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러시아10)

사할린으로 간 사람들

편집인 | 입력 : 2026/05/04 [04:31] | 조회수: 56

 

 

1863년 조선땅에서 살기 어려운 한인들 13가정이 노젓는 뱃사공이 있는 푸른 두만강을 건너서 러시아의 연해주 지선허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연추에도 가고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에도 가서 산다.  1870년에 이 중의 일부가 일자리를 찾아 사할린까지 가서 살게된다.  사할린에는 탄광이 있기 때문이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사할린 남부를 지배한다. 사할린북부는 러시아가 점령하고 남부는 일본이 점령했다.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통해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다.  

 

  

 

국가총동원법 공포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 발표 후, 본격적으로 한국인을 탄광과 벌목장에 징용했다.

 

  

 

  

그들은 탄광으로 끌려가 노동을 해야 했다.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약 3만 여명이었다.

 

  


대부분 노예 생활을 했다. 

 

  

 

  

 

  

 

  

 

강제로 징용된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지치다 못해 죽어가거나 불구가 되거나 폐병이 드는 일이 많았다. 나라잃은 민족이 겪는 당연한 고통이었다.

 

 

  

 

어리석은 조선, 자신들끼리 밥그릇 싸움 

 

유교로 물든 사색당파와 쇄국정책, 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고종의 무능함, 세계제국주의 질서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 정치인들의 안일함, 실용적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는 유교가치의 사회가 조선을 망그러뜨렸다.

 

  

 

  


이에 대한 댓가는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돌아갔다. 민중들은 자유를 찾으러 연해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일부는 강제동원되어 사할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떠나는 조선인과 항전하는 조선인들

 

그들은 부패한 탐관오리들때문에 러시아로 이주해야 했고 잔악한 일본인에 의해 강제동원되어야 했다.    

 

  

우리나라의 실정은 부패한 탐관오리들에 대항하는 기운이 전국에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쇄국정책의 한계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근대화를 늦추게 되고 총칼을 찬 청나라,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종속될 수 밖에 없었다. 

 

  

 

  

 

골병드는 민중


모든 피해는 민중들에게 흘러갔다. 그들은 외국에서 노동을 하다가 죽어야 했다. 

  

 

  

 

강제노동은 그들의 삶이 되어버렸다. 5%의 양반이 95%의 민중을 노예로 하는 전근대적인 사회체제는 몰락을 가져올수 밖에 없었다.

낫과 호미를 든 조선인들이 총을 가진 일본 사람들과 싸울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노예 처럼 강제로 탄광으로 이끌려 가야 했다. 이것이 힘없는 민족의 설움이다.  

 

 

 

 

  

 

  

 

최광호씨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의 삶을 회상했다. 

 

 

 

지옥의 탄광 갱도

 

#2. 갱도에 갇히다…절망의 연속

 

사할린 기타카시호 탄광 갱도는 지옥이었다. 축축한 어둠 속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고, 발밑의 끈적이는 진흙은 걸음을 붙잡았다. 칼날 같은 석탄가루는 목을 찢었다. 하루 10시간 넘게 주야 교대로, 채탄·굴진·운반을 가리지 않고 죽도록 일했다. 250톤 넘게 캐야만 겨우 한숨 돌렸다.

일본인은 하루 10~15원을 받았지만, 조선인은 3분의 1밖에 받지 못했다. 죽어라 일해도 어떤 날은 3원만 손에 쥐기도 했다. 돈은 탄광 계좌에 묶였다. 식사는 모래 섞인 밥 한 공기, 건더기 없는 국 한 숟갈이 전부였다. 배고픔에 바닷가에서 미역과 잡초를 주워서 씹어 넘겼다.

 

#3. 짐승보다 못한 삶, 두려움과 고통

 

 

 

짐승의 삶


갱도에서 몸은 금세 망가졌다. 갱 안에서 허리를 굽히고 장시간 일하다 보면 허리와 무릎이 퉁퉁 부었다. 쓰러져도 "일하면 낫는다"며 발길질이 날아왔다.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파 일을 못하는 인부는 갱 입구에 내팽개쳐졌고, 교대가 끝나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랑자나 문제를 일으킨 인부는 '다코비아'라는 감금 노동조에 들어갔다.

그저 먹고 일하고 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시병은 몽둥이로 머리를 후려쳤다. 죽지 않을 만큼 골통만 팼다. 그런 노동조가 사할린에 수백개였다. 노예 같이 일하고 돈은 주인이 챙겼다. 죽게 되면 그냥 갖다 묻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살해되는 한인들 

 

일본은 해방이 되어도 집단적으로 한인들을 살해했다. 

 

  


사할린의 다른 지역에서도 27명을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일본의 잔인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즈호즈에서도 일본인들이 조선인 35명을 집단학살했다. 

 

  

 

  

 

  

 

  

 

러시아도 인정한 학살

 

러시아는 일본인들의 집단학살을 문서화했다. 예리한 칼에 베어 살해된 것을 인정했다.  

 

  

 

 

 

이것이 나라잃은 사할린 동포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중징용을 하기도 했다. 

 

이중징용

 

일반적으로 사할린 한인의 ‘이중징용’이라면, 1944년 사할린의 한인탄광부들이 일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일본 큐슈와 이바라키 등지로 이동한 것을 말한다. 이때 강제 이동된 한인의 수는 대략 3천여 명 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가 1944년 8월 사할린 탄광을 폐지․휴지시키고, 한인 탄광부를 일본 본토로 강제 이동시킨 것이다. 당시 패색이 짙던 일제는 마지막 발악으로 본토 사수 작전을 꾀하였다.

 

 

  

 

큐슈나 이바라키 등지로 ‘이중징용’된 한인들은 더욱 혹독한 환경에서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도중에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고, 극심한 노동을 이겨내지 못한 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할린에 가족을 두고 온 경우는 가족들에 해가 미칠까 탈출을 아예 꿈꾸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고 사할린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서, 고통보다 더한 생이별의 절망에 부닥쳐야 했다.

 

일본에서 사할린으로 가지 못하는 아버지나 남편의 절망도 형언할 수 없었지만, 사할린에 남은 가족들은 기아와 극심한 생활고라는 현실이 겹쳐지면서 더욱 힘든 삶을 보내야 했다.

1946년 사할린의 식량난이 극심한 가운데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사망하는 일도 많았다. 또한 혼자가 된 젊은 여성들을 하는 수없이 현지에서 다시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

 

1946년 미소의 협약은 일본사람만 귀국을 하게 하자, 한인들은 사할린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194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만 귀국을 요구하니 다시 자녀들과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

 

  

 

  


.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