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 근처 교토를 가면 한반도에서 도래한 가장 큰 씨족이 있다. 하타씨라는 씨족이다. 하타씨(일본어: 秦氏)는 일본의 도래인계 씨족이다. 하타씨는 백제 사람 아니면 신라 사람이 울진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와 일본에 정착한 한반도 씨족이다.
하타씨족은 일본에 가서 일본을 개척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제사를 담당하기도 하는 등 많은 신사를 세우기도 했다. 종교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씨족이다. 한양대교 박규태 교수의 글을 보자.
하타씨는 일본에서 한반도식 그대로 제방을 쌓고 농사를 지었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도래인들은 먼저 하천이나 호수를 막아 제방을 세우고 논농사를 하였다.
하타(秦)씨가 사가노(嵯峨野) 지역으로 정착한 시기는 5세기 후반 무렵으로, 볍씨를 가지고 온 하타씨(秦氏)는 저수지와 수로를 만드는 관개 농업을 시작했고 우수한 토목 기술을 가지고 토지를 개발하였다.
하타씨는 제철, 주조, 양잠, 토목, 관개, 농경 등의 새로운 기술을 전파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양잠의 신을 모시기도 했다.
"이 사가노 일대는 고분시대에 조선반도로부터 도래하였으며, 제도(도자기 제작), 양잠, 기작(직물제작)등 뛰어난 기술을 지냈던 하타씨의 세력 범위로 당 신사 본전의 뒤쪽에는 양잠신사(동본전)가 있으며 '카이코노아시로'(누에신사) 라는 이름도 그와 관련있는 사명이다."
하타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류지(廣隆寺)라는 사찰을 만들었는데 이곳에 있는 일본 국보 반가사유상이 한국 국보 제83호와 굉장히 유사하다.
여기에 목조로 된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다.
금동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의 상이다. 백제의 문화인지 신라의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다. 신라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고류지의 반가상은 삼국시대로부터 이전된 것이다.
농경과 풍요를 주관하는 여우 신사인 후시미이나리 신사는 하타씨족들이 모시던 씨족신 이나리 오미카미(稲荷大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것에서 유래한 신앙이다.
후시미이나리 신사는 5명의 신을 숭상하며 모시고 있다. 일본에는 이나리 신을 모시는 신사가 총 3만 개가 넘게 존재한다.
하타족의 기원 하타족의 기원은 세가지가 있다. 백제인 아니면 신라인, 경교 유대인이라는 설이 있다.
첫번째 백제 기원설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하타(秦)씨를 백제에서 이주한 진(秦)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에서 궁월군이라는 지도자가 120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교토로 갔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 등지에서 주로 분포하는 '탁자식 고인돌'(북방식 고인돌)이 일본 규슈(九州)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라인 도래설
대체로 학계에서는 백제인보다는 신라인들이 도래하였을 가능성을 많이 주장하고 있다.
524년 신라 법흥왕때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봉평 (파단,波旦)이라는 고대 지명이 나오는데 파단은 일본식 발음으로 하타가 된다.
그런데다가 5세기 후반 교토 지역에서 양잠 기술로 비단을 만드는 신기술을 가진 하타씨족을 고대 진한(신라) 울진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울진을 하타씨의 근거지가 아닌가 추정하고 진한 12국의 1국인 우유국(優由國)과 연관시켰다.
세번째는 하타씨가 유대인이라는 가설도 있다. 사에키 오시로에 의하면 하타씨는 경교를 믿었던 유대인 집단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의 후예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신라시대에 경교가 들어왔을 가능성은 많이 있다.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다.
경교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보았다.
경주에 있는 당간지주에도 십자가가 있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에서도 십자가 발견되었다.
일본과 유대인
일본인들은 일본에 도래한 백제나 신라의 사람들 중에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일본과 유대인들은 유사한 면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요세푸스도 잃어버린 10개 부족이 유프라스 너머에 엄청난 민중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유대학자들도 10개부족은 대륙을 횡단하여 중국앞에 있는 신비로운 나라로 이주하였다고 믿고 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하타씨가 유대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 다윗의 별을 문양으로 하고 있다.
유대인 아비하일, 유대인이 일본까지 진출 주장
유대인들이 1975년 잃어비란 10부족을 찾기 위하여 아미샤브라는 단체를 설립한 창시자 아비하일은 아비샤부의 조사보고라는 책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10개 부족이 일본에까지 도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리엘 대학의 전교수이자 아비그도르 샤한 박사도 잃어버린 10부족이 일본에까지 도달했다고 적고 있다.
매클레오드
유대대백과 사전은 McLead의 글을 보고 유대인이 일본에 들어와 잃어버린 지파로서 일본과 유대인은 공동조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유동조설이다.
최초로 일유동조론을 설파한 이는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활동했던 스코틀랜드 상인 니콜라스 매클레오드(Nicholas McLeod)이다. 매클레오드는 한유동조론도 동시에 주장했는데, 10지파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넘어갔고, 단 지파 등의 일부 지파는 한반도에 남았다고 설명했다. 맥리어드는 유대인들의 일본행렬의 벽화도를 제시하고 있다.
일본 신사와 유대인의 성소
이외에 일본의 신사는 유대인들의 성소문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유대인들의 일본도래로 인해 일본의 신사는 이스라엘 성전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좀더 구체적으로 일본의 신사는 다음과 같다.
한반도의 유대인 도래 가능성 여부, 도피성과 소도
삼국시대나 그 이후 유대인들이 들어왔다는 결정적인 문서는 없지만 유물이나 풍습, 언어 등을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도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유대에는 6군데의 도피성이 있었다.
여러 성 가운데서 도피성을 골라 누구든지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그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하여라. 그곳에서 그(살인자)는 ··· 죽은 사람의 친척의 복수를 피할 수 있다. 그는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는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민수기 35:11~12)
구약 이스라엘의 법에는 고의로 살인을 했든 실수로 살인을 했든, 죽은 사람의 부모나 친척이 살인한 자를 잡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상처는 상처’로 갚아야 하는 엄격한 법률 때문이다(출애굽기 21:23~25).
소도
솟대에는 주로 새가 올라가 있었다. 새는 고대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여겨져 종교적인 상징성이 있었다.
특히 물새인 오리는 농경 사회에서 비와 천둥을 지배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솟대에 많이 사용되었고, 오리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과 오리 알은 풍요로움을 상징하였다.
삼한 사회에서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매년 1~2차에 걸쳐 각 읍(邑)별로 소도에서 천군을 선발하여 제사를 지내었으며,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전남 해남에 가면 최근 발견된 것으로 죄인들의 도피성인 마한의 소도가 있다. 이 소도는 매우 신성한 곳으로서 제사에 참석하는 자는 죄인이라도 처벌하지 않았다.
출애굽기12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우슬초 묶음을 갖다가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리면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1.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12:21-23)
이러한 풍속은 우리나라에게까지 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피는 바르지 않았지만 팥의 붉은 색이 악귀를 쫏는다고 생각하여 문지방과 집안을 다니면서 팥을 뿌리고 다니는 습성이 있었다. 대문에 피대신 붉은 팥을 뿌리면 악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문만 아니라 온 집안에 팥을 뿌리고 다녔다.
당시 신라의 여인들은 시집을 갈 때 얼굴에 연지를 사용했다. 연지를 사용하여 이마에 동그랗게 칠하는 것을 곤지라고 한다.
단오에 비녀 끝에 연지를 발라 재액을 물리치고, 일부 산간지방에서 전염병이 돌 때에 예방수단으로 이마에 연지를 칠하거나 붉은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시집갈 때 악귀를 물리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토기와 언어
토기에도 유대의 흔적이 나타난다.
김해의 금관가야에서는 토기에 히브리 문자가 발견돼 유대인이 한반도에 왔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 김해 박물관, 가야 도부호
토기에 새겨진 글자는 히브리-페니키아문자로 되어 있다. 페니키아문자의 영향을 받은 고대 히브리어와 거의 유사한 면을 드러내고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가야에 왔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문화의 토기에 히브리-페니키아 문자가 나타나 가야와 이스라엘간에 긴밀한 유대관계가 있지 않았느냐 하는 의혹을 던져주고 있다.
포항의 방어진 제일교회 염동옥박사는 오랫동안 가야와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을 문자를 통해서 연구하여 왔다.
부산 복천동박물관에도 토기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 역사의 비밀'을 쓴 염동옥박사는 주후 2-3세기에 우리나라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고대 히브리어가 쓰여진 토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유대인의 한국왕래설을 주장하고 있다.
게셀의 달력은 B.C10 세기에 기록된 비문으로 원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터어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서장되어 있다.
금관가야의 문자토기
신라나 가야시대 토기를 보면 문자가 종종 나온다.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였지만 가야의 토기에서는 문자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릇에 찍혀있는 토기의 문자는 대부분 토기제작소와 관련이 있다.
한 토기에는 한자로 대왕이라고 쓰여있다.
다음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로서 400개를 의미한다.
김해의 박물관에도 히브리문자와 유사한 다량의 토기가 발견되어 다양한 문화교류가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한반도에 당도했다는 설을 부추키고 있다.
이러한 문자에 대해 염동옥씨는 서아시아의 문물이 들어왔거나 유대인들이 한반도에 왔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토기에 새겨져있는 기호에 대해 페니키아와 고대 히브리어의 글자라고 해석한다.
서남아시아의 토기가 한반도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고, 페니키아와 히브리 문자를 아는 사람들이 한반도까지 직접 들어와 토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대가야시대의 지역이었던 고령근처 합천에서도 문자가 있는 토기가 발견되었다.
2) 조형물을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공통적으로 금관에는 새가 조형되어 있다. 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로서 신성하게 여긴 동물이다.
왕관은 나무가지에 새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왕관에도 새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과 솔로몬이 썼던 왕관이다.
3) 굽다리 토기를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이스라엘 토기와 신라시대의 토기도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는 고대의 토기도 가야 박물관에 있는 토기와 유사하다. 가야의 토기는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와 가야시대의 토기는 굽다리 토기이다.
3) 언어를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특히 언어에 이어서 유사한 면이 많은 것은 유대인들과 교류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의 유사성은 단지 문물교류만 갖고는 어렵고 유대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가야와 신라의 왕호와 국호는 히브리어 명칭이다. 가야왕 수로왕은 히브리어의 왕을 뜻하는 '사르'이며, 신라의 초대왕 박혁거세는 히브리어의 하키세에서 왔다.
하키세는 '왕자', '왕위'를 의미한다. 고대신라의 왕호는 차차웅, 니사금, 마립간으로 변하여 갔다.
차차웅은 히브리어의 차치인으로 '장군', '우두머리', '왕'이라는 뜻이다. 니사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사크는 '제사장', '군주'라는 뜻이다.
마립간은 최고의 왕호를 뜻한다.
히브리어 메레크, 말레크는 '왕', '군왕'이다. 엄마는 히브리어로 엠이고, 아버지는 히브리어로 '아브'이다. 형제는 히브리어로 '아으'이다. 하나, 둘, 셋은 히브리어로 하다드, 다베크, 샬로시이다.
만장일치를 추구하는 신라의 화백제도는 히브리어로 화박이다. 화박은 '의견을 모으다', '합의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상, 삼국시대는 일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래하여 일본 문명을 창건하였다. 하타씨는 진시황제의 후손이거나 티벳의 후손이 아니라 삼국시대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하타씨가 유대인이었다는 가설까지 내어 놓았다. 상술했지만 하타씨는 신라나 백제의 도래인들이었다. 이들 중에 유대인들이 섞였을 가능성은 있다. 한반도에서도 유대인들의 흔적은 나타나고 있다.
문무왕비에 나타나듯, 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거나 죄인들이 도망치는 소도, 피대신 팥죽과 연지를 통해 악귀내어 쫏으려고 했던 행위, 토기에 나타난 문자와 신라시대의 언어, 천신에 제사하는 것 등을 통하여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흔적은 뚜렷이 나타난다.
유대인들 외에 도마바위처럼 경교가 전파되었다는 흔적도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의미는 구약의 상징으로서 신약의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한반도는 일본과 달리 유일신이 우선되는 기독교가 확립되었다. 한반도에 온 유대인의 구약 징표, 통일신라 시대 경교인들의 십자가는 한반도에 선교사들을 통한 예수의 도래를 예측한 것은 아닐까? 다신 론에 동화되지 않은 유대인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유대인이 아닐까?
<저작권자 ⓒ 뉴스와논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