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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당시 조선인들은 월경을 금지했던 국법을 어기고 두만강을 건너 노브고로드만 연안의 포시에트 바닷가에 첫 발을 내디뎠다.
러시아의 수도 생떼페테르부르크와 제정러시아는 멀리 떨어진데다 당초 버려진 불모지라서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국경 경계선에 출입금지령만 내리고 방치했다.
조선정부는 러· 한 국경분쟁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로 국경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러시아 월경금지’ 포고문만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은 20년이 지난 18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조선인들은 살기위하여 국경을 넘은 것이다.
그들은 맨 손으로 초가집을 지었다.
당시의 조선인들의 모습이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들은 러시아정부의 도움으로 서서히 뿌리를 내렸고 최초 근대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저선허는 넓은 평야가 있었던 것이며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착취가 없어 조선인들에게는 가나안 평야 같은 곳이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출국 당한 후 지금은 그들이 흔적을 남겼다는 지선허 마을 기념비가 있다. 서태지가 후원을 하여 세웠다.
이와같이 지선허 마을은 우리나라 이민 최초의 정착지로서 지금처럼 비자를 합법적으로 받고 간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 굶주림과 기근, 수탈과 착취를 이겨내기 위하여 '죽자 살자'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건너가 마을을 형성했던 곳이다. 블라리보스톡까지는 차로 3시간 거리이다.
지선허는 당시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입증할만한 농기구가 있다.
연추 마을
두번쨰 정착한 곳이 연추마을이다. 1863년에 한인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와 지신허(地新墟) 마을을 이루어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1867년에는 한인 일부가 지신허 마을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연추 강변으로 옮겨 정착하면서 한인 마을이 형성된다.
그 마을이름의 어원은 연추하(延秋河, 烟秋河, 현재의 Rechka Tsukanovka))에서 따온 것으로, 그 기원은 발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했던 염주(鹽州)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은 원래 발해의 땅이었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그 땅에 조선인 유민들이 정착하였다.
점점 많은 조선인들이 발해의 땅 연해주를 조금씩 점령하기 시적했다.
연추와 안중근
연추는 안중근이 신앙생활을 하고 손가락을 짤라서 단지동맹을 맺은 역사적인 곳으로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연추와 안중근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연추는 연해주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자 동의회(同義會)가 결성된 연해주 의병 본부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20세기 초의 독립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 곳이다.
안중근은 연추에서 단지동맹을 하고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그래서 연추에 가면 단지동맹의 비석이 있다.
"우리들이 그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어떤 일이건 목적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인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같이 하여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침내 열 두 사람이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 자를 크게 쓰니 '대한독립(大韓獨立)'이었다. 쓰기를 마치고'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부른 다음,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헤어졌다.
1914년경에 이르면 연추마을은 가구수 400호에 주변지역 인구수가 2,0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872년에는 ‘니즈니 얀치헤’ 즉 하연추(下煙秋)에 교회가 세워졌다.
안중근의 십자가 총알
안중근은 이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심을 가졌다. 이토오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총탄에는 십자가가 그러져 있었다. 그는 십자군의 정신으로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다.
이처럼 연추는 한인들이 최초로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곳이고 기독교 신앙에 힘입어 일제와 싸운 역사적인 곳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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