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삼은 독립과 신앙의 뿌리였다

인삼, 상도 임상옥, 신앙의 뿌리 인삼장사들

편집인 | 입력 : 2026/07/20 [05:01] | 조회수: 120

1. 인삼

 

하나님이 세째날 창조한 초목 중에 가장 비싼 식물 중의 하나가 산삼아니면 인삼일 것이다. 산삼을 뽑아서 집에서 양식한 것이 인삼이다.

 

한민족은 바닷가에 기름은 나지 않지만 땅의 값싼 규소를 활용하여 반도체를 만들고, 땅 속의 산삼을 발견하여 인삼으로 양식하는 기술이 있었다. 우리민족은 규소와 인삼갖고 먹고 사는 민족이다.

 

하나님은 세째날 산삼을 창조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11-13)

 

"심봤다!!"에서의 심이 바로 산삼이다. 심이 중국으로 가서 삼으로 변한 것이다. 원래는 삼이 아니라 심이다. 희귀하다는 인식 때문에 값이 비싸고 실제로 사포닌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만병 통치약으로 쓰인다.  

 

  

 

 

한국인들이 머리가 좋은 것도 인삼을 많이 먹어서이다. 인삼은 뇌세포를 보호해 준다. 

 

 

 

  

 

인삼은 다양한 만병통치약이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식물이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미국, 캐나다가 인삼을 수출하고 있다. 
 

 

  

 

세계 인삼시장의 1위를 차지하는 것이 중국의 인삼이다. 

 

  

 

그러나 가공식품 1위는 대한민국이다. 

 

  

 

 

 

 

  

 

사포닌의 함량은 세계 1위,  항산화 활성 및 암세포 증식 억제

 

사포닌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32가지의 함량을 갖고 있다. 

 

사포닌(saponin)은 식물이나 일부 해양동물(예: 불가사리, 해삼) 등에 존재하는 '배당체' 성분의 총칭으로, 물에 녹이면 비누처럼 거품이 나는 특징을 가진 화합물이다.

 

사포닌은 라틴어 'sapo(비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주로 식물의 병충해 방어 및 생리활성물질로 작용한다. 대표적으로 인삼, 홍삼, 콩, 도라지, 더덕, 마늘, 양파 등 다양한 식물에 함유되어 있다.

 

고려인삼은 전분 등의 탄수화물이 60~70%로 많이 들어 있지만 다른 식물체에서 볼 수 없는 특이성분으로 인삼사포닌(ginsenoside), 폴리아세틸렌(polyacetylene), 항산화성 방향족화합물, 간장보호작용을 하는 고미신(gomisin-N,-A), 인슐린 유사 작용을 하는 산성펩티드 등이 들어있다.

 

특히 사포닌 물질의 주된 성분으로 항산화 활성 및 암세포 증식 억제 활성성분인 페놀성분 및 폴리아세틸렌 성분이 미국삼에 비해 고려인삼의 함유량이 많으므로 생리 활성도 강하다.

 

고려인삼의 사포닌 종류는 모두 30종으로 미국삼 14종, 중국삼 15종에 비해 월등히 많은 종류가 들어있다.

 

 

  

  

클린턴부터 세계 유명인사들도 인삼을 좋아한다. 

 

  


우리나라는 중국, 베트남, 홍콩, 미국, 중국, 타이완, 캐나다로 수출하고 있다. 

 

  

 

국내 대표 인삼재배지는 금산, 강화, 파주, 풍기, 진안이다.  

 

 

 



2. 상도 임상옥
 

작가 최인호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무역상으로, 인삼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실존인물 임상옥에 대해서 다룬 '상도'(商道)라는 책을 발간하여 약 500만부가 팔렸다.  

 

 

 

임상옥((林尙沃)은 조선시대 후기 국제무역계의 거상(巨商)으로 1779년(정조 3)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8세 때부터 부친을 따라 북경을 다니며 장사를 배우고 재산을 모았다. 그의 주무역업은 인삼이었다.

 

 

  

 

그는 정직과 나눔, 결단이라는 상도를 갖고 우리나라 최초로 국경지역에서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한 인물이다. 그가 활약하던 때는 인삼 무역의 황금기였다.

 

쇄국주의를 고수하던 조선왕조는 국경관문에 한해서 제한적이나마 무역시장을 열어 두었다. 임상옥은 중국어에 있어서 탁월했다. 연해주에서 상업으로 성공한 최재형도 러시아 언어에 뛰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1779년 천주교가 조선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했다.  

 

 

  

 

임상옥은 평안북도 일대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릴 때마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고, 만상(灣商) 시절, 가난한 백성들이 빌려 간 막대한 빚 문서를 불태워 빚을 탕감해주기도 했다.

 

국가에 가뭄이나 흉년이 들었을 때도 구호 자금을 기부했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평안도 구성부사 등의 벼슬을 제수 받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는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산속에 들어가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며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소유의 실천에는 
러시아에 최재형이 있었지만 조선에는 임상옥이 있었다. 두 명 공통적으로는 상도와 대한민국을 위한 정신력이 뛰어난 고려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물질에 욕심이 없었고 언어가 능통하며, 임상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최재형은 독립을 위해서 전재산을 기부하였다. 고려인들은 낯선나라에 가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무역에는 상도가 있었다. 장사를 하든, 목회를 하든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상도, 목회를 하는 사람은 목도가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항시 사람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거나 상식적인 도를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관대작은 우대하고 하찮은 사람은 무시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의 상도는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뜻의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이다. 

 

 

  

 

  

 

그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장사가 아닌, 사람을 남기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상생(相生)'의 철학을 실천했다.  임상옥은 노비에서 관직까지 얻고 죽을 때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 사람이다.  

 

임상옥은 의주에서 열일곱 살 때까지 아버지의 연경사행(燕京使行)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우는 한편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중국어도 배웠다. 북경(베이징) 장사꾼들의 은어와 시세 변동을 익히고, 열여덟 살이 되자 그는 인삼을 짊어지고 2000리 장삿길을 밟아 연경을 드나들었다.

 

임상옥이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빚때문에 노예가 된다. 

 

임상옥은 아버지의 빚더미로 노비가 되었지만 주인은 그를 활용하여 인삼 밀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임상옥은 훌륭한 성과를 내며 만상으로 부터 노비신분에 벗어나 적극적인 인삼장사를 하여 사업을 키워나갔다. 

 

그는 인삼 보따리를 챙겨 압록강을 넘어 중국에 내다팔곤했다.

 

 

 

 

최재형은 두만강을 건너서 거부가 되었고, 임상옥은 압록강을 건너 거부가 되었다. 모두 중국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지금도 거부가 되려면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 

 

임상옥은 1810년 순조 때에는 국경 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의주부가 위험해지자 홍경래군을 제압할 의병 모집 및 군수 물자를 살 자금을 제공했다. 

 

임상옥의 고향인 북한 의주는 대청(對淸) 무역의 통로로서 교역규모가 가장 컸다.

 

  

 

당시 대청무역의 주력상품은 인삼으로 맛과 향이 뛰어나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한국의 인삼의 효능을 알아본 중국인들은 인삼 주 고객이었다. 

 

임상옥은 오늘날 삼성이나 하이닉스처럼 국제무역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삼성이나 하이닉스는 임상옥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상옥은 냉혹한 승부사 기질로도 명성을 쌓았다. 그가 인삼을 팔러 북경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인삼독점을 시기하던 북경 상인들이 인삼불매 동맹을 맺어 거래를 끊어버렸다. 귀국할 무렵 그는 가지고 갔던 인삼 꾸러미를 마당에 쌓아 놓고 불을 질러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청나라 상인들은 임상옥에게 달려와 인삼을 팔라고 애걸복걸했다. 청나라 상인들은 10배나 치솟은 인삼 값을 치르고 사갔다. 아울러 임상옥은 상도의 화신으로 항상 겸손하고 신의를 지킬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mbc에서 2001년 10월 15-2002년 4월 2일까지 방영한 드라마에서 청나라 사람들 담합에 대해 헤쳐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드라마는 허준과 대장금을 기획한 이병훈이 연출하였다. 

 

 

임상옥은 상도가 있었다.  

  

“한 번 태어나면 한 번 꼭 죽는다. 삶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엄숙한 환희이며 가혹한 형벌임을 알고 상도를 가라. 큰 장사에서는 마땅히 걸어야 할 상인의 도가 있다. 이를 깨닫는 것은 저마다 절차탁마하기에 달렸다. 부닥치는 시비와 크고 작은 흥망성쇠는 상도에 따라서 천변만화한다. 그 길을 올바로 파악하면 사업은 순조로울 것이고, 상도를 잃으면 그의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고려인 인삼장사의 정신이 거부가 되게했고 그 거부를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다. 그의 재물은 바람에 날리는 초개와 같았다. 

  

3. 인삼장사, 독립과 인권, 교회의 뿌리

 

중남미까지 간 방사겸

 

인삼상인들은 인삼 팔아 조국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보태기 위해 중남미지역까지 갔다. 데이빗 방이라는 사람도 “아버지(방사겸)는 미국 뿐 아니라 쿠바·자메이카 등 중남미 지역에도 인삼을 팔러 다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들은 인삼 독립군이었다.

 

 

  

 

 

  

  

 

 

  

 

멕시코까지 간 박영순

 

인삼을 팔러 멕시코까지 흘러들어갔던 박영순도 대동보국회회 소속이자 상항감리교회 소속 교인이었다.

 

  

 

 

한 명의 기독교인이 멕시코 한인들의 삶을 보고 하와이 북미한인공립협회에 편지를 썼다. 

 

 

 

이러한 노예의 굴레속에 벗어나고자 일부 한인들은 탈주가 시도되었지만 이광준, 김용화 등 일부 사람들만 성공하고 대부분 감시병에 체포되어 숱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화병으로 죽거나 병들어 벌판에 버려지거나 매맞거나 자살해 죽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인삼장사 박영순의 편지 한 통이었다.    

 

 

 

박영순의 편지

 

 ‘…거짓말로 사람을 모아다 노예를 만들었는데, 근래에 또 이민을 모집한다는 말이 있으니 우리의 소식을 본국에 보내서 동포들이 다시 이곳에 오지 않도록 알려달라고 합니다.…이곳에 이민된 동포들은 낮이면 불같이 뜨거운 가시밭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일하고, 밤이면 토굴에 들어가 밤을 지새며 매일 품값으로 35전을 받으니 의복은 생각할 여지도 없고 겨우 죽이나 끓여서 연명할 뿐으로 그 처지가 농장 주인의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강제노동소문을 듣고 파송된 황사영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는 멕시코 강제노동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황사영씨를 멕시코에 파송하기도 했다. 

 

 

 

  

우상범 목사는 1967년 멕시코로 건너가 바로 그분들을 위해 그곳에서 6년동안 선교 활동을 하면서 멕시코 한인들로부터 황사영씨가 파송되어 세계 알려졌다고 했다.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 지방에 한국동포들이 많이 와서 지금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소문이 들려서 그때 미국에 있는 국민회에서 황사영씨로 기억되는데 그분하고 또한 분을 실제 파견한 일이 있습니다. '인삼장수가 말한 사실 그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들이 멕시코에 와서 실제 우리 동포들이 거기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다 조사해 가지고 돌아온 다음에 국민회에 보고함으로 인해서 이제 세계에 알려졌고 우리 나라 정부에서도 알게됐어요."

 

인삼장사 독립군 박영순은 캘리포니아 리들리에 잠들고 있다. 

 

  

 

  


이수정의 한 통의 편지가 미국에서 언더우드의 마음을 움직여 한국에 선교사로 온 것처럼, 교인 박영순의 한 통의 편지가 멕시코 한인들의 노예와 같은 삶을 전세계에 알린 것이다. 이 한 통의 편지로 사기 이민이 드러나 제2의 대국민이민사기극은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박영순의 묘를 찾아볼 필요성이 있다.

 

박영순도 이러한 사람 들 중의 하나였다. 즉 인삼 상인 독립군이었다.

박영순의 편지는 하와이를 거쳐 본국에 전달되었다. 정부는 한국주재 미국공사관의 통역이던 윤치호를 멕시코로 급파했다.

 

하와이에서 배멀미 때문에 멕시코 현지 조사를 포기하고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 연락해 멕시코 한인 노동자 실태를 파악하게 했다. 미주지역 한인들은 멕시코 한인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힘을 쓰면서 성금도 모았다.

 

이 소식이 멕시코에 알려지자, 참지 못한 한인 4명이 농장을 탈출해 1906년 9월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불법으로 입국하는 바람에 멕시코 정부와 미국 정부가 틀어져 미국 이주 계획은 실패했다.

 

쿠바까지 간 한인들

 

4년 계약 기간이 끝나자 한인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에는 미국이나 하와이, 본국으로 간 이들도 있었다. 가진 것은 노동력밖에 없었으므로, 품삯만 높다면 어디든 가야 할 판이었다. 먼저 쿠바로 가 있던 한인 이해영씨가 사탕수수 농장 일이 벌이가 좋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5년을 산 멕시코가 제2의 고향, 쿠바가 제3의 고향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쿠바까지 일자리를 찾아서 들어갔던 것이다. 나라잃은 한인들은 쿠바까지 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복음이 아니라 노동을 위하여 땅끝까지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을 살린 한 통의 편지

 

기독교인 이수정의 한 통의 편지가 한국민의 영혼을 살렸고, 기독교인 박영순의 한 통의 편지가 멕시코 노예의 삶을 막을 내리게 했고, 기독교인 바울의 13통의 편지는 전세계의 영혼을 살렸다. 알이랑 민족의 하나님은 창조 3째날에 고려인삼을 창조했고, 고려인들은 고려인삼을 판 돈을 갖고 샌브란시스코에 1904년 상항연합감리교회를 창립했다.

 

 당시 인삼장사들은 무명의 상인독립군이었다. 인삼은 독립의 뿌리가 되었다. 

 

  

  

  

 

그들은 인삼판매로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였다. 

 

  

 

조선총독부도 한인들이 인삼을 판매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도항하는 자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상하이에서도 인산상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백범도 인삼취급을 요청하였다. 

 

  


부산경찰서 서장실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박재혁도 폭탄 의거 직전까지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던 인삼 상인이었다. 인삼상인들은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인상장사, 교회의 뿌리

 

흔히 미주 이민의 시초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1903년)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인삼 상인들이 10년 전에 미국 본토에 상륙했다.

 

미국 이민국 통계로는 1894년부터 1899년까지 약 150명의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 항을 통해 입국했는데, 그 가운데 90명 정도가 인삼 상인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주로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인삼 판매에 나섰다.

 

1905년에 고려인삼이 영문으로 소개되었다. 

 

  

 

인삼 상인들이 입국신고서에 한인 도매상 ‘광덕회사’를 목적 장소로 썼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이곳은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삼을 판매하고 있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1892년 고려인삼의 가격은 미국삼의 5배, 일본삼의 4배, 중국삼의 10배에 달해 금값과 맞먹을 정도였다. 고려 인삼의 뛰어난 효능과 가치를 무기로 한인 상인들은 중국·동남아를 넘어 북미 대륙에도 진출했다. 

 

인삼 상인들은 초기 이민 사회 정착을 위해 상항 한인교회 건립비용을 댔고, 대동교육회를 만들어 민족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이 단체는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합쳐져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로 발전되었다.

 

교회를 설립한 인삼상인들


인삼 장사들은 샌브란시스코에 1904년 상항감리교회의 설립에도 후원을 하였다. 
 안창호와 인삼상인들이 3-4명이 창립멤버였다.

 

 

  

그들이 1904년에 세운 교회가 상항연합감리교회이다. 

 

 

 

 

인삼상인들이 주도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중국의 청도노동자들에게 인삼을 팔기 위하여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이전부터 미국 본토에 상륙하였다. 

 

 

 

 

 

 

친일파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장인환도 상항감리교회 교인이자 대동보국회 소속으로 인삼장사였다.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은 살인 25년형을 얻도받지만 1919년에 출소한다. 

 

  

 

그는 상항 감리교회 창립멤버였다. 

 

  

 

1919년 교회 출석부에는 장인환 선생이 교회에 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인삼장사들은 기독교인이자 대동보국회 소속이었다. 

 

  

 

미들리 묘지에는 인삼 상인 박영순의 이름이 적혀있다(우측). 방사겸. 박영순은 대동보국회 소속이었다. 

 

  방사겸과 독립금 기부 내역이 적힌 그의 일기장. 오른쪽은 리들리의 한인 무연고 묘지와 박영순이 포함된 기부자 기념비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박영순도 대동보국회 소속

 

인삼을 팔러 멕시코까지 흘러들어갔던 박영순도 대동보국회회 소속이자 상항감리교회 소속 교인이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땅에 창조한 고려인삼이 미국에서 고려인들의 교회를 세우는 교회창립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알이랑 민족은 인삼의 뿌리를 통해서 샌브란시스코에 교회의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고려인삼은 미국에서 성자예수를 믿는 고려인 교회를 태동시켰다.          

 

나성에 가면 박영순의 묘를 참배하고 편지를 띄울 띄울 필요가 있다.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