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개 다민족 국가인 카자흐스탄에는 카자흐인 793만(53.4%), 러시아인 445만(30%), 우크라이나인 55만(3.7%), 우즈벡인 37만(2.5%), 독일인 36만(2.4%), 타타르족 25만(1.7%), 위그루족 20만(1.4%)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민족인 고려인(0.6%)도 10만 명정도 거주하고 있다.
우슈토베, 생존의 고장
1937년 처음 도착한 우슈토베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지역이고, 크질오르다는 민족문화와 정체성의 지역이다. 지금 우슈토바에 남은 것은 고려기념관과 당시 기념비가 있다.
우슈토베에는 고려인 기념관이 있다.
우슈토베 야외전시장에는 고려인들의 토굴도 전시되어 있다.
고려인들은 첫 해 허허벌판에 토굴을 파고 땅속에서 밥을 지어먹고 살았다. 러시아는 보상을 해 주기로 한 물자를 전혀 공급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굴을 팠다.
지금은 200여 기가 있는 공동묘지가 되었다.
2023년이 되어서야 고려인 항일 독립운동가 추모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바쉬토베 언덕에는 초기 정착비가 세워졌다.
여기에는 카자흐스탄과 대한민국의 우호기념비도 세워졌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터를 잡고 중심지를 형성한 역사적인 도시이다.
홍범도
특히 크질오르다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말년을 보내다 서거한 곳이다. 여기에는 홍범도 거리도 있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경비일을 보면서 가족도 없이 말년을 보내다 1943년에 눈을 감았다.
홍범도 장군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사람이 카자흐스탄의 공훈 예술가 태장춘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홍장군에 대한 이념적 논란이 많이 있다.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육사에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개인적으로 연금문제도 있고, 부하들의 생계문제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유시참변, 좌파 공산당간의 싸움
그런데다가 홍 장군이 1921년 자유시참변 때 소련 편을 들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러시아 자유시에서 일어난 무장 충돌 사건으로 좌파 고려 공산당간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한국 독립군 약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1921년 3월 하순 자유시에 집결한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부대들은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상해파 고려 공산당 계열의 대한 의용군(사할린 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고려혁명군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자유시 참변은 사회주의 운동의 파벌 갈등이 빚어낸 사건으로 그 과정에서 만주 지역 한인 독립군의 무장 역량을 크게 손실시킨 일대 비극이었다.
상해공산당과 이르크츠크 공산당이 자유시에서 서로 싸운 사건이다. 러시아를 등에 업은 것이 이르크츠 공산당이고 홍범도는 러시아공산당편에 서 있었다.
적군(Red Aemy)은 공산주의 혁명 세력, 백군(White Army)은 이를 막으려 했던 반공주의·왕정 복고 세력을 뜻한다.
홍범도에 대해서 논란이 많이 있지만 그는 이념을 떠나 항일투쟁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계봉우
이외에 크질오르다는 계봉우 지사의 동상도 있다.
계봉우는 기독교인으로서 러시아 한국학의 선구자였다.
계봉우는 1880년 8월 1일(음력) 함경남도 영흥의 관노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7살부터 서당에 나가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까지 사서삼경과 사기를 읽었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읽고 마음을 바로 잡았다.
1906년 10월 김정규, 권영호 등과 함께 영흥에 홍명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의 역사, 지리와 한문을 가르쳤고, 1907년 이후 이동휘의 권유로 대한자강회와 서북학회의 영흥지회에 가입하였고, 민족적 비밀단체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계봉우는 기독교인으로서 지식인이었다. 그는 카자흐스탄 사회에 어학적으로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가 카자흐스탄에 오게 된 동기는 언론 때문이다.
1937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Kyzylorda)로 강제이주된 이후 『선봉』이 폐간되고 『레닌의 기치』라는 새로운 제호의 한글신문이 창간되었다.
새로이 모집된 편집인들은 경험도 적고 상식도 부족한 상태여서 새로운 편집인들은 지식인 계봉우를 초청하여 여러 차례의 단기 강습을 열고 국어 문법을 공부하였다.
계봉우는 자서전 『꿈속의 꿈』집필에 착수하여 1944년에 완성했다. 이외에 『조선말의 되어진 법』(1941), 『조선문법』(1947~1948), 『조선문학사』(제1·2권, 1950), 『조선역사』(제1·2·3권, 1953), 『조선말의 되어진 법』(1955)을 출판해서 한글문법과 조선문학에 공헌을 하였다.
계봉우는 1959년 7월 5일 오전 7시 반에 사망하였고 장례식은 5월 7일 오후 5시에 거행되었다.
이처럼 지식인 계봉우와 이강은 신실한 기독교인 이자 언론인으로서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지식운동을 위해 애를 쓴 사람들이다. 특히 계봉우는 한글언어학과 문법, 조선문학의 틀을 닦는데 앞장섰다.
이 강
그는 1908년 블라디보소톡으로 이동하여 교민들이 민족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여 연해주 최초의 신문인 해조신문, 대공공보의 편집장으로서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하였고, 그는 안중근을 만나 이등 방문을 살해할 것을 교사하기도 했다.
기독교인 계봉우와 이강은 언론인이지만 개인비리와 윤리를 들쳐내는데 앞장선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운동과 고려인 계몽에 앞장섰다.
그들은 공산치하에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강은 감리교도이지만 이르크츠크에서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하여 고려인들에게 교리문답을 지도하여 신앙심을 갖게 한 신실한 사람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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