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발해편)

발해는 바다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 해동성국

편집인 | 입력 : 2025/06/20 [17:16] | 조회수: 351

 

발해

 

발해는 고구려가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678~698년에 고구려 장수의 아들 대조영이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로 갔다가 당과 돌궐이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주변에 있는 말갈족을 끌어 모아 이 지금의 중국 만주 일대 동모산에 세운 나라이다. 

 

 

  

 

 

  

 


발해의 첫번째 수도, 길림성 동모산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발해를 세운 곳은 현재 중국 길림성에 위치한 동모산 자락이었다.

오늘날의 돈화근처이다.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뒤 제3대 문왕 때 상경 용천부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56년간 발해의 첫번째 수도였다.

 

 

  



  동모산

 

동모산은 고구려 유민이 된 대조영이 유배지를 탈출한 후 먼 길을 달려 새롭게 나라를 세웠던 발해의 첫 수도이다. 발해는 4번씩이나 수도천도를 한 나라이다. 

 

그러나 최근에 발해의 유적지가 새로이 발견됨에 따라 돈화의 성산자 산성이 아니라 마반촌 산성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마반촌산성은 길림성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한반도와 훨씬 가까운 곳이다.  

 

  

 

  



 

 

마반촌에서 동모산의 '모'자가 새겨진 기왓장이 발견되기도 했다. 

 

  

 

 

 

 

발해의 빈번한 수도천도

 

698년 동모산에서 건국하여 현주, 상경, 동경을 거쳐, 794년 상경으로 최종 천도했다. 

 

 

 

발해의 두 번째 수도, 중경현덕부

 

건국 초의 혼란이 안정되자 제3대 문왕은 742년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 두 번째 수도는 중경현덕부였다. 발해의 지방 편제는 5경(京),15부(府),62주(州)로 이루어졌다. 그 중 5경의 한 곳이 중경(中京)과 그 통치지역인 현덕부(顯德府)로 이른바 중경현덕부이다.  

 

이곳 중경현덕부의 치소(治所)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개였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각각 3개 주,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와 서경압록부(西京鴨府)가 각각 4개 주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에 비해 가장 많은 주를 거느렸던 도성이었다.

 

  

 

중경현덕부와 연변


중국과 러시아의 발해 유적이 있는 곳의 근대적 특징은 대개가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증경현덕부의 위치는 현재 연변이다.

 

발해는 사라졌지만 유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고구려 민족의 숨결이 여전히 느껴지는 곳이다. 중경현덕부가 있었던 연변자치구는 고스란히 발해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연변

 

연변(延边)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동부에 위치한 조선족 자치주이며, 연길시, 도문시, 용정시, 화룡시, 혼춘시 등 5개의 시와 옌볜현, 장백현 등 2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간도지방으로서 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며 고구려·발해사와 함께한 유적지로서 한국의 탐방객들이 매년 수없이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중경(화룡)과 동경(훈춘)이 있다. 

 

  

 

 발해의 두번째 수도는 중경이다. 

 

  

 

중경의 발해 유적, 정효공주묘

 

발해 유적은 먼저 화룡에 있는 발해 서고성(西古城)과 정효공주묘가 있다.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의 둘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으로 돈화현 남쪽 약 5km의 거리에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서 1949년 8월 중국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정효공주묘는 1980년 10월부터 1981년 6월까지 두 차례 발굴을 통해 무덤길, 무덤문, 널길, 널방, 탑의 다섯 부분으로 축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효는 죽은 후에 붙여지는 이름인 시호로서 그녀는 757년 즉 문왕 대흥(大興) 21년에 태어나 대흥 56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인 문왕은 발해에서 가장 장수한 '황상(皇上)'이었다.

 

중경현덕부로 추정되는 서고성은 이후의 상경성과 비슷하게 내성과 외성으로 둘러싸인 장방형 구조로, 이곳은 철이 많이 나고 비교적 비옥한 경작지라는 점에서 문왕이 선택한 도읍일 것으로 보인다.

 

중경현덕부와 연변자치주

 

이 곳은 현재 연변 자치주에 위치해 있다. 알다시피 연변은 두만강 국경으로서 독립운동이 있었던 일송정과 해란강이 있는 곳이다. 

 

연변에서 버스로 남서쪽으로 30분 정도를 달리면 해란강이 눈에 들어오고 용정시(龍井市)를 지난다.  연변은 중국 내 조선족 집거지로서, 특히 용정(龙井) 지역은 해란강을 끼고 있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송정에서 내려다본 해란강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독립운동가를 묘사한 노래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일송정은 용정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비암산 풍경구’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이 소나무 아래서 작전회의를 많이 했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출동하면 사방으로 흩어져 쉽사리 붙잡히지 않았다. 이에 1938년 일제는 이 소나무를 고사시켰다.

 

1991년 용정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이 자리에 소나무를 다시 심었으며, 현재의 정자를 세웠다. 이곳에 오르면 해란강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세운 철길, 개척한 논 등이 한 눈에 펼쳐진다.

 

사실 중국 연변지역은 소수민족자치구로 1952년에 지정되었지만 56년에 조선족자치주로 강등됐다. 크기도 남한면적의 절반정도인 약 4만2700㎢이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청산리, 일송정, 해란강 등 항일유적지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 시비가 있는 이곳의 대성중학교(현 용정제일중학교)는 독립과 교육의 본산이었다.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를 나왔다.

   

  

 

발해의 세번째 수도, 흑룡강성의 상경용천부

 

이후 발해는 건국 초 동모산(東牟山)에서 수도를 시작하여 중경현덕부를 거쳐 세번째 수도로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했다. 이후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수도를 옮겼다가 다시 상경용천부로 돌아와 멸망할 때까지 유지했다.

 

중경이후에는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수도를 몇 차례 옮겼다. 

 

 

  



현재 중국의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은 발해의 세 번째 수도였던 상경이 있던 곳이다. 발해는  755년~756년 초, 문왕은 세 번째 수도로 현재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선택했다. 길림성(지린성)에서 흑룡강성(헤룽장성)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발해의 상경 용천부 유적

 

흑룡강성 홀한하목단강 유역에 있어 홀한성이라고도 불린 상경성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가장 큰 규모로, 가장 번영한 발해의 도읍이었다. 여전히 발해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오경 가운데 하나로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 있다. 용천부 외성(外城)을 지나 왕성으로 들어갔다.

외성이라지만, 지금 허물어진 성벽만 남아 옛 자취를 증명하고 있다. 내성인 황성은 평평한 지형에 쌓은 평지성이다. 상경성은 서쪽과 북쪽으로 휘감고 흐르는 목단강을 낀 너른 평원에 둘레 40리에 달하는 거대한 평지성이다.

 

  

 

 

 

이 곳은 지정천 장군이  장군이 승리를 이끌었던 동경성전투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공원안내문에는 “발해국 상경용천부 터는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 있으며, 우리나라 성당(盛唐, 713~762년)기 가장 완비된 형태를 갖춘 건축유적이다. 유적이 풍부하고 고도(古都) 위치, 도시 구조, 건축양식, 건축기술, 건축예술에서 당나라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중요한 역사 문화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 기술로서 가치와 예술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유득공은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였다. (유득공 ‘발해고’, 송기호 옮김, 홍익출판사, 2013. 개정판) 

 

발해와 독립군의 항일 투쟁.

 

엣발해의 땅에서 독립군들은 발해인의 정신을 갖고 치열하게 항일전투를 하였다. 

 

  

 

  


중국에서의 항일전투는 대부분 발해의 땅에서 이루어졌다. 

 

  

 

발해와 안중근

 

안중근은 발해의 땅이었던 흑룡강성의 하얼빈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모의하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우덕순, 조도선은 채가구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건이 가능한 자가 우선처단하기로 결정했다. 안중근이 가능했다. 

 

  

 

흑룡강성은 부여, 고구려, 발해의 피가 서려 있는 곳 

 

하얼빈은 오래전부터 한민족의 조상 예맥족이 있었는 것이며 고구려 유민인 발해의 정신이 서려있는 곳이다. 

 

흑룡강성(헤이룽장성) 일대에서 처음으로 일어선 국가는 예맥 계통의 부여이다.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헤이룽장성의 동부는 발해가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지배했었다. 이처럼 흑룡강성은 부여, 고구려, 발해의 피가 서려있는 곳이다.  

 

발해는 수도를 네 번 옮겼는데 그중 상경은 가장 오랜 기간 수도로서 번영한 곳이다.

상경성은 당시 중국 당나라의 장안성과 같은 모양을 갖춘 계획도시였다. 현재 옛 상경성 자리에는 많은 궁궐 터와 사찰 터, 집터 그리고 다양한 유물의 자취가 남아 있어서 발해의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까지 땅을 넓힌 발해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현 러시아 연해주와 트로이츠코예, 하바롭스크 남부 지역에 227~247년간 존속했는데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발해의 영토는  신라의 2배, 고구려의 4배였다. 그야말로 해동성국이었다. 록샤로프카와 트로이츠코예에서 발해의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 

 

  © 편집인

 

  

이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은 대부분 고구려의 것과 유사하였다.

  

 

 

  

 

 

 

  

 

  



 

 매장도 고구려 매장과 유사했다.

 

 

  

 

이러한 발해유물의 발견은 발해의 땅이 지금의 러시아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발해의 건국이 주는 역사적 의미

 

발해의 건국이 우리 역사에 주는 의미는 첫째, 만주 지역을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로 유지시켰다는 점, 둘째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아 우리 민족의 혼을 만주 땅에 심어 주었다는 점, 셋째, 흩어져 있던 고구려의 유민들을 하나로 모았으며 말갈, 거란 등 다른 민족도 받아들여 큰 나라를 만들어 ‘바다의 동쪽에 찬란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고 불리웠다. 몽골의 칭기스 칸도 발해의 후손이었다.

 

칭기스 칸은 고구려 유민인 대야발의 19대 후손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였고, 다양한 종교까지 수용하였다.

 

발해의 불교 

 

발해불교는 건국초기부터 유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발해유적 조사 자료에 따르면 상경(上京.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동경(東京.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중경(中京.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 남경(南京.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 부근에선 불교유적이 다수 발견되지만, 첫 도읍지였던 돈화 부근에서는 한 곳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건국 초기엔 불교의 유포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발해 시대의 절터. 석등과 석사자상 등이 남아 있다. 상경용천부 외성 안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흥륭사'라는 절이다. 흥륭사는 발해시대 때 세워진 절로 불상과 석등은 여전히 발해시대의 것들의 그대로 남아있다.

  

 

  

 

 

  

 

발해와 기독교

   

발해가 있었던 훈춘 팔련성 출토 불상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훈춘시는 도문강 하류에 있으며 동남쪽은 러시아와 인접하고 서남은 북한과 도문강을 사이두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 북한 3개국의 접경지대에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180km이며 북한의 라진항과 93km, 청진항과 171km, 일본해와 15km를 사이두고 있다.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 지역 훈춘에서 발견된 삼존불 중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으며, 중앙 불상 가슴에도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흔히 ‘시리아식 십자가’라고도 하는, 끝이 넓어지는 십자가를 발견한 샵쿠노프는 1968년에 발간된 그의 박사 논문을 통해서 처음 소련 학계에서 공개했다. 진흙으로 만든 십자가였다. 

 

  



발해는 불교가 지배적이었지만, 경교와 샤머니즘과 같은 다른 종교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경교 십자가 유물들은 발해의 국제적인 교류와 개방적인 종교 문화를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발해의 경교 유물은 고구려, 당나라 등 주변 문화권과의 교류 속에서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각 주마다 경교사원에 세워졌고, 당나라의 영향이 미친 발해에도 경교가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기독교를 채택한 소그드인들을 통하여 당나라와 발해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상징물들이 고구려 유민들에게까지 흘러 들어와 앞으로 한반도에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동성국 대한민국

 

발해는 사라졌지만 발해의 땅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의 활동이 번성했던 곳으로 발해의 정신이 이어진 곳이다. 안중근도 발해의 땅이었던 하얼빈에서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고, 윤동주도 발해의 땅 용정에서 민족시를 썼다. 

 

발해는 이처럼 민족정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이외에도 발해는 훗날 십자가를 걸고 있는 불상의 모습은 이 나라에 오게될 그리스도의 정기를 예표한 것이다.

 

이는 발해보다 더 넓은 하나님 나라의 땅을 건설하는 영적인 해동성국을 예표한 것은 아닐까?  한민족은 십자가 복음을 갖고 전세계에 약 2만 여명 선교사들이 나가서 한반도의 하나님 나라의 땅을 넓히고 있다. 대한민국은 발해의 정기를 이어받은 진정한 해동성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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