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러시아11)

사할린, 열차, 일본에서 떼죽음을 당하는 한인들

편집인 | 입력 : 2026/05/05 [07:35] | 조회수: 99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들

 

일본인들은 조선 노동자들을 강제 징용하여 주로  탄광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조선인들은 미국본토를 가든지, 독일을 가든지 항시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고려인들은 러시아 사할린에서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12~20시간 중노동과 폭행에 시달리며, 많은 동포가 사망하거나 광복 후에도 귀환하지 못한 채 이중 징용의 아픔을 겪었다.  

 

  

 

살해당하는 한인들

 

1944년 연합군의 반격으로 수송로가 끊기자, 일본은 사할린의 탄광을 폐쇄하고 약 3,000명의 한인을 일본 내 큐슈, 이바라키, 하시마 등지의 탄광으로 다시 강제 이동(이중 징용)시켰다. 일본군들은 사할린에서 철수하면서도 한인들을 살해했다. 

 

  

  

일본에서 희생된 한인들

 

하시마는 우리가 잘 아는 군함도이다. 한국말로 군함도는 일어로 하시마 섬으로 행정구역상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구 다카시마정)에 소속되어 있는 섬이다. 섬이 군함처럼 생겨서 군함도(軍艦島ぐんかんじま, 군함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군함도는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치며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주민들이 떠나서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조선인들이 해저 100 미터 깊이의 막장 속에서 매일 가스 폭발의 위험을 감수하며 노역을 했다. 

 

  

 

  

 

  

 

 


일본인들은 임금도 주지않고 노역만 시켰다. 

 

  

 

 

원폭투하로 생명을 잃은 조선인들

  

1945년 8.15 해방이 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투하로 인해 일본이 초토화되자 항복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인들이 원폭투하로 인해 5만 여명이 죽었다.

 

여기에는 사할린에서 강제탄광노동을 한 한인들이 다시 일본에서 강제징용돼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해 사망을 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 강제 동원되거나 거주하던 한국인 피해자는 약 7만에서 1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사망자를 포함한 피폭자가 전체 피해자의 약 10~20%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인은 히로시마에서 약 1만 5,000여 명, 나가사키에서 약 3만 5,000여 명 등의 한국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폭 후 히로시마 중심가 7㎞ 지역 내 모든 것들이 폐허로 변했다.

 

  

 

 

  

 

  

 

  

 

 


히로시마에서만 14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군인이 2만 여명,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한국인 3만여명도 있었다.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945. 8. 6. 히로시마 원폭 공격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항복하지 않자 3일 후 미국은 나가사키에 원폭 한 발을 더 투하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이 폭발했다.

 

한국인 5만 명이 해방을 몇일 앞두고 일본에서 강제 징용돼 원폭투하로 인해 사망을 했다.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해 민족이 떼죽음을 당해 

 

무능한 정치인으로 인해 나라잃은 민족은 사방에서 집단 떼죽음을 당하였다. 연해주에서 죽고, 사할린에서도 죽고, 강제이주 열차에서도 죽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죽어갔다. 히로시마에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있다. 

 

  

 

한인들은 러시아, 일본 등 가는 곳마다 떼죽음을 당하였다. 국내에서도 1894년 동학혁명이 발생하였을 때, 동학군 10만 여명이 일제에 의해 떼죽음을 당한다.

국가의 힘이 없는 한인들은 의지할 곳은 러시아도 일본도 아니었다. 제국주의나 사회주의보다 더 힘이 있는 하나님만 의존해야 했다. 제국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민중을 떼로 죽이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을 보더라도 국가없는 민족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 베트남전 이후 보트 피플과 쿠르드난민, 팔레스타인난민은 국가가 없다보니 국제사회에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 

 

베트남 보트피플

 

  쿠르드 난민

 

  팔레스틴 난민


이처럼 사할린에서 다시 강제로 이중징용되어 일본으로 간 한인들이 원폭피해로 다시 고난을 당했다. 사할린으로 간 한인들은 러시아에 치이고 일본에 치였다. 힘없는 나라에 사는 민족은 사람이  아니었고 노예에 불과했다.

  

떼죽음 당하는 조선인들

 

국가가 힘이 없다보니 1937년 러시아에서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수만명이 죽고, 1945년 일본에서 강제징용과 원폭으로 수 십만명이 죽는다. 심지어 공산주의때문에 6.25때도 민간인과 군인이 60만명 이상이 떼죽음을 당한다. 북한도 52만명이 죽는다. 

 

 

 

  

 

한인들은 1894년부터 일본에 의하여 약 10만명이나 되는 동학군이 떼죽음을 당했고, 일제에 의해 징병으로 소집된 조선인 10만명 이상이 떼죽음을 당하고, 625때는 북한과 러시아, 중국으로 인해 수십만명의 민중들이 떼죽임을 당한다. 제주 4.3사태에서도 힘없는 민중들은 국가의 폭력앞에 힘없이 떼죽음을 당했다.    

 

힘없는 국가의 민족은 열강의 제국주의, 공산주의  앞에서 탄광과 벌목의 노예로 전락하기도 하고, 전쟁 희생양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조선인 가미가제

 

당시 조선인 가마가제는 16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자살특공대로 거의 사망했다. 성공할 확률은 6%였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러시아 역시 스탈린이 1937년 일본인 첩자가 조선에 있다는 명분으로 70년 동안 연해주에서 터를 잡은 조선인들을 열차에 태워 40일 동안 중앙아시아 동토의 땅으로 억지로 이동시켰다.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가축용 화물열차에 실려 6,000km 이상의 거리를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추위와 기아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해서 그 이듬해까지 약 2만 여명이 사망했다.  

 

  

 

열차는 창문이 없었다. 

 

  

 

화장실도 없었다. 

 

  

 

기차가 정차하면 대소변을 보기에 바빴다. 

 

  

 

열차는 창문이 없고 너무 추워서 견디기도 힘들었다. 

 

  

 

 

러시아가 조선인들을 보낸 곳은 카자흐스탄, 우주베키스탄의 아무것도 없는 언 땅이었다.

 

 

  

 

 

  

 

잠자리도 없었고 음식을 해 먹을 곳도 없었다. 

 

  


배정받은 땅은 농사하기에 불가능한 땅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초막을 짓고 일어났다. 

 

  

 

넓은 땅을 가나안으로 만들었다. 

 

  


당시 태어났던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우주베키스탄보다 고려인 아이들이 6배나 많이 죽었다. 

 

 


동토의 땅은 갈대만 무성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갈대 땅을 쌀 땅으로 만들어 그 이듬해부터 수확을 했다.  

 

  



 



  

 

고려인들은 학교도 세웠다. 

 

  

 

이처럼 한인들은 동토에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척리를 없애면 신한인촌을 만드는 것과 같았다.  

 

영주귀국

 

1992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과 소련이 국교가 정상회되어 1992년부터 영주 귀국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4376명이 한국에 영주귀국을 했다.

 

  

 

  

 

  

 

고려인들의 또다른 아픔, 이산가족


1937년 이러한 눈물과 한숨의 아픔이 중앙아시아에서 계속되는 동안 1945년 사할린에서는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고 해방이 되었어도 사할린에 사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올 수 없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이전의 출생자들만 영주귀국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은 한국에 부모와 함께 오지 못하고 생이별을 하는 것이다.

 

사할린교포들의 영주귀국조건은 1945년 이전에 출생한 1세대에 한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자녀는 한국에 올 수 없어 이산가족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주귀국을 하는데 자식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생이별을 다시 하는 것이다. 

 

 

  

  

 

여전히 자녀들은 러시아에 있어 이산가족의 아픔을 감당해야 했다. 

 

  

 

  

 

  



  

 

 

 

무능한 정치인들때문에 고통을 당한 민중들의 아픔은 지금이라도 국가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  고려인들은 어디를 가나 핍박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 이상으로 일어났다.  


고려인들이 끈질기게도 러시아, 중앙아시아, 일본에서 여전히 지금도 후손들과 함께 고려인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이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1860년대부터 러시아를 가든지, 1593년부터 일본에 가든지 정교회, 카톨릭, 개신교를 따지지 않고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종교라면 기독교에 귀의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은 아닐까? (계속, 사할린의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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