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안동편2)

편집인 | 입력 : 2021/06/12 [06:27] | 조회수: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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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는 경주와 안동의 두문화권으로 구분된다. 경주는 신라10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문화권이고, 안동은 불교문화의 바탕위에서 유교의 문화권이 형성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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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있지만 안동에 가면 서원문화가 발달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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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고려 신종7년 대도호부로 승격된 이래 조선시대 경주 다음의 대읍이었고 경상도의 감영이 설치된 곳이다. 일제 강점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동부와 예안군으로 되어있던 안동은 통합되어 20개 면, 194개 동리로 재편되었다.

 

1917년 안동의 인구는 139,329로서 약 14만명이었다. 이로인해 중앙파견 관리와 아전들이 머물던 읍성지역이 점차 도시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로인해 근대적 행정기관과 교육기관, 종교시절들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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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준공된 안동교회

 

안동은 유교지역으로서 유림의 성격이 특히 강했고, 유림은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중앙정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특히 퇴계학맥으로 조선시대의 정신문화를 주름잡은 곳이기도 하다. 안동의 유교문화는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우뚝서 있다.   

 

이러한 안동의 지리적 여건은 서북쪽에 백두대간의 정맥인 소백산맥이 위치해 있고 소백산은 낙동강을 발원하고 있다. 안동이라 할 때 소백산과 낙동강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소백산맥 낙동강 발원지

 

소백산맥을 통해 발원되는 낙동강 지류의 풍부한 수량은 안동지역 농천의 자립적 기반을 만들기도 했지만 넓은 평야가 없다 보니 논농사에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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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문화권은 낙동강의 지류로 인해 죽령과 조령을 통해서 강원지역이나 충청 경기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안동문화권은 교통운송만이나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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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으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던 상주지역과 달리 안동지역은 농업 생산량이 낮았다. 산이 많은데다가 평야가 적었고, 교통이 불편했고, 산업이 발전하기에 지리적 약점이 있었다. 

 

개화이후 철도가 생겼고 박정희 정권때 경부선이 개통되었지만 대구, 부산이 중심지가 되고, 경상도 북부지역은 소외되었다. 바다가 없다보니 공단하나 없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안동은 소금을 많이 뿌린 고등어, 찜닭이외에 농경민족으로서 특별한 음식문화가 별로 없다. 

 

안동지역에는 '만석꾼'이라는 호칭이 없을 정도로 대지주가 없었다. 안동은 토지는 적은데 양반지주는 많기 때문에 근검절약할 수 밖에 없었다. 

 

안동의 근검절약의 생활은 조선조 세종 때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고, 성종 때에는 [안동풍속]이란  책자를 간행하여 근검절약의 본보기로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국의 정신문화의 중심지이다보니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러므로 삼강오륜의 가치는 있어도 자유, 평등의 가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의 모든 가치는 삼강오륜에 의해 판단되고 그 이외의 것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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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 선교사로 일했던 웰번(Welbon)은 안동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안동지방은 교통의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국내외 정세에 어둡고 보수중의 보수이며 지도층의 사람들은 일반 서민들에 관한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다만 그들을 무지에 붙들어 두고 노예로 부려먹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   

 

유교의 수직정신을 그대로 말해준다. 사회는 양반을 우선시 하는 지도자계급이 수직을 이루고 있었고, 일반 서민은 지도자급을 옹호하고 섬기는 것을 당연지사로 알았다. 선교사가 보았을 때 야만의 사회였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구미 각국에 가본즉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야만은 아니었다"고 하여 삼강오륜적 시각은 우물안의 개구리적 시각이었다. 오히려 서구의 선교사들이 보기에 자유와 평등, 인권이 없는 유교의 삼강오륜사회가 야만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안동에는 책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경기도 여주사람 이중환의 택지리지에 의하면 궁벽한 마을에도 집집마다 책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듯이 학문은 크게 발달하였다. 주세붕, 안향, 이퇴계, 유성룡의 영향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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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인 영향으로 인해 고려말부터 안동지역에서는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이들의 학문적인 기초는 조선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기반이 되었고, 유교중심인 안동문화권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정도전과 권근은 성리학적인 이념에 입각하여 조선왕조를 설립했고,승 일연은 인각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고, 안향은 영주에 거처하면서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하고 성리학을 익혔으며, 길재는 고려의 멸망과 함계 구미 금오선에서 성리학을 전파하는데 일조했다.

 

길재의 학문은 제자 김숙자를 통해 김종직, 이언적 등을 거치면서 조선의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이념으로 기여했고, 퇴계 이황에 이르면서 성리학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안동의 성리학은 이조 500년 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의 정신사를 점령하였다. 지금까지 한국사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남의 성리학은 곧 안동의 성리학이었다.     

 

훗날 유교적인 영향은 기독교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 많은 유림들이 예수를 믿어 일부는 목사가 되기도 하고, 일부는 학자가 되기도 했다. 

 

책읽고 공부하는 습관은 기독교계로 보았을 때, 전성천, 이종성, 이상현, 이상근, 김영길 박사 같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는 유림들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불행하게도 호남에는 기독교적으로 남을만한 학자들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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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호남은 풍요롭기 때문에 문학을 대단치 않게 여기고 과거시험도 경상도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고 하고 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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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의 말에 의하면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풍요롭게 살았고 잘 살았기 때문에 계집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며 사람이 경박하고 간사하여 문학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목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문인 박화성같은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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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롭다 보니 굳이 과거에 급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정여립 사건으로 인해 호남은 차별을 받아 과거시험을 치루어도 합격이 제한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호남에는 이황과 비견될만한 기대승이 있었다. 기대승은 이황의 학설을 초월했다.  

 

안동의 이황과 광주의 기대승

 

안동에 문인으로서 퇴계가 있다면 광주에는 퇴계의 이기이원론의 학설을 이기일원론으로 교정시킨 기호학파의 기대승이 있었다.

 

기호학파는 서화담, 이율곡을 중심으로 한 경험론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이다. 기대승은 성리학의 거봉이었다.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총명했던 기대승은 7~8세의 어린 나이에 소학과 효경을 떼고, 23세 때 사마시에 응시하여 진사·생원의 양과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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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가 되던 1558년에 식년 문과 을과(文科乙生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홍문관 부수찬겸 검토관이 되어서는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장통합교단은 특정인을 공격하면 이단옹호언론이라고 하여 언론을 묶어 두었다.

 

기대승은 1558년 서울로 올라와 평소 흠모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집을 방문했다. 두 사람의 지위와 신분 지역 차이는 컸다. 당시 퇴계는 58세로 학문으로는 현인의 경지에 이른 ‘성균관 대사성’, 지금으로 보면 서울대학교 총장이었다.

 

반면, 32세의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초급 관료였다. 그러나 퇴계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학문성을 논하는데 기쁨을 느껴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과 26세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열린 마음으로 고봉을 논쟁의 상대로 받아들였다.

 

퇴계는 "사단(인의예지)은 이(理)가 발함에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희노애구애오욕)은 기가 발함에 이가 따르는 것"으로 “사단과 칠정은 서로 다르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반면, 고봉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정(情)이다”라고 하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며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반박했다.

 

기대승은 모든 만물은 이와 기가 함께 있는 것인데 4단을 이가 드러난 것이며, 7정을 기가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면 4단에는 기가 없게 되고 7정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는 진리이므로 운동성을 가질 수 없고 정은 반대로 운동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발은 옳지않고, 4단이든, 7정이든 감정의 움직임은 기의 움직임에서 나온다고 했다.  

 

결국 퇴계는 어린 풋내기 학자의 말을 듣고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올라탄 것이다"라며 수정하고 말았다.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지만 이가 올라탔다고 하여 이와 기를 분리하지 않았다.

 

사단칠정에서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이기일원론의 일종인 이기호발론을 주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7가지 정은 현실에 부닥치면서 생겨난 것이지만 도와 법칙이 그 위에 올라탄 것이라고 하여 이치만 갖고서 현상을 해석하는데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에 법칙이 올라탔다고 하여 현상에 법칙도 영향을 준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과 기를 분리하지 않았다.  

 

즉 인의예지라는 사단은 법칙이 발하여 현상이 따른 것이고, 7가지의 정서는 현상이 먼저 발하여 법칙이 올라탄 것이라고 하였다. 감정의 중립성을 띠는 희노애구애오욕이 발하기 위해서 단지 경험만이 아니라 법칙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와 기가 함께 정서에 영향을 끼치는 이기호발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하여 기존의 이기이원론을 대폭 수정했다. 기대승의 이론을 대폭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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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퇴계는 4단과 7정에 이와 기가 함께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7정도 선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기대승은 끝까지 퇴계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퇴계가 벼슬을 마치고 고향 안동으로 떠날 때, 고봉은 한강의 배 위에서 ‘퇴계 선생을 보내며’라는 시를 썼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는데/ 선생님의 이번 떠나심 어찌하면 만류할꼬/ 백사장가 닻줄 잡고 머뭇거리는 곳에/ 이별의 아픔에 만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퇴계도 고봉의 시에 화답시를 지어 학자들간의 정을 나누었다. 

 

배에 나란히 앉았으니 모두 다 좋은 사람/ 돌아가려는 마음 종일 끌리어 머물렀네/ 한강물 다 가져다 행인의 벼루에 더하여/ 이별의 무한한 시를 써내고 싶어라

 

끝까지 남의 입장을 존중해주는 퇴계의 위대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계는 자신과 다르면 모두 이단이다. 학문이 성숙하지 못해서이다. 이처럼 영남(안동)에 퇴계가 있었다면 호남(광주)에는 기대승이 있었다.

 

안동은 유학만을 이론적으로 익한 것이 아니었다. 임진란 때 관군이 도처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을 때, 유생들이 의연히 일어나 왜적을 무찌르기도 했다. 

 

한일 합방이후 광복회를 조직한 것도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의 인사들이 많았다.  유교의 사상에 충효정신이 있기 때문에 영남사람들은 국가가 위기에 있을 때는 유교의 충효사상을 발휘하여 국가를 지키는데 앞장을 섰다.

 

대체로 경상도 사람들은 호남사람들에 비해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다녔지만 안동지역 사람들은 더욱 심했다. 선비정신에 따라 경거망동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동지역과 기독교

 

안동지역이란 안동군을 중심으로 영주군, 봉화군, 영양군 청송군, 의성군, 예천군, 문경군을 말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중기 정권을 잠시 잡았던 남인세력이 300년동안 묻혀서 지냈던 야당지역이었다. 이들의 선비적 자존심은 "대추, 한개 먹고 요기한다", "열끼 굶어도 내색을 안한다"는 체면문화를 우선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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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기독교를 만났을 때

 

그러나 이들이 기독교를 접했을 때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읍내에 나갔다가 선교사나 조사들이 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 믿는 사람들, 3.1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잡혀가 그 안에서 기독고 애국지사를 만나 복음을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한 기독교의 선교는 폭발적이었다. 

 

이원영, 이광호목사는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영남이 예수를 알게되었을 때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유림들이 기독교를 접촉했을 때, 유교는 더이상 사회를 지탱하는 목적이 아니라 근대화를 가져다 주는 기독교를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했다.  

 

1899년 대구에 선교부가 설치되었을 때 안동지역은 그 선교부의 일부였고, 1902년 안동지역을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는 아담스(J.A Adams)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지역은 한국 최고의 양반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지방의 하나이다. 다만 이 지역에서 이미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얼마 전 나의 대구 집까지 방문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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