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신숙자는 몸이 아팠으며, 그것이 늘 오길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길남은 반독재체제 운동을 하여 한국에 들어가기 어렵게 되어 독일에 망명을 한 상태였다.
그는 반정부인사이면서 친북인사인 윤이상과 송두율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북한에서 교수를 할 수 있다는 것과 아내의 병을 고쳐준다는 제의를 받고 아내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1985년 북한으로 입국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북한에 가보니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고, 그는 교수는 커녕 대남간첩활동을 하기 위한 간첩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나는 입국하기 전 북한이 이 지경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북한은 온통 김일성 주체 사상 일색이었다. 거기에 경제 이론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먹힐 리 없었다.
그야말로 북한은 사이비종교의 광신적인 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위장된 구국의 소리 앵무새 방송요원이었고 급기야는 대남공작원이 된 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수모였다. 내가 대남공작원의 하수가 되다니"
아내의 병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러다 보니 안정된 직업과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혹에 빠져 북한공작원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북한에서 그의 임무는 또다른 유학생을 포섭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1986년 11월 포섭하기 위하여 그는 독일로 파송을 받게 된다.
신숙자의 마지막 언어
그러자 1986년 11월 4일 월요일 아내가 오길남에게 말을 한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밖으로 나가 어떻게든 식구들을 빼네세요. 그렇게 하지 못하면 교통사고로 식구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혜원이와 규원이는 어직 어리니까 이 사회에 어쩌면 적응을 할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도망친다고 해도 이들이 우리를 죽이는 않을 거에요. 그리고 술을 적당히 마시세요.
당신이 만일 내말을 흘려듣고 공작원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이 곳으로 끌어들인다면 우리는 정말 아직 구제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 명심하세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돌아오지 마세요. 우리는 죽어도 좋으니 더럽게 살지 마세요. 이럴려고 박사가 된게 아니잖아요"(잃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155)
"누구나 서 있는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모색하고 지향하는 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나는 당신이 우리를 이 곳으로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어떤 백치도 어떤 눈먼 장님도 저지르지 않을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 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순한 사람들을 음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역할을 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돼요....이렇게 살려면 애들과 함께 죽겠어요.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줘요.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혜원 아빠, 당신 떳떳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야 해요.
옰가미에 씌여서 이러저리 끌려 다녀서는 한이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가서 석달안에 우리를 이 곳에서 빼네 주세요.
그렇게 안될 때 우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 제발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못난 사람처럼 눈물흘리지 말아요.
나와 혜원이 규원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맛헤요. 우리의 몸은 이 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속에 있어요.
청순한 젊은이 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 곳으로 유인돼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에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에요. 그 범죄 공모에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돼요. 도망치세요.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요" (165-66)
탈출에 성공한 오길남
그 이후 그는 독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그 이후 북한을 자주 넘나들었던 윤이상에게 가족 구출의 도움을 받고자 여러번 찾아갔지만 윤이상은 입북하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그것이 가족을 살리라는 길이라는 것.
윤이상은 가족을 살리는 길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북한에서는 당신의 잘못을 관용으로 용서할 의향이 있다고 했소, 가족을 생각해서 다시 평양으로 가시오"
통영의 아들, 윤이상
통영의 딸은 반북한이지만 통영의 아들은 친북한이었다. 오길남은 통영의 아들 윤이상이 자신을 만나자고 한 것은 자신을 북한으로 다시 입북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이상은 김일성과 친하게 지냈기때문에 윤이상의 힘이라면 가족을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 집 드나들듯이 북한을 왕래하곤 하였다. 그는 김일성과 담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함께 통일의 손을 잡기도 했다. 통영의 딸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반공법 제5조 제1항 소정의 회합, 통신, 금품 수수 등 죄의 성립에 있어, 그 상대방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이면 되는 것이고, 범죄의 주체에 관하여 반국가단체의 비구성원이거나, 지령을 받지 아니한 자임을 요건으로 한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 상호간에 위와 같은 행위를 한 경우에도 이 죄가 성립한다고 할 것이다.
(출처 : 대법원 1968. 7. 30. 선고 68도754 판결 [국가보안법위반·반공법위반·간첩·동미수·외국환관리법위반] > 종합법률정보 판례)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독일 음악인들의 로비활동으로 2년만 형을 살고 방면된다. 이 당시 군사정부는 독일에 많은 근로자를 파독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일 음악인들의 청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또 한번은 병원 위쪽에서 부식토 생산을 하고 있는데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사람살려요'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신아주머니집이었다. 뛰어서 내려가니 아주머니를 지키던 여자가 얼굴이 새파래져 소리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안으로 잠겨있어 문을 부수어야만 했다. 판자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니 방안은 연기와 불 길로 가득차 있었다.
아주머니가 마른 나무를 모아놓고 불을 지른 채 두 딸을 안고 불에 타 죽겠노라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우리가 불붙은 나뭇가지부터 정신없이 밖으로 끌어내고 그 세모녀를 끌어내려 하자 신 아주머니는 안 나가겠다고 몸부림쳤다. 놓아주세요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나아요. 죽게 내버려 두세요.
보수우파들의 시각으로는 통영의 아들은 북한의 문화공작원이고, 좌파들의 시각은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의성의 아들 전광훈목사는 부산의 아들 문재인과 통영의 아들 윤이상도 간첩으로 보고 있다.
정권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간첩이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한다. 1967년 법원은 통영의 아들에 대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라고 판단했다.
반공법 제5조 제1항 소정의 회합, 통신, 금품 수수 등 죄의 성립에 있어, 그 상대방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그 지령을 받은 자이면 되는 것이고, 범죄의 주체에 관하여 반국가단체의 비구성원이거나, 지령을 받지 아니한 자임을 요건으로 한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 상호간에 위와 같은 행위를 한 경우에도 이 죄가 성립한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