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부산편)

편집인 | 입력 : 2022/12/10 [22:19] | 조회수: 329

돌아와요 부산항  

 

  


부산은 국내 최대국제무역항이 있는 제1의 항구도시이며, 경상권 최대도시, 제1의 해양교통과 제2의 항공교통 김해국제공항 타이틀 등을 보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부산은 한반도 동남부에 자리한 광역자치단체로서 인구는 3,320,276명으로 모든 광역시 중 외국인을 제외해도 유일한 300만명대 도시이다. 모든 광역자치단체를 다 합치면 경기도-서울특별시 다음 3위이다. 광역자치단체들 중 인구 밀도도 서울에 이어 2위이다. 

 

6.25 전쟁 때 부산은 대전, 대구에 이은 임시수도였으며 임시수도 시절부터 부산 경공업의 전성기였던 1970~1980년대, 민주항쟁, 1990년대 이후 주변 지방에 산업시설을 내주며 동남권을 형성해 온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쪽으로 바다를 사이로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 섬, 북쪽으로 경남 양산시 및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쪽으로 경남 창원시 진해구, 김해시 남쪽으로 경남 거제시와 접하고 있다.

 

지역 내 문화 컨텐츠로는 대한민국 최대의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G-STAR, 부산국제모터쇼, 부산불꽃축제, 부산항 불꽃축제, 부산 비엔날레, 부산 원아시아 페스티벌, 자갈치 축제, 부산 해맞이 축제 등이 유명하다.

 

특히 부산은 '돌아와요 부산항'을 부른 조용필의 노래로도 유명하다. 부산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부산은  6.25 전쟁시 1.4후퇴로 인한 피난민의 애환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을 보면 부산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애환이 녹아있다.    

   

 

부산의 역사와 명칭

 

 

 

성종초기에 釜山으로 명칭이 변하였다. 부산(釜山)이라는 말을 풀이하자면 가마솥을 엎어놓은 모양인 산이라는 뜻이다. 

 

 

  

 

부산명칭의 역사는 1402년(태종 2) 1월 28일 『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는 말이 나온다.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 『성종실록』 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南悌)가 그린「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 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되었다. 

 

부산은 본래 경상남도 부산시였다가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이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4월 4일 부산시에서 부산직할시로 개편되었다. 이후 1995년 1월 1일 광역시 제도 도입으로 지방자치제와 함께 종전의 다른 직할시들과 함께 부산광역시로 변경되었다.

 

부산의 지형

 

부산의 지형은 전반적 형태가 동부 구릉성 산지대와 서부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형태를 보인다.

 

1. 동부 구릉성 산지대

 

 


부산의 동부 구릉성 산지대는 낙동강의 동쪽 지대에 해당한다. 이 지대는 해안 쪽으로는 동북쪽의 송정 해안에서 서남쪽의 다대포와 몰운대 남단까지 이어진다. 육지로는 금정산에서 다대포의 몰운대로 이어지는 남서 방향의 산지와 금정산에서 해운대의 장산으로 이어지는 남동 방향의 산지 사이에 위치한다

 

2. 서부 평야 지대

 

 

  김해평야



부산의 서부 평야 지대는 낙동강의 하구 일대에 발달한 거대한 삼각주에 해당한다. 양산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류하는 물금 부근에서 낙동강 하구를 향해 넓게 펼쳐지는 평야 지대로 동쪽으로는 금정 산맥, 북쪽에서 서쪽으로는 신어 산맥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분지를 이루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내륙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침식 분지 평야와는 성격이 다른 지형이다.

 

 

3. 해안 지형

 

 

  

 

부산의 해안은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진 동부의 리아스식 해안과 삼각주 지형으로 이루어진 서부 평야 지대의 삼각주 해안으로 크게 구분된다.

 

산지 중심의 동부 해안은 금정 산맥과 금련 산맥 등의 산지가 해안으로 이어져 반도와 섬, 그리고 만입부를 형성하여 해안선의 출입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형성하고 있다.

 

 

 

 

해운대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는 해운대이다. 부산광역시의 동부에 위치한 자치구. 해운대라는 이름의 어원은 신라 때의 문인 최치원의 호 '해운'. 최치원이 지나가다가 해운대해수욕장 인근에서 경치가 너무 좋아서 자기 호를 따 '해운대'라고 새겨놓은 게 어원이다.

 

 

  

여름이면 천 만 명이 넘는 피서객들이 이곳을 찾기 때문이다. 1.5km 길이의 백사장을 중심으로 오락시설과 부대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수많은 이들을 만족시켜주고 있다. 해수욕과 태닝을 즐기려는 외국인부터 휴가를 보내기 위해 모여드는 피서객까지 여름의 해운대는 전국적인 핫플레이스가 된다.

 

  

  부산진 전투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조선에 침략을 감행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장으로써 오전 8시경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에서 자신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700여척의 전선과 18,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후 5시, 부산 절영도(絶影島)에 상륙했다.

 

  부산진성

 

 

 서문성곽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진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했다.

 

  


부산진성을 지키는 장수 부산진 첨사 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으며, 오전 10시~12에 2차 전투 끝에 4시간 만에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머리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부산진성 안의 군민들 역시 끝까지 저항했고 그 결과 군민 3000명이 모조리 죽거나 학살되었다.

 

일본군의 병력 구성은 고니시가 이끄는 7,000 명과 그를 따르는 장수 소 요시토시 5,000 명, 마츠우라 시게노부 3,000 명, 아리마 하루노부 1,000 명, 고토 스미하루 700 명이었다.


 

동래성 전투

 

동래라는 이름은 역사가 깊은 이름이다. 본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동래의 일부가 부산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입장이 바뀌어버렸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동래부가 부산부로 바뀌기 전까지 '동래'는 곧 부산이었다.

 

동래라는 지명은. 신라 이전 삼국시대 초기에는 거칠산국이 있었으며 신라에 정복된 뒤 신라 경덕왕 17년인 757년에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개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경덕왕이 같이 지은 동평(지명), 기장과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래 된 지명이다. 신라~고려 때 동래군의 중심지는 원래 지금의 수영구쯤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고려시대에 지금의 동래구의 위치로 옮겼다.

 

이처럼 동래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며 근현대 이전 부산의 역사 대부분은 동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래성에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였다.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진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몰려들었다. 

 

 

 

  동래성

 

1592년 4월 15일, 일본군은 동래성에 도착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3천여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송상현은 부산진에 있던 왜관의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일본인들의 이상 징후를 느끼고는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고니시는 동래성 앞에 무모한 전투는 피하라. 나는 협상을 위해 조선의 도성으로 가야한다. 그대가 굳이 싸우겠다면 할수없지만,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나무판을 보였는데, 이에 송상현은 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송상현은 조금이라도 더 방어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성벽 위에 목책을 쌓았다고 하며 일본군 역시 조선군의 활 공격 때문에 생기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수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동래성에서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병사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인 동래성 동문(인생문)을 집중 공격해서 결국 돌파하고 동래성으로 진입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동래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고침하네

君臣義重 군신의 의는 무겁고

父子恩輕 부자의 은은 가볍도다

 

그 후 송상현은 다시 무장하고 몰려든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는데, 송상현과 면식이 있던 마츠우라 시게노부(조선 측 기록에는 평조익平調益)라는 일본군 장수가 그에게 피신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의 아낙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일본군에 맞서다가 역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조영규 또한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동래성은 임진왜란의 서곡을 알리는 전투였다. 왜군을 막지못하자 왜군은 서울까지 진격하였다.  

 

6.25 피난민 부산정착

 

  


부산은 6.25때는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곳이기도 하다. 정부와 부산시는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부산 남구 적기에 있던 소 수출검역소와 영도 해안가, 청학동, 남구 대연고개, 서구 남부민동과 괴정 당리동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급조한 시설의 수용 규모는 7만명에 지나지 않아 나머지 피난민들은 국제시장 주변 용두산과 복병산 기슭, 대청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등과 영도 바닷가 주변인 태평동과 남항 근처 충무동 해안가에 판잣집을 지어 나갔다.

 

피난민과 판잣집

  

정부 기록에 따르면 1953년 7월 판잣집 수는 2만8619호로 영주동 산기슭에 1000여 호, 영도대교로 해안가에 700여 호, 보수동에 600여 호, 송도에 300여 호, 국제시장에 1200여 호 등이 있었다. 피난민들은 위로는 산꼭대기까지, 아래로는 바닷가 절벽 끝까지,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끝까지’ 밀려 나갔다.

 

 




 

 


 

  


김일성으로 인한 전쟁은 국민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당시 부산에 거주하는 국민들의 대부분은 거지생활과 다름없었다. 세계 최하위의 빈국으로 전락한 사람들이었다. 부산은 이처럼 임진란, 일제시대, 6.25를 거치면서 수탈과 빈곤의 삶이었다. 

 

국제시장

 

 

  

 

꽃분이네는 영화국제시장의 촬영지 였다. 

 

  


국제시장은 영화제목이지만 실제로 국제시장이 있었다. 부산 중구, 부산의 중심지에 위치한 국제시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이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남긴 물건과 해외동포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거래하기 위해 현재의 자리를 장터로 삼으며 국제시장의 역사는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이 공터는 처음엔 도떼기시장이라 불리다가 1948년에 건물을 세우고 자유시장으로, 1950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까지 취급하게 되면서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해외양품, 미군부대 군수물자, 수입 밀수품, 전자제품 등 여러 가지 상품판매로 호황을 누렸고 5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를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국제시장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새롭게 거듭났다.

 

태어난 순간부터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의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던 곳. 어느덧 70여년, 오늘날 먹자골목과 아리랑거리, 젊음의 거리, 구제골목과 함께 부산의 관광 상품으로 자리한 이곳은 한국 근현대사의 숱한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부산의 국제시장이다.

 

 

 

 

 

100년 전에 세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휘하여 부산은 굴지의 도시가 되었다. 교회가 있는 곳은 항시 발전하기 마련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계속)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중동):Law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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