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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교회의 구국 기도회
초량교회는 주기철, 한상동목사가 목회하고 손양원목사가 잠시 사역을 했던 역사적인 교회이다.
특히 6.25 전쟁 시절 1950년 8월 30일 경 시작된 구국기도회는 유명했다. 한상동목사와 박윤선목사가 주축이 돼서 부산으로 피난 온 250여명의 교역자가 회개부터 시작을 했다.
박형룡박사는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악”이라며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회복됐을 때도 죄에 대한 반성과 통회의 태도가 희미해 사분오열됐고 교회의 혼란은 심해졌다”며 회개를 촉구했다.
맥아더와 이승만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29일 낮 12시, 수도 서울의 환도식(還都式)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유엔 깃발 아래서 싸우는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를 해방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 각하가 영도하는 대한민국 정부에 돌려드립니다. 오늘의 승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제 서울시민들은 공산군의 압제에서 해방돼 자유와 인권을 되찾았습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맥아더 장군의 손을 잡으며 “대한민국을 되찾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빨치산
부산진 교회
부산에서 선교했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1889년(고종 26) 7월 부산에 온 캐나다인 제임스 스카트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 이었고, 이어 부산에 들어온 선교사가 호주 장로교회가 파송한 데이비스였다.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2일에 부산에 입항하여 부산을 둘러본 후 10월 4일 인천을 통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무리한 전도와 천연두의 감염으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소천했다. 그 때가 1890(고종27)년 4월 5일이었다.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두번 째로 1891년 10월 12일 부산항에 들어온 인물이 존 맥카이 목사를 비롯한 4명의 선교사였다. 맥카이는 초량지역에 선교사의 주택을 구입하여 부산 선교의 거점으로 삼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선교지는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가 서로 충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미 북장로교는 영선현(영선고개, 영주동, 초량일부 지역)과 호주장로교는 부산진 지역(범일동, 죄천동)으로 나뉘어 사역을 하였다. 부산진은 호주장로교 선교지의 중요한 근원지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도 서울 다음으로 부산을 영남지역의 중요 선교지로 지목하고 윌리엄 베어드(W. Baird. 배위량) 선교사를 1891년 부산으로 파송했다. 베어드는 선교부 설립을 위한 대지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미국공사 헤어드(A. Heard)의 도움으로 지금의 부산진교회 부근에 대지 80여 평의 한옥을 사들였다.
그해 11월에 베어드 부부는 그 당시 공사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얼마 후 베어드의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도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 부산교회(후일 부산진교회로 개칭)의 시작이다. 그는 영선현에서는 지금의 초량교회의 산파역할을 했고, 부산진지역에서는 부산진교회를 개척하는데도 산파역할을 하였다.
부산진은 호주선교사들이 활동하였지만 부산진교회의 창립에 공헌한 사람으로 베어드를 들고 있다. 그러나 부산진교회는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웠다. 부산진교회는 1891. 10. 12. 제2차 호주 선교사 멕카이부부, 멘지스, 메리, 퍼셋이 부산에 도착하여 예배를 드렸다고 적고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4년 4월에 최초로 조선인 심상현(沈相炫)과 다른 2명의 여인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후 1900년 10월에 왕길지(G.Engel) 선교사가 초대 목사로 부임하면서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엥겔 부부와 세 자녀는 1900년 10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진교회의 최초의 교인은 심상현 가족이었다.
왕길지(겔슨 엥겔, Gelson Engel, 1868년 10월 10일-1954년 8월 16일)는 호주선교부가 파송한 독일 출신으로서 인도와 호주에서 그리고 마지막은 부산지역에서 선교사를 하였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였다.
왕길지목사는 1902년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쳤고, 1906년에는 정식 강사가 되었고 1916년에 교수가 되었다.
'왕길지(王吉志)'는 '엥겔'과 '왕길'이 발음이 비슷했고,'최고로 좋은 뜻', 즉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후 왕길지목사는 18년 동안 부산에서 목회,교육,순회전도자로 헌신했다. 그러므로 부산진교회는 호주장로교출신 선교사들이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한국선교 초기에는 뛰어난 언어학자들이 있었다. 미국북장로교가 파송한 레이놀즈 역시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우리나라도 장신대 안교성교수같은 사람은 뛰어난 언어학자로서 몽골어를 번역하여 몽골어 성경을 만들기도 하였다.
왕길지 선교사는 부산진교회에서 심취명장로를 신학교에 보내 1914년에는 부산진교회 담임목사로 세웠다. 그는 1916년에도 언양의 12개 교회와 김해의 10개 교회를 감독하고 있었다.
부산진교회는 1901년에는 70여 명의 사람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교회의 규모가 커진다. 이후 점점 성장하여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4년 5월 27일 부산교회 당회조직(당회장 : 왕길지-G. Engel-)가 조직되고, 심상현의 아우 심취명이 장로가 서기가 되면서 조직교회로 발돋움하였다. 1900년에는 성탄에배를 드렸고, 1904년 5월 29일 최초로 성찬예식이 거행(조선형제 64명, 선교사 가족 7명)되기도 하였다.
일신여학교
부산진일신여학교는 1905년에 호주장로교회가 세운 여성 근대교육기관이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멘지스(Menzies)[민지사]와 페리(Perry)는 1891년(고종 28)에 부산에 파견되어, 1895년(고종 32) 10월 부산진에 마오리고아원과 교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현재 부산진교회 옆에 있다.
교명을 일신이라고 한 이유는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이 있다. 초대 교장으로는 멘지스가 취임하였다. 개교 당시 수업 연한 3년의 소학과 과정으로 출발한 일신여학교는 1909년(순종 3) 8월에 사립 학교의 인가를 받고, 더불어 3년 과정의 고등과도 병설하였다.
이 고등과는 후에 동래학원으로 이어져 현재의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15년 8월에는 학칙 개정에 의해 수업 연한 3학년이었던 소학교와 고등과를 4학년으로 증설하였다.
일신여학교는 부산의 3.1운동의 시발점으로도 유명하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3월 11일과 4월 8일에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머님께서 출가시킬 때 쓸려고 장만해 둔 목양목을 어머님 몰래 끄집어 내여 기숙사로 가지고 가서 초저녁에는 기숙사 벽장에 숨어 있다가 밤 10시가 넘어 창문으로 불빛이 밖으로 새어 안나가기 위해 창문에 이불을 가리고 목양목에 대접을 엎어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붉은 물 검은 물로 칠하여 겨우 마련한 태극기를 들고 3월 11일 밤 8시경 거리로 가지고 나가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목이 터지라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답니다."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은 부산에 교회와 교육기관, 병원을 세우는데 절대적으로 공헌을 했다(계속).
http://lawtimes.net/4294 (나의 신앙유산답사기,부산편1)
http://lawtimes.net/4370 (나의 신앙유산답사기,부산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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