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우즈베키스탄2)

편집인 | 입력 : 2026/06/14 [06:51] | 조회수: 59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17만 명이다. 1937년에는 7만 명 정도 이주하였는데 10만 정도 늘어난 셈이다.

그런데다가 고려인들은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937년 연해주 등지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의 후손들로, 이들은 수용소와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며 현지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고려인의 교육열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된다.

 

먼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조선왕조 500년은 학문을 숭상하는 숭문(崇文)의 역사였으며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학문이 부족하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뿌리내렸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낫놓고 기억자도 모른다." "무식한 도깨비 부적도 몰라본다"등은 교육과 관련한 겪언이다.  

 

또한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여겨진 점도 중요한 배경이다. 6·25전쟁 이후 재건 과정에서 교육은 실제로 계층 상승의 수단이다.

 

입신양명으로서의 교육

 

유교의 영향을 받은 고려인들은 교육을 통해 출세하고 이름을 알린다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전통적으로 뿌리박혔다. 교육을 통한 입신양명은 한국 사회에서 성공의 상징이었다.

 

반드시 입신양명이 아니더라도 유교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교육과 수양을 통해 도덕적인 이상적 존재인 군자(君子)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교육을 절대적으로 중시했다.

 

수기치인으로서의 교육

 

유교의 학문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닦은 뒤(수기) 남을 다스린다(치인)"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철학에 바탕을 둔다. 자신을 갈고 닦아야 남을 다스릴 수 있다는 논리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성선설)고 보았고, 순자는 악한 본성도 후천적인 교육과 교화(예의 학습)를 통해 선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교육은 이러한 인간의 선한 본성을 보존하고 악을 바로잡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유교에서는 백성을 도덕적으로 교화하여 다스리는 것이 형벌이나 무력보다 근본적인 통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입신양명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는 과거 시험제도가 있어서 교육을 통해서만이 입신양명을 할 수 있고 그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 당시나 현대에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교육은 입신양명의 지름길

 

미국에서는 아이비리그, 한국에서는 SKY대학을 추구하는 것은 입신양명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명문대 진학, 고시(사법시험 등), 전문직 자격증 취득은 입신양명의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였다.

 

고려인들은 일찍부터 유교를 통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고, 교육만이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하와이,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 어디를 가든지 교회와 학교부터 세웠다. 알이랑 민족은 믿어야 살고 배워야 산다는 입장이었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문명은 유학생으로부터   

 

6·25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한국이 불과 30~40년 만에 서양의 200년 산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동력은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이었다.

 

오늘날 반도체로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학생들이 미국에 유학가서 선진학문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디어, 반도체 사업에 있어서 한국보다 뒤쳐지는 것은 일본 사람들은 자신이 세계 최고라 생각하기때문에 미국 유학을 가는 경우가 드물다.

 

외국유학을 가면 일본인들은 거의 없다. 미국에 중국 유학생들도 많이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공산국가인만큼 자국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직장을 얻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한국유학생들은 미국에 남지 않고 선진기술을 갖고 대형회사에 들어가 한국의 회사들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사회의 과학기술문명을 이끈 것은 미국유학생들 덕분이다. 오늘날 반도체의 혁명은 교육에 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은 최소한의 짐만 허용된 상황에서 식량과 옷보다 책을 먼저 챙겼다.

블라디보스독에 있는 고려인 사범학교가 그대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갔다. 그것이 크질오르다 대학이었다.  

 

고려인들의 교육열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에 가자마자 교육기관부터 세워 공부를 하게 했다. 이미 연해주에서 많은 교육을 받은 연해주 2세들이기 때문에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강제이주를 당한 민족 가운데 학교부터 세운 공동체는 고려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7년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은 특유의 성실함과 뛰어난 농사기술, 그리고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정착에 성공하였고, 이후에도 고등 교육을 받은 전문직에 다수가 종사하면서 고려인의 우수성을 전 소비에트연방에 알렸다.

 

우즈베키스탄의 영웅, 김병화도 일찌기 러시아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었다. 교육을 받은 지도층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성공을 할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성공한 고려인들

 

노동영웅이 고려인이 10명이면 우주베키스탄사람은 1명에 불과했다. 고려인은 인구의 0.5%에 불과하지만 카즈흐스탄의 고려인들처럼 교육과 문화및 정치영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했다.  

  

  

 

  

 

빅토르박, 엠마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총선에서 선출직인 하원의원에, 고려인이 처음으로 당선됐다.

 

2014년 빅토르 박(66) 고려문화협회장은 지난 21일 시행된 우즈베키스탄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타슈켄트주 우르타치르칙 지역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2024년에도 당선돼 3선 의원이 되었다.

 

그는 1937년 ‘러시아 강제이주’ 때 우즈벡으로 온 고려인의 후손이다. 우즈벡 곳곳에서 대형 방직 공장들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2021년부터 고려인문화협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아슬로노바 엠마 의원(51)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해 재선의원이 됐다. 1973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서 태어나 부하라주립대를 졸업한 그는 같은 지역 제15영재학교에서 러시아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는 재외동포청이 서울에서 개최한 세계한인정치인포럼에 참석하기도 했다.

 

 

  빅토르 박                                                                     엠마

  

고계월

 

우즈베키스탄에서 '밥퍼 아줌마'였던 고계월씨는 2009년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상을 받았다.

 

서울 출생인 조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그의 부친 알렉산드르 고(제주 고 씨로 밝힘) 씨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고, 계월 씨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 공화국 수도인 누크스시 37학교와 수력발전 기사대학을 졸업한 그는 우즈벡 국립정치대학원을 나와 1972년 농업건설부 공무원으로 들어가 수력발전소 분야에서 9년간 근무하다 1981년 카라칼파크스 공화국 수상과 부수상 다음인 서열 3위의 자리에 올라 12년간 24명의 장관을 지휘, 통솔했다. 경제부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우주베키스탄에는 집단농장을 잘 이끌어 노동영웅이 된 고려인이 두 명있다. 한 명은 김병화이고 다른 한 명은 황만금이다.  

 

황만금(1919-1997)

 

황만금은 구소련 시절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던 '폴리타젤(Politadel)' 집단농장을 소련 최고의 모범 농장으로 탈바꿈시킨 김병화(1905-1974)처럼 위대한 지도자이다.

 

  

 

황만금(1919-1997)은 소련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여 폴리타젤(Politadel) 집단농장 지도자로 활동한 고려인 지도자이다.

1919년 연해주 포시예트 지역에서 태어나 1937년 가족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다.

 

1953년 플리타젤 집단농장의 선임자로 선임되어 농장을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만들었다. 정치적 탄압으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재판이 진행되면서 무죄임이 밝혀졌다.

 

사회노동영웅

 

황만금은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명예회장을 맡아 여생을 보내다가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회노동영웅’이라고 불렸으며, 레닌 훈장과 10월혁명 훈장을 받았다.

 

  


타슈겐트에 황만금의 박물관이 있다. 

 

  

 

  


그는 1953년, 막대한 빚과 나태함에 빠져있던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지도자로 부임하여 조합원들의 노동 의욕을 고취해, 불과 3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수확량을 내는 농장으로 일궈냈다.

 

그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에 폴리타젤 농장은 1976년 소련 최고의 집단농장으로 인정받았다. 농장 내에는 1,200명을 수용하는 문화회관, 2개의 경기장, 백화점, 병원, 학교가 자체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농장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중앙정부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레닌 훈장과 10월혁명 훈장을 여러 차례 수훈했다. 

 

노동영웅 수장자들은 고려인이 206-209명이고, 전체 수여자중 8.32%에 해당한다. 김병화가 2회, 황만금 1회, 김만삼 1회, 알렉산드라 한 1회 이고 여성 수상자는 206명 중 고려인이 16명이다. 

 

고려인들이 성공한 것은 연해주의 교육때문

 

고려인들이 많이 수상을 한 이유는 이미 연해주에서 대부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강제 이주당할 무렵 1937년에는 연해주에 대학이 3개나 있었고, 초중고등학교는 300여 개 이상 존재하여 연해주 2세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30%가 기독교인들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주께 하듯 성실하게 일을 했다.     

 

고려인은 본래 부지런해서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CIS(독립국가연합) 지역에서 열심히 살아왔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는다.

한민족 특유의 교육열을 바탕으로 "자식들은 무조건 고등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이 대를 이어지면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CIS 각국의 고려인들은 정계 의원, 언론사 기자, 의사, 과학 기술자, 조각가 등 사회 전반의 핵심 주류 분야에 대거 진출해 있다.

 

고려인은 알이랑 민족

 

과거 소련 시절에는 유대인에 이어 학력 수준이 두 번째로 높았을 만큼 교육 열의가 대단했다. 1937년 강제 이주라는 고통을 겪은 조상들이 자녀 교육에 헌신한 결과다. 

교육과 신앙이 있는 고려인들은 어디를 가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알이랑 민족'이었다. 알이랑을 번역한즉 "하나님이 함께 하다"이다.  즉 알이랑은 '고려인과 함께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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