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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마의 한반도 왕래설에 대해서 논란이 많이 있다. 그것은 영주에 있는 마애불을 도마바위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SBS에서도 '도마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영상화하였다.
불교계에서는 다음처럼 불상을 만드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국가유산은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마애불로서 불두는 단절되었으나 부변의 흔적등으로 미루어 보아 丸彫로 조각되었음을 알수 있다. 불두 뒷편 바위면에는 광배의 조각선이 남아있고 발아래에는 운문과 삼겹의 연화좌가 조성되어 있다. 수인은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가슴 위에서 손바닥이 밖을 향하는 특이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 오른손에 잡고 있는 연꽃가지가 왼쪽 가슴위에 놓여져 있다."고 하여 마애불로 보고 있다.
이 이외에 통일신라 시대도 마애불상이 있다.
이러한 여러 불상의 특징으로 미루어 당시의 조각수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영주는 유독 바위에 불상을 많이 새겨 놓았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불상의 감실형 조각을 도마의 기도하는 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의 바위는 기도하고 있는 손이 보인다.
손을 포개는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다른 마애불에도 잘 나타난다. 그런 데다가 도마 바위 하단에는 도마의 슬리퍼도 보인다.
과연 도마바위일 가능성이 있을까?
고구려도 백제와 싸워 충주 봉황리에 마애불상을 짓기도 했다.
남원에도 마애불이 있다.
예서체는 한나라 글자체이다. 고구려 시대의 예서체는 한나라 예서체의 변형글이다.
한나라는 전서체에서 예서체로 발전한다. 한나라는 을영비(153), 예기비(156), 사신시(169), (조전비(185), 장천비(186)는 모두 예서체로 새겨져 있다. 다음의 을영비(한노상을영청치공묘백석졸사비) 탁본도 예서체로 되어 있다. 여기서 地(지)자와 行(행)자의 예서체가 보인다. 이러한 예서체가 삼국시대나 고려와 조선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예서체는 중국의 예서처위에 각나라의 독특한 미를 겸하여 중국의 예서체와는 서체가 다르다.
광개토왕비, 변형된 고구려식 예서체
5세기에 광개토대왕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예서체로 광개토대왕비문을 새겼다. 고구려 땅은 경상도북부까지 차지했다.
다음은 광개토왕비의 탁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5세기에 고구려는 중국의 한나라의 예서체와는 다른 고구려식 예서처를 사용하였다. 도마바위의 서체와는 다르다.
진흥왕순수비, 해서체
진흥왕(534-576) 순수비에서 신라의 서체를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5개나 되는데 모두 해서체로 쓰여있다. 해서체는 가장 발달된 한문 서체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그 기틀이 완성된 해서는 동진에는 유명한 왕희지가 있고, 당나라에는 구양순과 안진경이 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이후이다. 해서체는 가장 완전한 한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유산에서도 해서체로 보고 있다.
해서체는 예서체보다 발달된 한문서체 형태로 우리가 잘 아는 정자체이다.
도마바위가 마애불이라면 해서체로 쓰여졌어야
한나라의 예서체는 고구려나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서체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라면 고구려의 광개토왕비 서체처럼 고구려식 예서체가 새겨져야 했고, 신라시대에 조각되었다면 진흥왕순수비처럼 해서체로 조각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영주의 도마바위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서체이므로 마애불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마애불은 6세기 말에 제작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은 서산마애삼존불이다.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제작된 백제 시대의 마애불로,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온화한 미소로 유명하며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서체는 1-3세기에 발달
따라서 도마의 한반도 왕래여부를 떠나서 도마의 복음을 존중하여 도마를 기리고자 했던 사람이 1-3세가 안에 불교가 삼국시대에 전래되기 전에 도마바위상이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크다.
도마바위는 1-3세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 커
글자가 한나라 때에 만들어진 예서체이기 때문에 도마바위는 마애불도 아니며 1-3세기 때에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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