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간 유대인들
중국에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서구 세계에 알린 것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로 알려져 있다.
1605년 마테오 리치는 카이펑 출신의 애전(艾田)이라는 60살 노인을 만났는데 애전은 자신이 유대교를 믿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애, 석, 고, 김, 이, 장, 조의 7개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성인 에즈라, 시몬, 코헨, 길버트, 레비, 조슈아, 조나단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유태인들은 A.D 70년 로마에 멸당당한 이후 중국까지 온 것으로 나타났고, 주로 실크로드가 발견된 이후 7-8세기 당나라가 통치할 무렵 많은 중국에 까지 온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고대의 개봉(開封), 양주(揚州), 영파(寧波), 항주(杭州), 광주(廣州) 및 하문(廈門)등지에도 유태인의 족적이 남아 있다.
강문한(江文漢)은 <<중국고대기독교 및 개봉의 유태인>>이라는 책에서 "개봉의 유태인들은 '유태인'이라는 칭호를 몰랐다. 기독교에 대하여도 들어본 적이 없다. 17세기 마테오 리치가 개봉의 유태인 애전(艾田)을 만났을 때, 애전은 스스로 '일사낙업'이라고 하였고, 자신이 '유태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개봉의 몇몇 유태교비의 비문에서도 '유태인'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유태인'이라는 단어는 기원전 6세기 이후에 비로소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앗시리아나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을 떠나 수천키로 떨어진 중국까지 온 것이다.
한나라때 도래한 유대인들
유대 구전(口傳)에 따르면 기원전 206년~221년 중국의 한(漢)나라 시대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中国犹太人是指生活在中国的犹太人,中国关于犹太人最早的文献记录可以追溯到公元7世纪到8世纪间,但犹太人可能在更早的汉朝就已经来到了中国。
중국 유태인은 중국에 사는 유태인을 뜻하는데, 유태인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서기 7세기에서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유태인은 그보다 훨씬 이른 한나라 때 이미 중국에 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나라때 온 유태인들
프랑스 고고학자 Paul Pelliot(1878-1945)가 당나라때 돈황석굴에서 히브리어 기도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당나라때 유대인들이 온 것은 확실하다.
카이펑에 가주하는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송나라의 수도였던 하남의 개봉시에 주로 거주하였다.
从唐宋年间一直到清朝,犹太人都一直生活在一个相对隔离的社群中,大部分都居住在河南开封,称为开封犹太人社群
당송 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유대인들은 비교적 고립된 공동체에서 생활했으며 대부분은 카이펑 유대인 공동체라고 하는 허난 카이펑에 거주했습니다.
명대의 개봉 유대인 명부는, 주로 한자와 히브리 문자로 쓰여져 있다.
一本明代的开封犹太人名册,用汉字和希伯来字母写成
公元1世纪后,犹太人逃离家园并散布在整个欧亚大陆上,其中以中亚地区最为集中。到9世纪时,已经有大量的犹太商人通过各种途径来到中国。
서기 1세기 이후 유대인들은 집을 떠나 유라시아 전역에 퍼졌으며 중앙아시아가 가장 집중되어 있습니다. 9세기에 이르러 많은 유대인 상인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국에 왔습니다.
유대인의 유물
송나라수도였던 개봉(카이펑)에는 명청시대 건립한 3개의 석비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존숭도경사기이다. 개봉에는 1163년 유대인의 비와 회당을 세웠다.
다른 하나는 명나라 홍치2년(1489년)에 건립한 중건청진사기이다.
내용은 유태교의 원류, 교의, 교구등을 기록하고, 개봉유태교사의 연혁을 기록했다. 청나라 강희 2년(1663년)에 건립한 비석도 이름은 동일하다.
강희문비문에 따르면 "교는 천축에서 기원했고, 주나라때 중주에 전해졌다"고 했다. 천축은 인도를 말한다. 개봉(카이펑)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성서로만 인정한다.
유대인의 회당
2915년 4월 7일 뉴욕타임즈는 개봉시의 유대인들이 유월절 기념을 하고 있는 것을 기사화하였다.
2016. 9. 24. 자 뉴욕타임즈에서 중국유대인을 조명하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간 유대인들
일본의 유대인 기원은 1572년 기독교로 개종한 스페인 나폴리계 유대인은 마카오 포르투갈인의 흑선을 타고 나가사키로 들어간 것으로 삼고 있다. 나가사키에 남아 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 중 몇몇은 유대교도로 돌아와 가족의 이름(특히 레비테)을 되찾았다.
일본은 자신들은 잃어버린 10부족의 후에로서 2000년 전에 유대인 일부가 들어와 일본원주민과 하나가 되어 일본인이 되었으며 일유동조설을 주장하고 있다.
일유동조론(日有同祖論, 일유동조론)은 일본인 조상이 2900년 전 앗시리아로 부터으로 추방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지파 중의 하나라는 설이다. 단, 유대인(고대 이스라엘인 중 유다족, 베냐민족, 레위족)이 아니라 유대인과 공통의 조상 야곱을 가진 형제민족이라는 것이다. 이는 스코틀랜듸 상인 맥클레오드가 주장했다.
일유동조론의 역사는 Mclead의 영어 저작 'The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일본고대사 도해>, (나가사키 히노데쇼보(長長崎日出書房, 1878년)와 'Illlustrations to the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일본고대역사도해>, 교토(京都), 1878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 맥클라우드는 기원제의 달구지와 유대인이 가족끼리 이동할 때 달구지와의 유사성을 비롯해 이스라엘인이 일본에 도래할 때 사용한 뗏목, 일본에서 발견된 바빌론 등 옛 문자, 아시리아와 유대의 고물, 유대의 신전에서 사용됐다고 상상하는 일본의 나팔과 비파 등 악기와 십여 가지 항목에서 일본인과 이스라엘인의 공통점을 들어 일본인 조상은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훗날 1901년에 '유대백과사전' 뉴욕판 잃어버린 10지족[5] 의 항목에 인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유동조론도 주창하기도 했다. 한국은 단지파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맥리어드는 "The aborigines, by their ethnology appear to be descended from Japhet, one history professors to trace their arrival in Japan to B. C. 2,357, ten years after the flood. Dankun, or as they call themselves the tribe of Dan, have the emetic type of features,..."고 하여 인종학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조상은 야벳의 후손인 것처럼 보이고 홍수가 끝난지 10년이 지나서 B.C 2357년에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주장하고 자신들이 단군 혹은 단지파의 후손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한유동조설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까지 와서 거주하였던 맥레오드는 그의 책에서 한국인의 복장까지 묘사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상인 Mcleod가 쓴, 'Korea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는 유대백과사전에 실리기도 했다.
고베에는 1924년 유대교 회당을 목조건축물로 짓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온 것은 확실하다.
동경에는 현대식으로 지은 유대인 회당도 있다.
여전히 일본의 많은 유대인들은 일본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상술한 바와같이 구약의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웠지만 신약의 영적인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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