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카자흐스탄5)

카자흐스탄 강제 이주의 의미

편집인 | 입력 : 2026/05/24 [02:28] | 조회수: 106

 

 

연해주로 간 고려인들

 

소련 내무인민부 의장인 예조프의 1937년 10월 25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극동주의 고려인 총 36,442가구 171,781명이 이주를 마쳤다고 하면서, 이주 고려인들은 카자흐 공화국으로 20,170가구 95,256명,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16,272가구 76,525명이 총 124편의 열차를 타고 배치되었다고 했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274)

 

 

  

 

  

 

이주 50년만에 연해주를 장악한 고려인들

 

당시 연해주는 마차를 끌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연해주를 고려인들은 50년만에 학교, 교회, 극장, 언론사를 세워 장악하였다. 

 

 

 

이들이 이 곳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연해주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서구의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1910년대 연해주는 양산도 쓰는 여자분도 나올 정도로 조금씩 서구화되어 나갔다.  

 

  

 

어른들도 서구스타일의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톡과 고려인

 

1920년대 블라딕보스톡 거리는 조금씩 자리잡혀 나갔다. 까레이스키야는 블라디보스특의 중심민족이 되었다. 

 

  

 

1920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는 3.1운동 1주년 기념식 태극기를 흔들기도 했다. 

 

  

 

 

러시아 교육을 받은 이주 2, 3세대 

 

최재형이 이끄는 교육을 받은 고려인 학생들은 개량 한복을 입고 군무를 추기도 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모두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이 조선에 있었더라면 서당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서당에서 이러한 공연을 하기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이국 땅에서 새로운 서구의 세상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연해주 학교

 

 연해주 연추에도 하산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한자나 논어, 대학, 사서삼경이 아니라 국어, 산수, 과학 등 서구의 학문을 가르쳤다. 강제이주가 되어도 스스로 버텨 나갈 수 있는 교육을 배운 것이다. 농사를 잘하기위해서는 셈법이 필요했다. 수로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치수를 잘 알아야 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사범대학도 있었다. 이 사범대학은 훗날 강제이주후에도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길러내는 교육의 잠재성을 갖고 있었다. 

 

  

 

사법대학을 졸업한 많은 사람들이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카자흐스탄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인학생들은 어려서부터 러시아정교회가 세운 학교에서 기초를 닦았다. 서구 교육의 시초였다. 한반도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신교육을 체험하고, 한반도 밖에서는 러시아 정교회를 통해서 서구 교육을 체험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알고, 주기도문을 외우기도 하였다.

 

고려인들의 신앙교육은 이미 러시아정교회가 세운 초등학교에서 시작이 되었다. 이러한 신앙교육으로 인해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여럿이 나온다. 정교회도 예수를 믿게 하였던 것이다. 

 

20년 먼저 서구의 교육을 체험한 연해주 고려인들

 

정교회가 민족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1903년 하와이에 가면 개신교가 민족공동체의 중심이었지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정교회가 민족 공동체의 결속력을 더해주었다. 

 

1885년 후반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20년 전에 1860년대 후반 고려인들은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을 통하여 서구의 교육과 신앙을 일찍 체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 신앙의 힘이 중앙아시아에서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한인들이 정치와 경제계에 우뚝 설수 있었던 것도 교육의 힘 때문이다. 한인들은 교육과 신앙의 힘만 있다면 불모지에 가도 살아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인들은 멕시코, 쿠바, 동부유럽, 미국, 남미, 동남아, 아프리카 어디를 가든지 교육과 신앙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교육과 신앙으로 선교를 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저력이다.

 
임진왜란시 끌려간 포로들도 교육과 신앙의 힘으로 일본에서 한인 공동체를 결속하였다. 연해주에서는 러시아 정교회가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강제이주전 전문인력자 다수 배출

 

1937년 강제이주할 무렵 하바로프스크에서만 교육을 받은 전문인력이 767명이나 되었다. 고려인들은 이미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육과 신앙이 고려인들의 힘이었다. 

 

  이상근,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과정 및 정착과정", 대불대학교 교수

 

교육받은 강제 이주자들


이처럼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약 350여개나 되는 연해주 교육기관에서 적어도 중학교 이상 대학교까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카자흐스탄에 82,353명이 배치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6개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고려사범학교와 고려일보, 홍범도 장군이 있었던 크즐오르다에는 9,144명이 배치되었다. 

 

  

 

카자흐스탄에 학교를 세우는 고려인들

 

고려인들은 교육을 받은 사범대출신 교사들에 힘입어 카자흐스탄에 가자마자 초등학교와 선봉중학교를 세워 2세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크즐오르다에서 고려인 대학을 세우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교육만이 입신양명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중국에 학교를 세우는 조선족들

 

조선인들은 중국에 가도 학교부터 세웠다. 기독교는 항시 학교설립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1911년 간도에 기독교계는 6개의 학교를 세운다. 

 

  

 

간도 은진중학교


간도에 1920년 2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인 부두일(W.R. Foote)과 현지 조선인 기독교인들이 중국 길림성 용정에 은진중학교를 설립했다. 

 

  은진중학교

 

명동서숙

 

1908년 4월, 김약연을 비롯한 명동촌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명동서숙'을 세우기도 했다. 

 

 명동서숙

 

서전서숙

 

1907년 8~9월경 서전서숙은 폐숙되었으나 민족주의 교육기관은 그후 서전서숙이 자리잡고 있던 북간도에서뿐만 아니라 서간도와 노령 시베리아, 또한 국내 각지에서 일제 식민지 교육과 대항하면서 크게 성장해갔다.

 

  서전서숙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바로 그옆 명동촌에 명동서숙이 개숙되어 그뒤 명동학교로 발전하면서 3·1운동때까지 북간도 교육기관의 중심일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 됐다. 윤동주, 문익환, 나운규 등 걸출 한 인물 배출되었다. 

 

 

 

크즐오르다 대학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와서 제2의 고려사범대학인 크즐오르다 대학에 진학했다. 

 

  

 

  

 

계봉우의 교육열


기독교인이었던 계봉우 역시 1937년 강제 이주 후, 카자흐스탄에서 문맹률이 높았던 한인들의 고려어 교육의 확대와 개선을 요구하는 글을《레닌의긔치》에 발표하였다.

 

계봉우 지사는 외몽골 치타를 비롯해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우리말 독본을 내거나 한글을 가르쳤다. 스탈린 정권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해 《이두집해》, 《북방민족어》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우리 정부는 1995년 계봉우 지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19년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있던 계봉우 지사와 황운정 지사 내외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했다.

 

 

  


노년기에 접어든 그는 문학 연구와 역사 저술활동에 심혈을 기울였고 크즐오르다 에서 고려사범학교 교수와 고려중학교 교수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천재적인 교수들이 카자흐스탄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육의 힘, 성공한 고려인들

 

뱌체슬라프 김 (Vyacheslav Kim)은 카자흐스탄 최대 핀테크 및 상업 은행인 카스피 은행(Kaspi Bank)의 회장이다. 카자흐스탄 포브스(Forbes)가 발표한 최고 부자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한 바 있는 현지 최고의 거부입니다.

 

  

 

  

 

에두아르드 김 (Eduard Kim)은 '카자흐스탄의 가전 왕'으로 불리며, 카자흐스탄 전체 가전 유통 시장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가전 유통업체 '테크노돔(Technodom)'의 회장이다.

 

  


블라디미르 김 (Vladimir Kim): 구리 채굴 및 생산 기업인 '카작무스(Kazakhmys)'의 최대 주주이자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KAZ 미네랄스(KAZ Minerals)의 CEO이다.

 

  


최유리 (Yuri Tskhai): 1990년대 한국 복싱 국가대표팀 코치를 지낸 뒤 카자흐스탄에서 자수성가한 인물로, 카스피안 그룹(Caspian Group)의 총수이다. 건설, 시멘트, 유통 등을 아우르며, 최근에는 '알라타우 시티(Alatau City)' 초대형 신도시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데니스 유리예비치 텐(러시아어: Дени́с Ю́рьевич Тен, 1993년 6월 13일~2018년 7월 19일)는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동메달, 2015년 4대륙 선수권대회 금메달 등 카자흐스탄 피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1993년 알마티에서 태어났으며 대한제국 시절 의병대장으로 활동했던 민긍호의 후손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괴한의 흉기에 맞아 25살에 사망했다.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회장 신유리)는 2023년 3월 29일(현지시간) 신 안드레이(신라인그룹 회장)·조 엘레나(알마타시 스포츠 시설 관리국장)·안 세르게이(세계민족무예 연맹 '노마드 MMA'부회장)·이 유리(국제안전표준사 대표)·신 콘스탄틴(고려인건설회사 사업이사) 등 5명의 고려인이 제8대 하원·지방의원 동시 선거에서 지방의원으로 당선됐다고 발표한 바 있을 정도로 고려인들이 정치계까지 진출했다. 

 

  


오알렉산드로 대검철창 인사국장도 고려인이다. 

 

  

 

김베라, 이유리는 2021년 하원에 진출하기도 했다. 

  


최알렉세이 아스타나 대통령병원 이사장(왼쪽부터), 박로자 아스타나고려인협회장, 김 옐레나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장, 김 베라 하원의원 등이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이주 50년이 되면서 주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구 0,6%에 불과한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 법조계 경제계, 정치계 등에서 주류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때문이다. 

 

러시아 정교회와 교육

 

교육이 없었다면 고려인들은 130여개 민족이 있는 카자흐스탄에 1등 민족으로서 활동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러시아정교회가 세운 학교를 통해서 서구의 새로운 교육을 배웠던 것이다.   

 

연해주, 380개의 학교 운영

 

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연해주 고려인 거주지에는 380여 개의 모국어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연해주에 설립된 고려인 학교들은 한반도 전체에 존재했던 교육기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미 서구의 학교시스템이었다. 

 

이 학교들은 거의 대부분 한일합병 이듬해인 1911년 이후 설립되었다. 그래서 이주 1세대들보다 2세대나 3세대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러시아정교회와 권업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애국지사들이 후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그들을 올바른 지식으로 교양하기 위해 학교 건립에 매진한 결과였다.

 

권업회 

 

권업회는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로서 초대 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가 선임되었으며,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얻어 활동하였다.  1913년 10월 회원이 2,600여명에 달하였으며, 1914년에는 8,579명으로 증가하였다.

 

  

 

1910년대 초 재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민족정신의 고취,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 교민의 단결과 지위 향상 등에 노력하였다.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결성된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로 이어졌다.

 

교육을 장려한 러시아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이러한 단체에 힘입어 민족과 애국 , 교육의식이 투철했다. 강제이주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다가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가 일반의무교육 시행을 선포함으로써 학교는 더욱 늘었다. 그동안 교육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가정의 부녀자들도 저녁에 문맹퇴치학교를 다녔다.

  

1928-1933년 사이에 1) 일급학교는 351개교에 학생 수 28,846명, 2)공장제조소 7년제 학교는 4개교 976명, 3) 9년제 학교는 4개교에 학생 수가 700명, 4) 집단농장 청년학교는 21개교에 3,073명으로 총학교는 380교에 학생은 33,595명이었다. 이주 2-3세대는 거의 교육의 혜택을 본 것이다. 

 

1924-31년, 고려사범학교 설립

 

1924년에는 고려인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우수리스크에 3년제 고려사범전문학교(고려인교육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교원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1930년에는 뽀시에트에도 똑같은 사범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193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780명 정원에 역사학부, 문학부, 이학부, 생물학부 등 4개 학부로 구성된 고려사범대학교가 개교되었다. 이 사범대학교는 당대 명실상부한 고려인 최고의 학문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유일의 우리 민족 사범대학교이기도 했다.

 

1924-1931년까지 7년 만에 연해주에 3개의 대학이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졌는데 당시 한반도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경성제대도 일본인이 세운 대학이었다. 육성촌 농민학교는 1916년에 설립되었다. 

 

  

 

연해주 기독교 학교

 

이 외에도 기독교계는 1920년대에 삼일여학교를 세워 신앙인 학생들을 육성하기도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연해주에 삼일여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처럼 한민족은 교육의 민족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마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특히 연해주에서 많은 고려인들이 정교회에 귀의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최재형이었다.  

 

1914년 독일포로가 된 정교도 고려인

 

1914년 세계 1차 대전때 고려인들이 러시아군으로 참전하였다가 독일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의한 명이 러시아 정교회 신도였다.

러시아군대에 참전하면 영주권을 준다고 하니 약 5,000 여명의 조선인들이 러시아 군에 입대하였다. 

 

  

 

러시아군에 소집된 장교는 100여 명, 하사관 및 사병 4,934명이었다. 

 

  

 

포로로 잡힌 고려인 일부 사람은 신상명세서에 직업은 상인, 종교는 러시아 정교라고 적은 것을 보았을 때 정교도 신자가 많이 있었다.

이미 러시아 연해주에 머문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도 러시아 정교회에 귀의 하였다. 최재형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많은 지식인들도 정교회에 들어갔다.  

 

  

 

  

 

이병조 교수, 연해주 신학교에 신학생 수업

 

2026. 4. 18일 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 한국학과 이병조 교수가 고려일보에 투고한 글에 의하면 "마을 한인들에 대한 정교회 세례와 더불어 러시아 세속당국은 교육을 통한 한인들의 러시아화 정책에도 힘을 기울였다"고 하여 러시아도 한인교육에 관심이 있었다.

 

  https://koreilbo.com/korean-news/_1222/?sphrase_id=9238

 

러시아는 이민족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속히 러시아화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1880-1905년 시기 신성종무원장을 역임했던 포베도노스체프(К.П.Победоносцев)에 의해 정교회 선교는 일종의 국가 정책으로 전 지역의 이민족들 사이에서 강력히 추진되어 나갔다. 

 

이교수는 19세기 후반의 정교신앙 및 체계적 교육에 기반을 둔 이민족 선교정책의 영향으로1871-72년 겨울에 11명의 한인 소년들이 미하일-세묘노프스코예 카자크 학교에 입학해서 러시아어를 공부했으며, 3명의 한인 학생은 블라고베쉔스크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미 예수에 대한 신앙심을 갖고 사제가 되기위한 수업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 1872년 말 무렵에 곰쟈코프 사제는 “학생들은 매우 괄목할 만한 수준에 올라있었으며, 읽고쓰기와 큰자리수까지 셈이 가능했으며, 기도를 할 줄 알았다”고 보고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https://koreilbo.com/korean-news/korean-news-cis-4-/?sphrase_id=9240)

 

이 교수는 "가령 1884-85학년도에 남우스리스크 남부의 얀치헤 선교학교에는 12명 정도가, 1880-85년도에 코르사코프카 선교학교에는 25-36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하여 학교에서 신학교육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연해주는 교육과 신앙, 교회가 민족의 구심점이 되어 한편으로는 교육을 통해 지도자를 양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심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기를 원했다. 임진란이후 일본에서도 한인 포로들은 신앙심에 귀의하여 바로 1594년 교회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카톨릭이든, 정교회이든 그들이 전하는 예수에 귀의 했다. 그들은 교파보다는 그들이 전하는 예수가 더 중요했다. 1937년 공산치하에서도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에게 예배가 있었다.  

 

민영진 총무의 글

  

성서공회 총무를 지낸 민영진은 '유라시아 유민 150년: 한반도 지평에서 본 추방과 해방'이라는 글에서 1937년 강제 이주 이후에 한국인 마을에 정규적인 예배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민영진, 유라시아 유민150: 한반도 지평에서

 

  

 

잃어버린 아시아의 심장


영국의 작가이자 여행문학가인 콜린 튀비론(Colin Thubron)의 저서 『잃어버린 아시아의 심장(In Siberia)』에서 저자는 시베리아 오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러시아 한인) 마을을 방문하여,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라는 역사적 비극을 견뎌낸 그들이 침례교회에 모여 저녁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서 중앙아시아에 대해 무슬림이 공산주의와 함께 공존하고, 기독교전통도 깊이 뿌리내렸다고 했다.  그는 침례교전도자들이 고려인에게 전도하니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힘

 

이처럼 고려인들이 척박한 광야같은 낯선 이방의 나라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교육과 예수에 대한 신앙심때문이다.

임진란시 조선인들이 정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었다. 조선족과 고려인의 등뒤에는 항시 하나님이 함께 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알이랑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성당을 세운 한인들


1593년 임진란 때 끌려간 많은 한인들이 세례를 받고 로렌조 성당을 세운 것과 같다. 1594년 빠시오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2,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보고한다. 하나님은 일본에서도 조선인들과 함께 했다.

 

훗날 일본인 농학자 쯔다센을 통하여 이수정이 예수를 믿고 성서번역가가 되고, 그의 한 통의 서신을 통하여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알이랑 하나님이 한민족의 대표 이수정에게 함께 했다. 그리고 요코하마 인쇄소를 통하여 한글성경을 대량 출판했다.  

 

  

루이스 데 구스만에 의하면 1594년, 나가사키와 토키츠 등에서 조선인 12,365명이 고해성사를 했고, 900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알이랑 민족이 왜의 나라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노성환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1594년 3월 10일부터 10월까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토키츠, 고가, 고쿠라 등 세 전도서에서 신자가 되기를 결심한 사람의 수가 12,365명이 되었고, 이들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었다고 한다”고 주장한다.  (노성환, 일본 나가사키현의 조선인 천주교도에 관한 연구“) 

 

예수회 일본 연례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를 영접한 한인들은 일찌기 교회도 세웠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380여 개 학교중에서 정교회가 세운 학교, 한국장로교가 세운 삼일여학교 등을 통하여 일부 한인들에게 예수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알이랑 하나님이 교육과 정교회를 통하여 함께 한 것이다. 

 

공산치하에서도 가정예배가 있었고, 나름대로 몰래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뒤에는 일이랑 하나님이 있었다. 1990년 러시아가 개방되자마자, 교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2007. 2. 26 크리스천 투데이 '카자흐스탄의 기독교 선교'라는 글에서 카자흐스탄 김모세 선교사는 "그동안 공산당의 강력한 통치 가운데에서도 카자흐스탄 현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최대 복음주의 교단인 복음 침례교와 오순절 교단은 많은 지하 교회를 개척하며 환란과 핍박의 긴 터널을 지나왔다. 카자흐스탄 각 지역의 자생적 그루터기 기독교회가 된 복음 침례교와 오순절 교회가 복음전파의 사명을 다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과 미주 지역에서 들어온 한인 선교사들에 의해 약 80여개의 교회(2005년 말 현재)가 개척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지하교회를 통해 그들의 신앙생활이 유지되었음을 주장한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83302)

 

결국 스탈린의 강제이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배우고 하는 정신과 믿고자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알이랑 신앙때문은 아닐까?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아리랑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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