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과 통영의 아들

북으로 간 딸과 남한으로 온 아들

편집인 | 입력 : 2022/09/05 [04:02] | 조회수: 816

 

 

 

한국정부는 독일정부와 계약을 맺고 약 1만여 명의 간호사를 독일에 파송했다. 통영의 딸 신숙자도 이들중 어디엔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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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영의 딸은 북으로 넘어간 간호사가 되었다. 그녀는 통영중학교를  나오고 마산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간호사를 지원하여 독일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다. 

 

통영의 딸, 신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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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여중학교 다닐 때 그의 선생님은 신숙자가  "명랑하며 친절성이 있으며 근로심이 강하다, 타학우의 모범이 되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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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일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한인 파티에서 오길남을 만나게 된다. 오길남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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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인파티에서 항시 주방에서 설겆이 하는 것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봉사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이러한 그녀에게 오길남은 매력을 갖고 접근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아이를 갖게 되었으며 나름대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아이들은 독일에서 행복하게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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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남

그러나 신숙자는 몸이 아팠으며, 그것이 늘 오길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길남은 반독재체제 운동을 하여 한국에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 독일에 망명을 한 상태였다. 

 

그는 반정부인사이면서 친북인사인 윤이상과 송두율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북한에서 교수를 할 수 있다는 것과 아내의 병을 고쳐준다는 제의를 받고 아내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1985년 북한으로 입국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북한에 가보니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고, 그는 교수는 커녕 대남간첩활동을 하기 위한 간첩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나는 입국하기 전 북한이 이 지경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북한은 온통 김일성 주체 사상 일색이었다. 거기에 경제 이론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먹힐 리 없었다.

 

그야말로 북한은 사이비종교의 광신적인 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위장된 구국의 소리 앵무새 방송요원이었고 급기야는 대남공작원이 된 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수모였다. 내가 대남공작원의 하수가 되다니"

 

아내의 병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러다 보니 안정된 직업과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혹에 빠져 북한공작원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북한에서 그의 임무는 또다른 유학생을 포섭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1986년 11월 포섭하기 위하여 그는 독일로 파송을 받게 된다.    

 

  

 

신숙자의 마지막 언어

 

그러자 1986년 11월 4일 월요일 아내가 오길남에게 말을 한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밖으로 나가 어떻게든 식구들을 빼네세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교통사고로 식구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혜원이와 규원이는 어직 어리니까 이 사회에 어쩌면 적응을 할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도망친다고 해도 이들이 우리를 죽이는 않을 거에요. 그리고 술을 적당히 마시세요.

 

당신이 만일 내말을 흘려듣고 공작원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이 곳으로 끌어들인다면 우리는 정말 아직 구제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 명심하세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돌아오지 마세요. 우리는 죽어도 좋으니 더럽게 살지 마세요. 이럴려고 박사가 된게 아니잖아요"(잃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155)

 

"누구나 서 있는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모색하고 지향하는 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나는 당신이 우리를 이 곳으로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어떤 백치도 어떤 눈먼 장님도 저지르지 않을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 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순한 사람들을 음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역할을 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돼요....이렇게 살려면 애들과 함께 죽겠어요.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줘요.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혜원 아빠, 당신 떳떳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야 해요.

 

옰가미에 씌여서 이러저리 끌려 다녀서는 한이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가서 석달안에 우리를 이 곳에서 빼네 주세요.

 

그렇게 안될 때 우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 제발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못난 사람처럼 눈물흘리지 말아요.

 

나와 혜원이 규원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맛헤요. 우리의 몸은 이 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속에 있어요.

 

청순한 젊은이 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 곳으로 유인돼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에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에요. 그 범죄 공모에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돼요. 도망치세요.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요" (165-66) 

 

탈출에 성공한 오길남

  

 

그 이후 그는 독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그 이후 북한을 자주 넘나들었던 윤이상에게 가족 구출의 도움을 받고자 여러번 찾아갔지만 윤이상은 입북하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그것이 가족을 살리라는 길이라는 것.

 

윤이상은 가족을 살리는 길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북한에서는 당신의 잘못을 관용으로 용서할 의향이 있다고 했소, 가족을 생각해서 다시 평양으로 가시오" 

 

통영의 아들, 윤이상 

 

통영의 딸은 반북한이지만 통영의 아들은 친북한이었다. 오길남은 통영의 아들 윤이상이 자신을 만나자고 한 것은 자신을 북한으로 다시 입북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이상은 김일성과 친하게 지냈기때문에 윤이상의 힘이라면 가족을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 집 드나들듯이 북한을 왕래하곤 하였다. 그는 김일성과 담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함께 통일의 손을 잡기도 했다. 통영의 딸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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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윤이상음악회가 38번씩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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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북한에 드나들면서  음악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1995년에 떠난 이후에도 북한은 윤이상 음악회를 계속해서 열었다. 그는 통영의 아들이지만 친북한 음악을 계속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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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은 김일성을 찬양했고 북한은 윤이상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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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통영의 아들 윤이상

 

윤이상의 친북활동의 연고로 인해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대법원은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 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반국가단체 활동을 하였다고 판단했다. 윤이상은 정치적 탄압이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탄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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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법 제5조 제1항 소정의 회합, 통신, 금품 수수 등 죄의 성립에 있어, 그 상대방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이면 되는 것이고, 범죄의 주체에 관하여 반국가단체의 비구성원이거나, 지령을 받지 아니한 자임을 요건으로 한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 상호간에 위와 같은 행위를 한 경우에도 이 죄가 성립한다고 할 것이다.

(출처 : 대법원 1968. 7. 30. 선고 68도754 판결 [국가보안법위반·반공법위반·간첩·동미수·외국환관리법위반] > 종합법률정보 판례)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독일 음악인들의 로비활동으로 2년만 형을 살고 방면된다. 이 당시 군사정부는 독일에 많은 근로자를 파독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일 음악인들의 청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윤이상, 가족을 살리는 길은 북한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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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윤이상은 북한과 가까웠기 때문에 오길남은 윤이상에게 가족탈출을 도와달라고 청을 했다. 그러나 이미 친북한인사가 되었던 윤이상은 계속 북한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윤이상은 "나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소. 그러나 당신은 애타는 내 충정은 손톱만큼도 몰라주고 있소. 이제 끝났소. 나가시오! 당신은 배은망덕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오. 당신 좋을대로 하시오,

 

가족을 내보내면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가버릴 위험성이 있어서 가족은 못보내주겠소. 허담도 말했듯이 당신은 조선내부 사정을 들여다 보고 연락소 비밀을 빼내 가지고 달아났소.

 

당신은 미제 고용간첩이나 다름없소. 당신이 미제 고용간첩이 아니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가야 하오, 다시 한번 충고하겠는데 돌아기시오,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은 인질로 잡혀 있을 수 밖에 없소.

 

그리고 경솔한 짓을 하면 당신 가족이 어떻게 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더이상 당신을 보고 싶지 않소. 나가시오!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야 할 것은 양심이오!"라고 했다.(262)

 

요덕수용소의 통영의 딸 신숙자

 

결국 돌아가지 않자, 가족들은 요덕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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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덕수용소에 있는 가족들의 상황이 탈북한 사람들에 의하여 알려졌다. 안혁이라는 사람은 요덕리스트에서 신숙자를 언급하고 있다. 

 

통영의 딸의 자살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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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출신 간호사

 

관리소 구역중에서도 제일 먹을 것이 없고 제일 살기 힘든 곳이 대숙지구이다. 이 곳은 완전히 산 속에 있어 산이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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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자살시도

 

그 아주머니는 자꾸 자살을 시도하여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고 적고 있다. 그 날 새벽녘에 독신자 숙소에서 20미터 거리에 있는 가족숙소에서 자지러 지는 여자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간밤에 목놓아 울던 신 아주머니의 울음소리와는 뭔가 다른 절박한 울음소리였다.   

 

나는 독신자 몇명과 함께 신 아주머니네 집으로 달려갔다.

 

"우리 엄마좀 살려주세요!" 

 

방문을 열어젖히자 이불보를 말아 만든 끈으로 신 아주머니가 목을 매달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어린 두 딸이 어머니의 다리를 잡고 어쩔줄을 몰라 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끈을 풀고 아주머니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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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자살시도

 

또 한번은 병원 위쪽에서 부식토 생산을 하고 있는데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사람살려요'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신아주머니집이었다. 뛰어서 내려가니 아주머니를 지키던 여자가 얼굴이 새파래져 소리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안으로 잠겨있어 문을 부수어야만 했다. 판자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니 방안은 연기와 불 길로 가득차 있었다. 

 

아주머니가 마른 나무를 모아놓고 불을 지른  채 두 딸을 안고 불에 타 죽겠노라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우리가 불붙은 나뭇가지부터 정신없이 밖으로 끌어내고 그 세모녀를 끌어내려 하자 신 아주머니는 안 나가겠다고 몸부림쳤다. 놓아주세요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나아요. 죽게 내버려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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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들을 봐서도 그러시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달랬다. 그 일이 있고 1개월 동안 아주머니는 특별감시 대상으로 지목받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격리 수용되는 고통을 겪었다.

 

아주머니는 서울서 살다가 서독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그 곳에서 한국 유학생을 만나 두 딸을 낳고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월북하자, 그를 따라 북으로 왔는데 남편이 없어진 지 3개월만에 이 곳으로 잡혀 왔다고 했다.  

 

아주머니의 이름은 신숙자였는데 남조선에 와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독일주재 우리 대사관을 통해 귀순한 경제학박사 오길남씨의 부인과 그 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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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치범 수용소

 

한 인권단체가 경상대학교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를 하면서 신숙자 모녀 사진이 전시된 것으로 인해 통영사람 신숙자구명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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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현대교회 방수열목사가 '통영의 딸 신숙자모녀 구출운동'을 하게 된다.

 

 

 

 


방수열목사는 오길남박사가 독일로 망명한 독일인이기 때문에 윤이상이 아니라 독일정부에 하소연 해야 했다고 말한다. 결국 이러한 운동이 유엔까지 알렸다고 했다. 

 

그러나 통영의 시민들과는 달리 통영의 아들 윤이상이 통영의 딸 신숙자를 구출하는데 협조하지 않았다. 그의 영역밖이었는지도 모른다.

 

방수열목사는 신숙자를 구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북한이 유엔을 의식해서 신숙자의 사망소식을 알려와  사실확인 차원에서 의미는 있었다고 했다.

 

신숙자는 201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고 답이 왔다. 신숙자의 딸들은 지금은 약 40세가 되어 평양 인근지역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친북적인 천재적인 음악가, 윤이상

 

윤이상은 친김일성적, 친북적이지만 독일에서 천재적인 음악가였음은 분명했다. 1988년 그는 독일 연방공화국으로 부터 대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념은 주사파적이었는데 음악은 천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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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20개 넘는 곡을 작성하기도 했다. 주로 동서양의 음악을 혼합한 현대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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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는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기도 했다.

 

 

92년 국가안전기획부가 발간한 <入北자수간첩 오길남 사건내용>이라는 수사결과에서 “윤이상은 북한의 정치노선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문재인정부에서 윤이상은 찬양받을 존재로 부각했다. 김정숙여사는 한국에서 동백나무를 독일에까지 이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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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아들 윤이상의 유해와 동백나무는 다시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독일 베를린 공원묘지에 묻혔던 윤이상의 유해를 사후 23년 만인 지난 2018년 통영으로 이장했다.

 

통영의 아들은 독일에서 통영으로 왔지만 통영의 딸은 통영의 아들이 구하지 못하여 여전히 북한에 묻혀있다.  통영의 아들은 친북한, 통영의 딸은 반북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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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우파들의 시각으로는 통영의 아들은 북한의 문화공작원이고, 좌파들의 시각은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의성의 아들 전광훈목사는 부산의 아들 문재인과 통영의 아들 윤이상도 간첩으로 보고 있다.

 

 

정권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간첩이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한다. 1967년 법원은 통영의 아들에 대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라고 판단했다.

 

반공법 제5조 제1항 소정의 회합, 통신, 금품 수수 등 죄의 성립에 있어, 그 상대방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그 지령을 받은 자이면 되는 것이고, 범죄의 주체에 관하여 반국가단체의 비구성원이거나, 지령을 받지 아니한 자임을 요건으로 한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 상호간에 위와 같은 행위를 한 경우에도 이 죄가 성립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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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의자 swoong3458@naver.com 22/09/09 [11:33]
종북 주사파 척결하여 대한민국 바로 세우자.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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