · 윤기섭 · 김두봉 등의 임시정부관계자들을 가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박진순은 레닌과 사진을 찍기도 했다. 상해 공산당 박진순이 고려공산당 대표자격으로 1920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에 참여했다. 좌측은 레닌이다.
요약하면 1921년 한인들이 조직한 2개의 공산주의 정당이 있었다. 하나는 상해 고려공산당이고, 다른 하나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었다.
이 두 개의 공산당은 모두 볼셰비즘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서로 인적 교류가 거의 없이 독자적으로 세운 정당이었기에 기원에 대하여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상해파, 이르쿠츠크파라는 명칭은 외부에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며, 두 조직 모두 정식 명칭은 단순히 '고려공산당'이었다.
조선공산당(1925)
1925년이 되어사야 조선에도 조선공산당이 탄생한다.
1921년 1월 고려공산당 대회가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고, 1924년 12월 조선공산당 지부를 중국 베이징에 설립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고 초대 책임 비서로 김재봉을 선출했다.
요약하면 좌익독립운동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연해주 지역까지 파급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한인들도 여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김알렉산드리아 같은 이는 일찍 볼세비키즘에 귀의했다.
10월 혁명 이후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에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면서 많은 한인들은 볼세비키즘이 항일과 독립의 대인이라고 판단,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민을 러시아로 간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항일운동을 벌였고, 미국으로 간 사람들은 민주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했다.
1918년 조직한 한인사회당의 씨앗이 지금까지도 좌우이념대립의 장으로 몰고가고 있다. 대한민국내 사회주의 요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르쿠츠크지역에 기독교 복음도 전파되었다. ,
1910년 11월 1일 이르쿠츠크 교회의 교사양성학교 한인 교육생 이반 니(H.HH)는 이르쿠츠크 티혼(M.Tpon QKHA -ÃoHe6HH) 대주교에게, "간절히 청원합니다. 저희 한인들은 성삼위일체 신앙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세례받을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저의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기에 이르쿠츠크 선교회의 이후부터 한인들에게 정교신앙을 전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한인들의 세례와 관련해 조치를 취해줄 것을 간청합니다" 라고 했고,
에프렘 대사제는 1911년 12월 18일 치타 한인정교학교 개교식에서 “공부하는데 중요한 두 가지는, 첫째는 성경연구요, 둘째는 조국의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애국심이 풍부하면....내일은 안락한 땅에 나갈 수 있으며 ”라고 하여 정교회를 통한 민족혼을 일깨웠고,
자바이칼 선교부의 한 교리문답서는 "한인들은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했으며, 특히 기독교적인 사랑과 협력을 볼 수 있었다"며 한인들의 믿음과 행실을 강조했다.
이강
그는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들과 함꼐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옮겼고, 그곳에 노동소개소를 개소하고 한인 노동자들에게 철로 공사장과 농장, 특히 오렌지 농장 등지에서 직업을 알선해주면서 한인 공동체를 이뤄나갔다.
1907년 1월 초순, 이강, 안창호, 임준기, 신달윤, 박영순, 이재수 등은 '대한신민회'를 발기해 위기에 처한 조국을 일신해서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에 노력하기로 결의하기도 햇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기독교인 독립투사였다.
그는 1908년 블라디보소톡으로 이동하여 교민들이 민족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여 연해주 최초의 신문인 해조신문, 대공공보의 편집장으로서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하였고, 그는 안중근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강은 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조심스레 논의했다. 그들이 논의한 결과 백발백중의 명사수이며 애국심이 출중한 자로 알려진 안중근이 의거를 담당할 적임자로 추천되었다.
안중근을 저격수로 추천한 것은 이강이었고, 권총을 사준 것운 최재형이었다. 최재형은 대동공보 사장이었고 이강은 편집국장이었다. 이처럼 안중근이 이토오히보루미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최재형과 이강의 작품이었다.
이강은 "내가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온다는데 그 자를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소?"라고 묻자 교포들은 "안 의사가 사격의 명수니 그를 불러 하얼빈으로 파견하면 문제 없이 이등을 죽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황급히 서둘러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안 의사는 즉시로 달려왔다. 나는 주저없이 그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안의사는 쾌락했다. 죽고 싶던 차에 자기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주니 이 기회에 보람있게 싸우겠다고 거듭 맹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그의 말에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논에는 광채가 번뜩이었다."
그는 대동공보 편집장을 맡으면서 안중근의 이토오히로부미 저격을 의뢰했고, 취재하러 나온 대동공보기자로서 위장케 하기도 했다. 이토오히로부미를 앞에서 저격한 것은 대동공보기자로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강은 안중근과 함께 의거에 관한 구체적인 의논에 들어가 권총과 이토오히로부미 사진을 구입하고, 보조역을 할 사람도 선정했다.
이처럼 안중근 뒤에는 언론이자 감리교도인 이강이 있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의 여파가 시베리아까지 미치자, 이강은 이를 이용해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부흥시키기로 결심했다. 동시 베리아까지 갔다
시베리아로 간 이강
이후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자, 이강은 치타에서 니콜리스크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 전로한족회에 적극 가담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적극 나섰다.
당시 이강은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다가 철수하던 체코군과 결탁하여 아이훈 지방에 무기를 감춰두고 있다가 이를 만주의 독립군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감리교도였지만 자신의 신분이 탄로날까봐 최관을목사처럼 러시아정교회에 귀의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정교회 신문인 대한인정교보를 발행하여 민족운동와 복음운동을 하였다.
1930년 안창호가 체포되었을 때 이강의 가족이 안창호의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안창호, 안중근 뒤에는 이강이 있었다.
1941년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충칭에서 결성된 후 중국 각지에서 특무활동을 전개할 때, 이강은 산시성에 주둔한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의 징모 임무를 맡고 영안, 남평, 건양 등지에서 광복군 모병활동을 수행했다.
광복이후 1946년 고국에 들어와 흥사단 간부, 한중협회 간부를 거쳐 남산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0월 1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정묘역에 안장되었다.
공훈전자사료관은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에서 모집하는 이민에 들어서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유학을 하려다가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그의 권고로 이를 단념하고 안창호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교민단체로서 1904년에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설했으며, 1905년 11월에 동지들과 함께 기관지인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07년초에는 안창호와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로 하고 안창호를 먼저 귀국시킨 후 뒤이어 이강도 귀국하여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이 강은 몇 달 후에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톡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 2월에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로서 미주에서 종래의 공립협회를 확대개편하여 재미주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조직되자 정재관 등과 함께 이에 보조를 맞추어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과 지회를 설치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하여 편집 논설기자로 활동했으며, 이 신문이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이름을 고친 후에도 그 편집책임을 맡았다.
1909년 10월 이등박문(伊藤博文) 처단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였으며, 안중근(安重根)이 이등박문 포살의 특공대로 하얼빈에 나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의 의거가 성공한 후에는 안중근 의사를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하여 북경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대동공보』가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 당하자 시베리아의 치타로 가서 다시 『정교보(正敎報)』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9년 9월에 노령에서 파견한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일제총독 재등(齋藤)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약 50일간 구금되었다.
1919년 말에 석방되자 바로 상해로 탈출하여 안창호를 만나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했으며 흥사단(興士團) 운동에 진력하여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興士團遠東地方委員會)를 설치하였다. 일제의 세력이 장강(長江) 일대에까지 뻗치게 되자 상해를 떠나 남중국 방면으로 갔다. 1928년에 하문(廈門)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호송되었으며 징역 3년형의 선고를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자 다시 고국을 탈출하여 중국 복건성(福建城)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대만에 있는 한국 동포들에 대한 선무단(宣撫團) 단장이 되어 대만으로 갔다가 1946년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이처럼 이르쿠츠크의 한편에서는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념을 통한 악령의 사회주의가 전파되어 동시베리아인 이르크추크는 당분간 성령과 악령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성령은 러시아땅에 다시 역사하기 시작했다. 1992년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해체하면서 성령은 이념을 통한 악령에 대해서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주적은 일본 제국주의만이 아니라 또다른 사회주의의 장벽까지도 극복해야 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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