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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인 입양아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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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고려인 입양인들은 1953년부터 2022년까지 249,959명이었다.
1953년부터 2022년까지 약 25만 명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해외로 입양되었다.
1937년에는 연해주에 있었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약 17만명이 강제로 이주되었듯이 말이다.
고려인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다른 나라로 이주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느나라로 가는지도 모르고 비행기에 태워졌다.
대한민국의 입양이 본젹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6.25가 끝난 1953년부터 먼저는 동두천 같은 기지촌에서 미군인들과 한인 여성간의 관계를 통해 태어난 혼혈아 등을 통해서이다.
당시 사회는 혼혈인을 장애의 한 유형으로 분류했다.
권희정 미혼모 아카이빙과 권익옹호연구소 소장은 “1954년 미국 국무성은 한국 내 ‘혼혈’ 아동 전원을 미국으로 이주시킬 방침을 밝혔으며, 같은 해 이승만 정부는 이를 추진하기 위해 한국 아동 양호회를 설립했다”면서 “해외 입양이 시작된 지 불과 6년 만에 4천 명이 넘는 ‘혼혈’ 아동들이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야 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어머니가 양육하고 있던 아이들”이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잘 아는 연예인 윤수일과 인순이는 혼혈아동출신이다. 윤수일은 1955년생이고, 인순이는 1957년생이다. 한인여성들과 미군들의 혼혈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입양되지 않고 대한민국에 남아서 성공한 케이스이다.
흑인과 한인 사이에 난 혼혈아 딸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25년만에 한국의 어머니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 이후 한국의 본격적인 입양은 1955년 해리 홀트(Harry Holt) 에 기인한다. 해리 홀트는 한국의 아이들을 돕고 싶어 한국에서 8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고국으로 데려왔다.
해리 홀트(1905~1964)가 이 운동을 상징했다. 당시는 전쟁고아가 너무나도 많았다.
“홀트는 한국계 지아이(GI) 베이비(혼혈아) 입양을 선교활동으로 여겼고, 나아가 미국인으로서 인종에 대한 조국의 관대함을 증명하고 세계 곳곳에서 신생 독립국의 충성을 얻는 조국의 냉전 활동에 참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홀트는 입양에 ‘혁신’을 가져왔다. 하나는 양부모가 한국에 오지 않아도 되는 ‘대리 입양’이었고, 또 하나는 전세기를 이용한 대규모 수송이었다.
입양 과정은 빨라졌고, 비용도 절감됐다.
홀트는 오리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목재상과 제재소도 경영하여 재산을 많이 쌓았다. 은퇴하면 좋은 요트를 사서 여생을 보낼 꿈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처럼 살아난 그는 대한민국 6·25 전쟁고아들의 참상이 담긴 영상을 보게 되면서 한국에 와서 8명의 전쟁고아를 입양하여 데려갔다.
홀트는 이 8명의 아이들을 입양한 후 전국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얻은 반응에 힘입어 한국 아이들을 위한 가정을 찾아주는 데 특화된 미국 기반의 입양 기관인 홀트 국제 아동 서비스(Holt International Children's Services)를 설립했다.
홀트 아동복지를 통하여 한국의 아이들은 전세계로 입양되어 나갔다. 지금까지 약 20만명이 아이들의 의도와 달리 강제이주되었다.
20만명 중에 대부분은 미국, 프랑스, 스웨덴, 캐나다 등이다. 대부분 70%는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약 9개국으로 입양되었다.
노르웨이도 많은 아이들이 입양되었다. 이 외에도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호주, 캐나다 등의 서구권 국가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입양의 제한
처음에 서구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청지기적인 자세를 갖고 복지차원에서 아이를 입양하였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대행기관의 온갖 탈법이 자행되고, 아이들을 돈으로 취급하고, 서류를 위조하고, 입양부모의 탈선과 폭력, 아동성학대와 인권차별이 문제가 되면서 국제입양은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버림받은 입양인들
해외로 입양된 많은 입양인들이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다.
프링스로 입양간 한 여성은 소아성장애자에게 입양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서류를 꾸며 가짜 고아로 만들어서 입양보냈다고 했다. 한국에 부모가 있다면 서류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에 서류를 고아라고 위조하여 입양을 보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한국을 떠난 순간 자신의 한 부분이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 남성은 시민권도 얻지 못하고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한국으로 추방되었지만 한국말을 할 수가 없었다.
쌍동이 자매는 양부모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가정을 뛰쳐나와 거리의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SBS는 쌍둥이 노숙자를 방영하기도 했다.
쌍동이의 아버지는 아들대신 두 딸들을 입양보냈다.
스웨덴 입양아를 주제로 한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당사자인 신유숙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구의숙 분도 입양생활은 너무나도 외로웠다고 했다.
대행기관의 탈법과 국가의 묵인
이경은 서울대 국제법 박사는 고아 호적 제도가 유기된 아동 보호를 목적으로 시작됐으나, 입양 기관들이 이를 악용하고 국가는 이를 묵인하며 불법과 탈법이 자행됐다고 전했다.
신필식 해외입양 연구자는국가가 해외입양에 대한 제도적 절차를 만들어 놓고, 실제 수행은 입양기관이 담당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서로의 책임을 전가하는 관계가 오래 유지됐다"는 것이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스웨덴은 1970년대부터 세계 수십여 개국으로부터 약 6만명의 아동을 입양해 왔다. 그 중 한국의 입양은 약 9,00명에 달한다. '수잔브링크 아리랑'으로 스웨덴 입양의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1991년에 상영된 이 영화는 입양아의 슬픈 이야기이다. 입양 흑역사의 한 단면이다. 1963년에 태어난 신유숙은 1966년에 스웨덴에 입양돼 낯선 환경 속에서 생활하다 1989년 한 TV의 입양아 프로그램으로 어머니를 찾으면서 기나긴 방황을 끝내고 자아를 되찾았다.
그녀는 2003년 기고문에서 “아이를 외국에 보내지 마세요, 많은 입양아가 외모로 고통받고 실업률이 매우 높아 어려운 생활을 한다”라고 말했다.
스웨덴의 국제 입양
스웨덴의 국제입양은 1970~1980년대에 절정을 이루며 195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8937명), 인도(6969명), 콜롬비아(5498명), 중국(4166명) 등 100개국이 넘는 나라들로부터 약 6만 명을 입양했는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입양아를 받아들였다.
스웨덴은 1960년대 이후 전쟁이나 빈곤으로 고통받는 해외 아동을 돕는 것이 선진 복지 국가의 도덕적 의무라고 여겼다. 아이를 가정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아동 중심 복지 철학이 강했습니다.
대한민국은 2012년 해외 입양의 문제점을 알고 2012년 입양법을 제정하여 우선적으로 국내입양을 추진하고 부득불 어려울 경우 국제 입양을 추진한다고 되어 있다.
"제7조(국내입양 우선 추진) 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양자가 될 아동의 양부모가 될 사람을 국내에서 찾기 위한 정책을 최우선적으로 시행하여야 한다"고 했다.
② 보건복지부장관은 제1항에 따른 국내입양을 위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양자가 될 아동에게 적합한 양부모가 될 사람을 찾지 못한 경우 「국제입양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제입양을 추진할 수 있다.
2024년에는 해외입양이 54명에 불과하다. 현저히 줄었다. (계속)
전기공학박사, 고려인 한만춘을 아시나요? 고려인삼은 독립과 신앙의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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