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하구는 한반도의 선사문화를 주도하였고, 가야시대는 대 중국 교역체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이를 내륙에로 재분배하는 중개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해를 중심으로 했던 금관가야의 소멸과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성된 이후, 신라는 중국과의 교역을 서해안을 중심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우리나라의 고대문화는 북방계통의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중국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여 소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신라는 부산을 통하여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
신석기시대의 줄문토기(빗살무늬 토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죠오몽 토기문화를 열기도 하였다.
일본의 고대사는 고고학적으로 죠오몽 토기문화(신석기 시대-B.C 3세기), 야요이 문화(B.C 3세기-A.D 3세기)와 고분시대(A.D 4세기-7세기)로 구분되고 있다.
야요이 문화
야요이문화는 B.C 3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쳐 존속한 문화로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도쿄 분쿄구 야요이에서 발견된 토기를 그 지명을 따 야요기토기라 칭한 것에서 유래했다.
야요이 시대는 중국이나 조선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활의 풍경을 변화시켰고,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금속제의 도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청동기나 철기등의 금석기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훗날 그들은 금속무기를 조총으로 변모시켜 임진란때 조선으로 쳐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청동기는 중국에서부터 와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까지 흘러들어갔다.
조선의 총의 역사
일본은 임진란이 발생하기 전 1589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조총을 바치면서 소개되었고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처음으로 제작에 성공하였다.
고려시대 때 이미 화약무기가 도입되어 세종은 화약무기를 모아 성능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총
우리나라는 이미 최무선의 화약 발명에 의하여 고총통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왜구를 무찌른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총을 처음 제조한 시기는 고려 말엽인 1377년(우왕 3)경으로, 최무선(崔茂宣)의 건의로 화약무기 연구와 제작을 맡은 화통도감(火熥都監)이 설립되면서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조선 초기까지 최무선과 그의 아들 해산(海山)이 대를 이어 우리나라의 화약무기를 발전시켰으나, 중국의 총을 모방하여 만든 당시의 총은 성능이 좋지 못하였다. 1447년(세종 29)에 이르러 세종의 지시에 의하여 대개혁을 이룩함으로써 우수하고 독창적인 우리 고유의 화약무기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총, 경희고소총통
경희 고소총통
특히 세종은 재위 29년에 무기 개혁을 추진하여 조선의 화약무기는 성능이 한층 상승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세종의 무기 개혁 이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희고소총통이 남아있다.
경희고소총통은 외부 형태가 명나라 초기의 것과 유사하며, 내부 구조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총의 구조와 비슷하다. 조선시대 무기 발전사를 이해함에 있어 경희고소총통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내부구조는 14세기 초에 사용되고 1861년 스웨덴의 로슐트(Loshult)에서 발굴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총과 같으며, 겉모양은 1372∼1379년에 중국에서 만든 소형총과 같다. 이미 고려말의 최무선의 영향에 힘입어 조선초기에 총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러한 총은 한 번에 화살을 한 개씩만 쏠 수 있고 성능이 좋지 않다. 세종 때의 화약무기 대개혁은 이러한 나쁜 점, 즉 성능이 좋지 않고 한 번에 한 발 이상은 쏠 수 없는 점을 개량한 것으로, 세종의 대개혁 이후의 화약무기 체계를 보면 포(砲) 4종, 총 7종, 로켓 무기 4종, 폭탄 7종, 화차 2종 등이었다.
세종의 화약무기 대개혁은 총의 내부구조에 격목통(激木筒)을 만들고 격목을 끼워서 사용하는 방식인데, 이 방법은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독창적인 것으로서 개혁 전의 총에 비하여 사정거리가 2, 3배 늘어났고, 한 번에 최고 12발까지 화살을 넣고 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총도 점점 발전해 갔다.
이순신이 북방에서 여진족을 물리칠 때 처음 승자총통을 사용하여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접근해서 싸우면 일본의 뛰어난 검술에 불리한 점을 인식 거리두기를 하여 승자총통으로 공격하여 최무선이 만든 화약을 직접 실천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총통은 다양한 무기로 개발되었다. 임진란 때 이순신은 개발된 총동을 사용하여 왜군을 무찌르기도 하였다.
동학시대의 무기
그러나 이후 조선은 당쟁으로 인해 무기개발이 거의 되지 않아 일본이 쳐들어왔을 때 속수무책이었다. 동학교도들은 총대신 죽창을 사용하였고 조총에 대한 방패로서 망태를 사용하였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최근에는 일본으로부터 영향받은 전자문화를 갖고 일본을 능가했고, 특히 반도체 문화는 일본을 훨씬 앞섰다.
현재는 자동차문화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자동차 회사 수출실적 16위에 랭크되어 있다. 일본의 닛산(Nissan)을 압도했을 정도이다.
2020년에는 무기수출국 9위였는데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4위안으로 진입했다.
부산은 일찌감치 김해의 금관가야의 문화권에 있었다가 신라가 가야를 병합함으로 인해 신라권의 문화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신라는 부산을 통하여 일본에 문물을 전달하기도 하여 부산은 고대시대부터 교역도시로서 자리잡았다. 부산은 일제의 수탈의 장소였다.
부산과 일제 강점기
1920년대 부산 남구 우암동 189번지
1920년대 부산 남구 우암동 189번지 일대. 일제강점기에 전국에서 공출한 소를 검역하던 막사가 있던 이곳은 6·25전쟁 때 피란민 주거지역이 됐다.
국토교통부와 대통령 소속 지역발전위원회는 최근 우암동 189번지 등 전국 22곳을 올해 '새뜰마을사업' 도시지역 대상지로 선정했다. 현재는 이렇게 변회돠었다.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공출한 소를 일본으로 보내기에 앞서 검역을 하고 관리하던 소 막사 40개가 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는 20만명의 피란민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우암동 189번지는 2015년 문화복합형 주거환경관리사업 대상지로 지정돼 소 막사 복원과 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이어서 남구의 새 명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920, 30년대 일제는 조선에서 쌀의 생산을 늘려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반출되는 쌀의 양이 계속 늘어났으며 조선의 인구도 날로 증가하여, 한국인 1인당 쌀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산된 쌀의 20-30%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조선인들은 쌀이 모자라 만주에서 들어온 조와 수수 등 잡곡을 혼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특히 1937년 일본이 지나사변을 일으킨 것이 2차 대전으로 확대되어 일본은 전시동원령을 내려 군량미를 싼 값으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부산은 착취와 수탈의 장소였다.
그들은 인력과 물자를 수탈하였다.
부산은 영화 국제시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6.25 당시 부산의 원래 인구는 30만명이었는데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100만 아상 몰려 들어 인구 130만명 이상을 육박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훗날 부산이 한반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피난민들은 산위에다 텐트를 치기도 하였다. 특히 부산 중구 동광동에 위치한 40계단은 피난민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부산과 6.25 전쟁
피난민들은 산위에 텐트를 치고 거주하기도 했다.
약 130만명의 피난민들이 들어와 부산은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 였다.
당시의 유명한 대중가요는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였다.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정거장도 인기가 있었다.
이 두 노래는 우리시대의 상황을 리얼하게 반영하였다. 한 소절마다 눈물과 애환이 젖어있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었던 것은 100여 년전부터 부산에 세워진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일제강점기로부터 6.25를 맞이하였을 때 정신과 영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산의 100년 이상 교회
1889년에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된 중국 푸저우[福州]의 알취데콘 존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의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사를 자원한 호주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1889년 10월 2일 한국에 도착하여 언더우드와 함계 지내며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부산으로 가서 일하기로 결심을 하고 1890년 4월 4일에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과로와 폐렴, 천연두에 감염되어 4월 5일 사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 호주 빅토리아 장로회는 한국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특히 부산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부산선교에 열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장로교는 선교사를 파송하였지만 선교사들은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1900년대를 경과하면서 한국은 호주 장로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 지역이 되었고, 이때로부터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선교부가 철수할 때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윌리암 베어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죽은 다음에 찾아온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윌리엄 베어드였다. 그는 1891년 3월 25일 한국에 입국해서 1931년 11월 29일 평양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선교를 위해 생을 불태운 사람이었다.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에 선교사업을 개척하면서 남해안과 경상도 등지에 복음을 전파했고 대구에까지 선교지를 개척한 사람이다.
초량교회 기념관
이어 그는 평양으로 이전하여 1897년에 사랑방학교를 개설을 하였고 1901년에 학교명을 숭실학당으로 개명하여 숭실대학교의 산파역할을 하였다.
그가 한국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영남지역에 교회를 개척한 것이었다. 부산과 대구의 교회개척은 윌리엄 베어드의 큰 공헌이다. 베어드가 없었다면 영남지역에서의 기독교는 성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베어드는 당시 어둠속에 있는 한국사회에 한줄기 희망을 안겨주었다. 1873년 일제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1895년에는 명성왕후를 제거하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1907년에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 있었다.
그러므로 서구인이 설립한 교회야말로 조신인들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교회를 통해 항일의식이 싹트고, 교육기관과 병원이 설립되고, 근대화를 알게 되었다.
초량교회
그는 부산에 도착하여 1891년 일본인 거류지 영선현에서 세 필지의 대지를 구입하여 영선현 교회를 설립하고 이 교회가 초량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영선현교회는 영주동교회로 되었고 훗날 초량교회로 개명이 되었다.
베어드는 교회를 설립하면서 한문서당을 열기도 하였을 정도로 어떻게 해서든지 한인들을 교육으로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초랑교회는 한강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베어드가 개척한 교회에 주기철, 한상동, 손양원목사가 베어드의 정신을 갖고 사역을 하였다. 베어드가 없었다면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가 3대 목사였고 한상동목사는 6대 목사였다. 손양원목사는 청빙을 거부하고 한센병원에서 사역을 하였다.
초랑교회는 애국, 애족의 교회였다.
손양원목사도 한 때 이 교회에서 봉사하였다.
초랑교회는 두 명의 부산시장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교회를 통하여 부산은 어둠의 터널속에서도 한 줄기의 성령의 빛이 교회를 통하여 계속 비추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