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러시아3)

러시아의 민족운동가 최재형

편집인 | 입력 : 2026/04/20 [14:38] | 조회수: 45

 

연해주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찾아간 곳인 만큼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답을 만들고 벼농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쌀을 보급하기도 한 곳이다. 조선의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 수있었던 곳이다. 

 

 

 

동학혁명도 처음에는 청일에 대항해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탐관오리들에 대항해서 발생한 운동이었다.

 

  

 

마찬가지로 연해주로의 이동도 조선정부가 먹을 것을 해결해주지 못하여 먹을 것을 찾으러 가기위해서 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어려움속에서도 1905년 을사늑약이후 항일운동의 기지가 되었다.

즉 중국은 만주에서, 러시아는 연해주에서 항일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연해주는 한민족이 흘린 개척의 땀과 구국항쟁의 피가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독립운동과 먹고 살기위해 연해주로 건너온 조선인들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1937년의 강제이주전까지 약 18만 여명이 연해주에 거주했다.   

 

  

 

19세기말(1863년)부터 20세기 초 연해주의 고려인 정착마을은 32개에 달했다. 그 중 31개가 남우수리 지방에 몰려 있었다. 초대 밀집지역은 포시에트 지역으로 22개 마을이 속해 있었다.  

   

 

 

연해주의 의병 활동 배경

 

포시에트 지역 연추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후 의병활동이 시작되었다. 연해주의 의병 활동은 20세기 초반 러시아 연해주(현 러시아 극동 연안 주)에 정착한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연해주는 해외 항일 의병운동의 핵심 무대이며, 독립투쟁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러일전쟁(1904~1905)을 거치며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 대규모 한인 이주가 일어났고, 정치적 망명객까지 더해져 한인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의병활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주요 의병 단체와 지도자

 

이 당시 연해주에서 한인의병부대들은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체류하던 이범윤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번갈아 체류하던 홍범도, 그리고 유인석이었다.

 

  

 

이 의병활동의 중심에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은 누구인가?

 

러시아 연해주하면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최재형이다. 최재형이 없었다면 안중근은 없었다. 그런데다가 최재형은 언더우드가 이미 18885년 조선 땅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그의 양부모와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러시아정교 학교에 최재형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밥대신 누릉지를 주는 형수의 구박에 못이겨 가출하고 러시아의 양부모를 만나 새롭게 태어난다. 

 

최재형은 1865년에 러시아 연해주로 아버지를 따라 건너갔다. 

 

  


그는 1869년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의 지선허라는 마을에 정착했다. 

 

  

 

지선허는 앞서 글에서도 밝혔듯이  경흥의 양응범이 13호의 조선인을 이끌고 간 조선인 최초의 이민지였다. 

 

  

 

여기에 최재형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형수의 구박에 못이겨 가출을 하고 만다. 너무 배가 고파서 포시에트 항구에 쓰러지고 만다.  

 

  


이를 구출해 준 사람이 러시아 선장이었다. 그의 러시아 양어머니는 그에게 서양의 학문을 가르쳤다. 

 

 

 

작가 박윤석은 '최재형과 독립운동'이라는 글을 2013년 신동아에 연재했다. 

 

11세 때 그는 집을 나가 한없이 걸어가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지쳐 쓰러졌다. 양식 축낸다고 구박하는 형수에게 누룽지 접시를 뒤집어씌우고 가출한 길이었다. 눈을 뜨니 작은 항구 포시에트였다. 전함과 상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를 깨운 선원들은 소년을 신기한 듯이 구경하다 배의 선장실로 데려갔다. 선장의 부인은 처음 보는 행색에 깜짝 놀라다가 이내 거울 앞으로 데려다놓고 웃기 시작했다. 소년의 땋은 댕기머리는 빗질이라고는 하지 않은 듯 했다.

 

햇볕에 탄 검은 얼굴을 거울에 처음으로 비춰본 소년은 즐겁게 깔깔 웃었다. 선원들은 소년의 머리를 깎고 목욕시켜 견습 선원의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였다. 그날부터 그 배는 소년의 집이 되었다. 선장 부부는 이 총명한 소년을 매우 예뻐했다. 읽고 쓰기와 과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선해 온갖 곳의 온갖 사람의 생활을 구경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러시아어에 능통한 한인이 되었다.

 

  

 

최재형은 양아버지를 통해서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문물을 넓혀 나갔다. 그는 러시아 양아버지와 함께 상선을 타고 6년 동안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다. 

 

  


그는 러시아 대학도 졸업하면서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러시아 사람이 다 되었다. 이미 러시아의 주류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도 투철했다. 그의 마음에 민족정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직 독립이었다.  

 

  

 

 

  



  

 

최재형은 러일전쟁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군수를 납품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의 재산 대부분의 자금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다. 

 

  

 

 

  

 

 

 

그는 연해주 최초의 신문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경영을 하여 한민족을 일깨웠다. 해조신문(海朝新聞)은 연해주 최초의 한인 신문으로 1908년 2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되었다.

 

최봉준 등이 주도하여 발간한 이 신문은 재러 한인의 권익 보호, 민족의식 고취, 항일 독립운동 계몽에 앞장섰으며, 이후 권업신문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최재형은 서재필의 독립신문처럼 러시아에서의 서양교육을 통하여 준비된 재능을 언론에 기여하였다. 미국에서 이승만과 서재필이 영어를 구사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러시아에는 최재형이 러시아를 활용하여 독립을 하였다.   

 

  

 

 

  


이토오히부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의 총을 구입해 준 사람도 최재형이었다.  

 

  

 

 

  

 

그는 단지 동맹의 장소도 제공했다. 

 

단지동맹(斷指同盟)은 1909년 2월 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왼손 약지를 끊어 혈서(‘대한독립’)를 쓴 12명의 독립투사 결사대이다.

 

 

 

핵심 인물로는 안중근, 김기룡, 백규삼, 강순기, 조응순, 황병길, 강창두, 갈화천,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이 포함된다.

 

이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 일심단결을 약속했으며, 안중근 의사는 이를 바탕으로 그해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배후에 최재형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 가족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켜 도와주기도 했다.  

 

  

 

최재형은 한인 최대의 단체인 권업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러시아정부까지 자치단체로 인정하였을 정도이다. 

 

  

 

권업회는 신문까지도 발행했다. 

 

  

 

최재형은 1908년 11월 해조신문(2월)이 폐간되자, 대동공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최재형은 프랑스의 김규식, 미국의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처럼 독립의 국제화를 위해서 노력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언어를 잘했다. 

 

  

 

최재형의 가족

 

 그에게는 두번째 부인 엘레나의 사시에  4남 7녀가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가족들은 중앙아시아로 흩어졌다. 

 

  

 

손자 최발렌틴은 "할아버지가 우수리스크의 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총살당한 뒤 자손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사마라로 강제 이주당했고, 브루주아로 탄압을 받아 할아버지의 이름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대부분 처형되었다. 

 

  

 

최올가, 최엘레나, 최엘레나, 최발렌틴, 최일리아만이 남았다.  

 

최올가 (딸)는 최재형 선생의 딸로, 아버지에 대한 육필 원고를 남겼고, 최발렌틴 (아들)과 넷째 딸 최 엘레나 여사의 자녀들과 함께 스탈린 치하에서 러시아 모스크바 등지에서 생활했다.

 

딸 최올가는 아버지는 한 명의 일본군이라도 더 살해해야 한다고 했다.  

 

 

 

 

 

최엘레나 (넷째 딸)는 그녀의 자녀인 소피아(둘째 딸) 등이 기록에 등장한다. 최재형 선생의 장남 후손인 최일리아와 막내아들의 후손인 콘스탄틴이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와 후손의 명맥을 잇고 있다. 

 

아내 옐레나는 1952년 키리기스스탄에서 생애를 마감한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발견된 부인의 유해가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23년 8월 14일 배우자 엘레나 최 여사와 함께 서울현충원에 부부 합장식으로 100여 년 만에 안장되었다.

 

  

 

  

 

최재형의 군자금에 대해서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인정했다. 

 

  

 

  

 

최재형은 의병들에게 총기를 구입해 주었다.  

 

  


그는 조선인들을 위해 연해주에 30여 개의 학교를 세웠다. 

 

  

 

그는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학교이외에 교회까지 세우는 등 기독교 활동에 깊이 관여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최재형의 사망

 

최재형은 1920년 4월 일본 헌병에 총살되었다.  

 

  

 

  


현정화 탁구 감독은  "최재형, 동토에 독립의 뜨거운 불꽃을 피운 폐치카"라고 했다.  

 

  

  

최재형은 정교회를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되었고, 그의 신앙을 통해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기독교는 호국종교로서 역할을 했다.

이미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1885년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최재형은 예수를 알고 있었다.  1890년대에는 연추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가 교회를 세울정도라면 신실한 기독교인었을 것이다. 

 

"1893년 최재형은 얀치헤(연추) 한인 마을의 책임자(읍장)로 선출되면서 그는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지역 한인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덕망을 쌓아나갔으며,....."

 

  

 최재형은 러시아 종교 신자였다. 

 

"6년을 그렇게 보내다 배가 낡아 더 이상 못쓰게 되었다. 양부모나 다름없이 된 선장 부부는 최재형에게 그리스정교 세례를 받게 하고 표트르라는 이름을 주었다. 가운데 이름은 선장의 이름을 따서 주었다. 그리고 대부와 대모가 되어주었다. 선장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사업가 친구에게 그를 맡겼다. 18세가 된 최재형은 3년간 그 밑에서 사업을 벌이며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떠나온 집을 찾아 가족들과 재회했다. 그로부터 세상은 그의 편이었다."

 

 

 

최재형 기념비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사람은 소강석 목사였다.  

 

  

 

 

 

중국에 김구, 미국에 이승만, 서재칠, 안창호가 있었다면 러시아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이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이 민족독립운동에까지 투사되었다.  

 

 

 

 1962년 최재형의 후손에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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