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중앙아시아 진출
현재 중앙아시아에는 고려인들이 약 37만명 살고 있다. 우주베키스탄에 23만 명, 카자흐스탄에 10만을 비롯하여 기타 지역에 4만여 명이 살고 있다.
1937년 9월에서 10월까지, 구소련 당국 스탈린은 일제의 첩자가 많다고 하여 극동 러시아로부터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수만 명의 고려인을 이주시켰다.
172,0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계획적인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 국경지대로부터 중앙시아로 옮겨졌다. 이들은 열차를 통해 6,4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는데 그 와중에 최소 504 명이 열차 안에서 숨졌고, 굶주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방문하는 기차역마다 내려 처리되었다.
이들은 당초 계획보다도 많은 44개의 지역으로 분산 이주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우주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지역에 37,321명, 사마르칸트 지역에 9,147명, 페르가나 지역에 8,214명, 화레즘 지역에 5,799명을 정착시켜졌다.
이로써 고려인들은 대부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특별 노동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최종적으로 약 100,000명이 카자흐스탄으로, 약 70,000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졌다.
이주한 고려인들은 스스로 콜호즈(집단농장)을 구축하거나 기존에 만들어진 현지인들의 콜호즈에 참여하였고, 작물을 재배하거나 어업에 종사하며 삶을 다시 꾸려나가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중앙아시아로 진출
고려인들은 강제이주전에도 1920년대부터 소수의 고려인 집단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와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미 고려인들의 일본 간첩 행위를 예방하기 위하여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적, 자발적 이주를 하였다.
이 당시의 이주는 카자흐스탄의 벼농사와 관련이 있었고, 1920년 후반에 러시아 정부는 면화자립국을 만들기 위하여 면화재재를 강요하기도 했다.
1926년 우주베키스탄에는 36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였으며 그들은 대부분이 타쉬겐트에 거주하였다. 1937년 되어서야 카자흐스탄에 10만 명, 우즈베키스탄에 약 7만 명이 이주를 하였다.
이주한 기독교인들 20-30%(4-5만명)
이주한 고려인들은 대부분 연해주 2세들이었으며 러시아 정교회 소속 고려인들은 약 20-30%였다. 4-5만 여명이 기독교인이었다. 1937년 강제 이주할 때 4만 명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정교회가 설립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강제 이주된 고려인 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많은 2세들이 이미 서구교육을 체험한 지식인들이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적응과 교리전파를 위해 학교를 먼저 세워 고려인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을 만들어 주었다.
세례를 받는 고려인들
1865년 1월 최초로 지신허 마을에서 마을 촌장인 최운국(세례명 표트르 세묘노프)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곧바로 두 가정이 추가로 세례를 받았다. 1869년에 연해주 포시에트 지구의 한인 세례자수는 91명에 이르렀다.
계명대 오새내 교수는 대동철학회 논문집 84집에서 1865년 지선허 마을에서는 최초의 이민자 촌장 최운국을 포함한 세 가정이 발레리안 사제에게 영세를 받은 것이 처음이고, 1875년에는 러시아에 등록된 한인 중 2252명 중 748명(32%)가 영세를 받았다고 했다. 기독교인들이 점점 늘어갔다.
한인들은 신앙적인 것보다 일단 신분상승이나 러시아에서 빠른 사회적 동화를 위해 러시아 교회가 요구하는 세례를 받았다. 약 30%가 예수를 믿었다. 고려인들은 교육과 신앙의 민족이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조선 땅에서보다 일찌기 서구의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과 교육때문이었다.
최재형 선생 등의 적극적인 후원과 민간의 주도로 1890년대 말에는 연해주 일대 30여 개 이상의 한인 마을마다 정교회 소학교가 1개씩 설립되었다.
1903년~1904년 무렵에는 약 35곳에 달하는 정교회 학교가 운영되기도 했다. 1920년 대 초 고려인 여성들은 이미 신식여성이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도 삼일여학교를 세웠다. 이미 기독교인들인 연해주에 많이 있었다.
강제 이주 3년 전에 이미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서구의 대학을 맛보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서구식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연해주 고려인 거주지에는 380여 개의 모국어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연해주에 설립된 고려인 학교들은 그 수준으로 보나 그 숫자로 보나 한반도 전체에 존재했던 교육기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고려인들은 교육을 중시하였다.
1956년 개설한 타슈켄트 국립사범대학의 한국어문학과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양성이 주요한 목표였다. 흐루시초프의 정책에 따라 사회주의 시기에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한국어문학과에는 고려인이 주로 입학하였다.
한국어[조선어]와 문법, 고려인 문학을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졸업생들은 주로 고려인 집단 농장에 설치된 초급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고려인 학생을 가르쳤다.
우주베키스탄의 집단 농장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집단 농장의 형성 과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37년 강제 이주 전에 연해주에서 설립되었던 집단 농장이 강제 이주와 함께 같이 이동한 경우, 둘째, 1937년 강제 이주 이후 새롭게 설립된 경우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집단 농장[콜호즈]은 1937년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경제 활동 중심지였고, 생활의 터전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주(州), 페르가나주, 시르다리야주, 사마르칸트주, 호레즘주, 카라칼팍스탄 자치 공화국을 중심으로 고려인 집단 농장이 설립되었다.
집단 농장 콜호즈
콜호즈는 구소련 에서 국유지에서 여러 가구의 농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 농업 기업으로, 농민 들은 노동력의 질과 양에 따라 급여를 받는 유급 노동자였다. 농민들의 자발적인 조합으로 구상된 콜호즈는 지배적인 농업 생산 형태가 되었다.
농업 기업은 1929년에 시작된 국가 차원의 사유지 몰수 정책의 결과로 생겨났다.
북극성 콜호즈는 1929년 12월에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미하일로브카군(郡) 리포프카 농촌 마을에 설립되었다.
당시 약 20명의 농민들이 500여 ha의 농지를 터전으로 콜호즈를 꾸렸는데, 점차 50여 가구로 구성원이 확대되었고, 1931년에는 같은 군에 있는 랄리츠 농촌 지역으로도 확대되었다.
그 뒤 1937년에는 지금의 타슈켄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768ha 규모의 토지에 주로 벼를 심는 농장으로 재편되었다.
이 때 북극성 콜호즈는 123가구, 29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도 사육하였다. 하지만 강수량이 적었기에, 벼농사는 점차 어려워졌다.
콜호즈의 영웅, 김병화
그러나 북극성 콜호즈는 김병화를 새로운 지도자로 영입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김병화는 러시아 정교회 학교를 졸업한 기독교인으로서 소련군 하급장교 출신이었는데, ‘노브이 푸치(새 길)’라고 불리던 콜호즈에서 북극성 콜호즈의 회장으로 부임하여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1941년에 초창기 작물이었던 벼와 함께 면화를 재배하였다. 벼는 물론 면화의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였고, 우수한 경영 지도 방법으로 인해 김병화는 1949년과 1951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김병화를 도운 능력 있는 25명의 고려인들도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특히 당시 고려인 중 김병화 선생는 콜호츠에서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벼농사를 성공시켜 노동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타쉬겐트에는 김병화 박물관도 있을 정도이다.
김병화는 1905년 러시아 접경지대인 함경북도 경흥에서 김치만의 3남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 그의 아버지와 함께 1914년 연해주로 이주했다.
김병화는 아버지 권유에 따라 고려인학교를 다니다가 정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로 옮기면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는 정교회에 귀의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최재형처럼 김병화는 러시아어를 능통하게 잘하여 1926년 붉은군대(소련군 전신)에 하사관으로 입대하고 이듬해 공산당원이 됐다.
1929년 중소 국경분쟁에 참여한 뒤 모스크바의 군사정치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군인 출신이면서도 성품이 온화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불만이나 이견이 있으면 누구라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목표는 높고 규율은 엄했지만 회장이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사심 없이 업무를 처리하니 모두 믿고 따랐다.
그는 집단농장 콜호즈의 지도자가 되어 소련 당국의 방침에 따라 1940년대 중반부터는 논을 목화밭으로 바꿔나갔다.
1950년대 중앙아시아 목화 평균 수확량이 헥타르당 20.4㎏이었는데 북극성은 48.2㎏이었다. 그 공로로 1948년 김병화는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선정돼 레닌 훈장과 '낫과 망치' 메달을 받았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은 201명이다. 고려인 전체 인구가 44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이다.
타지크인과 타타르인도 250명과 210명의 노동영웅을 배출했지만 이들 민족의 인구는 각각 250만 명과 600만 명에 이른다.
1956년에 소련공산당 기관지인 프라브다지에 소개되면서 소련 연방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프라브다지에 따르면, 1957년 북극성 콜호즈는 사회주의 이중노력영웅을 포함해 총 26명의 노력영웅(25명이 한인)과 415명의 수훈자들을 보유한 우수한 콜호즈로 성장했다.
베트남의 호치민과 소련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초프, 브레즈네프가 김병하의 콜호즈를 찾았을 정도이다.
이처럼 강제로 이주된 고려인들이 소련의 영웅이 된다. 이러한 힘의 이면은 정교회가 세운 학교와 교회에서 배운 교육의 힘이었다.
고려인 특유의 근면성과 교육성, 신앙성, 탁월한 농사 기술은 다른 민족들의 집단 농장들보다 고려인 농장의 생산성이 항상 높았다.
고려인 집단 농장은 고려인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고려인 사회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인 집단 농장 대부분은 척박한 황무지에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개간을 해야만 농사가 가능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대표적인 고려인 집단 농장은 타슈켄트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은 치르치크강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강물을 끌고 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고려인 집단 농장들은 단기간에 엄청난 수확량을 달성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