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카자흐스탄4)

편집인 | 입력 : 2026/05/20 [02:16] | 조회수: 77

 

 

크즐오르다의 논농사

 

크즐오르다는 홍범도 거리와 고려극장, 크즐오르다 대학, 고려일보가 있는 곳으로 한민족의 정체성과 연관되는 지역이다. 

 

  

 

이 곳은 시르다리야 강이 있었다. 

 

  

 

고려인들은 이 강을 잘 이용하여 광야를 옥토로 만들었다.

 

  

 

  

 

  


1937년에 최정학이라는 사람이 이 곳에 오면서 고려인의 논농사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현재는 젖과 꿀이 나는 기름진 땅으로 변하였다. 고려인들은 어디를 가나 땅을 일구는데는 탁월한 기질이 있었다.  

 

  

 

  

 

교육

 

고려인들은 노동도 잘 했지만 늘 교육에 관심을 갖는 민족이었다. 자원하나 없는 대한민국이 세계에 우뚝 선 것은 교육 덕택이다. 

 

고려인들이 연해주와 카자흐스탄에서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가 교육에 협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교육이 없다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삼성반도체, 현대 기아의 차량생산, 한화의 방산무기, 포항제철의 철강, 인공위성 등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교육이 없이는 불가능한 산업들이다.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선교사들이 연세대, 이화여대, 배제학당, 전국의 기독교 중고등학교라는 교육기관을 먼저 세웠기 때문이다.

 

  

 

교육은 한 민족을 위대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고려인들은 러시아나 강제이주된 중앙아시아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연해주 교육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러시아 극동지역에는 한인촌들이 생기면서 여러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러시아 정교회가 자그만치 35개의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그래서 이주 2세들은 서구의 교육을 체험했고 교육받은 사람들의 이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2세들은 1등 민족으로 터를 닦아 나갔던 것이다.

다행히도 러시아가 교육을 중시하였다. 심지어 막스와 스탈린도 교육은 중시하였다. 

 

막스와 스탈린도 교육은 중시

 

막스는 유대인으로서 박사과정까지 공부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도였다. 스탈린은 러시아정교회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다니다가 공산주의에 빠진 사람이다. 

 

스탈린은 신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차르 체제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반발하고 칼 마르크스의 저서 등 혁명 및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면서 신앙을 잃었다.

결국 사제가 되기를 포기하고 1899년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는 신앙을 버리자 평생 1,300만명을 숙청한 가룟유다와 본디오빌라도 이상으로 사악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막스와 스탈린은 모두 기독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와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악한 영이 들어가면 불신자보다 더 악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늘날도 이단감별사들의 행태나 교회파괴언론이나 좌익언론의 형태를 보면 불신자들보더 더 악한 사람들이다.

 

막스와 스탈린에 맞먹는 기독교인들

 

사소한 교리적 윤리적 약점을 갖고 침소봉대하여 언론에 계속 노출시켜 한 인간과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온 인류를 붉게 물들였던 막스와 스탈린에게 들어간 악한 영이 들어갔기 때이다. 

좌익 이념을 통하여 율법 뒤에 악한 영이 숨겨져있듯이 현대판 율법인 이념과 교리, 윤리뒤에 악한 영이 들어가가룟유다 이상 악하게 되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에 소련 혁명정부는 지방 및 소수민족 정책을 펴나가면서 현지 토착 민족의 가치를 존중하는 토착화를 시행했다.

 

스탈린의 교육 중시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록에 의하면 한인 사범대학을 크즐 오르다에 배치시키는 것이 가능한지의 인식여부, 학교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에 대한 것을 논한 바 있을 정도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공산주의는 교육을 중시했다.

 

고려인들이 러시아에서 얻은 것은 교육뿐이었다. 1937년의 강제 이주는 대부분 러시아 이민 1세대가 아니라 이민 2세였다.  

 

  

 

스탈린은 강제이주를 단행해도 러시아가 토착 민족 출신의 우수한 인재를 행정기관에 임용하고, 언어도 토착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이 과정에서 고려인도 자연스럽게 교육기관에서 한국어를 사용했다. 스탈린의 불편한 진실이다.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1918년에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전로한족중앙총회 주도로 고려인 학교가 설립되었고, 한인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 및 한국어로 가르칠 수 있는 초·중등 교원을 양성했다.

 

1927년 정식으로 사범전문학교로 독립한 이후, 10년간 약 900명이 넘는 전문 교원과 교육자를 배출하여 고려인 사회의 문화 발전과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원동고려사범대학은 1931년에 세워진 고려인 고등교육기관이다. 

 

1931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민족 최초로 민족사범대학교가 설립된 것은 우리나라 교육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신한촌을 중심으로 형성된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사회는 당시 국내외를 통틀어 이와 같은 인프라를 갖춘 유일한 곳이었다.

 

당시 원동(극동)의 고려인 인구는 20만 명에 육박했고 380여 개의 고려인 학교, 17개의 크고 작은 모국어 신문, 다수의 소인예술단과 모국어 극장, 200여 개의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고려인들은 60년 만에 이민정착에 성공했다.

 

사실상 강제이주만 없었더라면 연해주는 고려인들이 장악했을 것이다. 제2의 발해가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중앙아시아까지 가야했다.  거기서 또다른 발해를 개척해야 했다. 

 

 

 

중등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고려인 민족학교로서 고려어(한국어) 수업을 법적으로 보장받으며 운영되었다.

 

  

 

원동고려인 대학은 1935년 1회 졸업생을 낸다. 생의 기원과 발전이라는 생물학 교재는 이미 1928년에 한글어로 번역이 되었다. 

 

  출처, 한국타임즈 2021.4.21자 

 

이처럼 한인들은 어디를 가나 교회와 학교부터 세웠다. 

 

크즐 오르다 대학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학교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전하게 되었다. 1938년 소련 당국의 명령으로 고려인 민족대학에서 일반 소련식 국가 학교로 개편되었다.

 

1938년 원동사범대학을 기반으로 크즐오르다 사범대학이 설립되었다. 현재 이 대학은 코르킷아타 명칭 크즐오르다 종합대학교로 불린다

 

 

 

  

 

  

 

김 겐나지 모라비치, 크즐대학 졸업


레닌기치를 잇는 고려일보 2017. 2. 25에 의하면 강제이주자 1.5세인 김 겐나지 모라비치(1925년생)가 이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한 교수로서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37년에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되었고 당시 15살이었다.  

 

  


김겐나지오는 1941∼45 년의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후방에서 최선을 소련으로부터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시기의 노동 영웅>이라는 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는 1943년10월, 제대 후 그는 크즐오르다 국립사범대 물리∙수학과에 입학했고 학위를 마친 후, 1956년부터 그는 크즐오르다 사범대 기초수학 강좌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최고의 교수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쌓았다.  

1986년, 조교수 칭호를 받았고 1996년에 크즐오르다 종합대학교 명예교수로 선정되었다.(https://koreilbo.com/korean-news/-kim-gennadi-/)

그의 삶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탁월한 재능과 성실함,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교육의 역사와 많은 이들의 삶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한 고려인의 이야기였다.

 

고려인들은 러시아로 이주하든, 미국으로 이주하든 1세가 낳은 2세들부터 서구의 교육과 신앙의 힘으로 2세들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세미리이다.

 

세미리

 

세미리는 사탕수수 노동자 기독교인 2세로서 미국에서 교육을 잘 받아 올림픽에서 다이빙선수로 출전하여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다. 

 

  

 

외국에서 신앙생활을 잘 한 2세들은 대부분 복을 받는다.  세미리는 1904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L.A 연합감리교회에 출석하였다.  

 

  

 

  

 

  

 

이처럼 고려인들의 희망은 교육이었다. 다행히 고려인들을 교육시키는데 앞장선 것은 러시아 정교회였다. 고려인들은 한반도 밖에서는 러시아 정교획, 한반도 안에서는 미국개신교 선교사들이 교육을 하는데 앞장섰다.

 

결국 해외든 국내이든 교회가 고려인들을 교육시켰고, 1세대 들은 고생을 했어도 일지기 서구의 교육을 받은 2세들이 그 사회와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인들이 어디를 가나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교육 때문이고, 그 교육은 모두 기독교를 통한 교육이었다.

하나님이 교육을 통하여 한인들과 항시 함께 하였던 것이다. 알(하나님)이랑(함께) 민족이었다. 

 

 

 

 

그러나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소쩍새는 수십년 동안 울어야만 했다. 이것이 역사의 비극이었다.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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