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환목사, 과거를 찾아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막대기는 영성(영양의 소리)을 명성(명일동의 소리)으로

편집인 | 입력 : 2021/10/14 [17:05] | 조회수: 703

 

명성교회 김삼환목사가 과거를 찾아 나섰다. 충북 괴산에 있는 근현대 박물관을 방문했다. 김삼환목사는 먼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에 눈길을 두었다. 김목사는 어려서부터 종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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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고향 경북 영양 산골짜기에 있는 신당교회의 종을 쳤다. 이 종은 새벽마다 마을사람들의 영혼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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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당교회는 2003년에 명성교회가 신축 공사를 하면서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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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십명 되지 않지만 2003년에 새로이 신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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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새로이 신축을 하면서 "저의 어머님 고 김분남 집사님의 눈물의 기도와 하나님 중심의 철저한 믿음의 삶이 오늘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을 사모하며 이 전을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 바치나이다. 주님 영원히 영광받으시옵소서. 주후 2003년 4월 30일, 작은 종 드림"이라며 오늘의 나됨은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신당교회에서 밤낮으로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아들의 미래는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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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의 고향은 영양에서도 산 기슭 밑 동네였다. 집은 몇 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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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 않은 부락에도 김목사 집안의 땅은 산 기슭에 비스듬이 있었다. 즉 좋은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새벽종을 울리면서 새하늘 새 땅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울린 영양의 소리는 훗날 거대한 교회의 명일동의 소리가 되었다. 영양의 소리(영성)는 명일동의 소리(명성)를 예비하고 있었다. 

 

종소리뿐만아니라 개울가에서 고기잡이도 훗날 사람을 낚는 어부를 예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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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경북 영양군 신당교회의 종치는 조그만 소년이 재적 인원 10만명에 육박하는 명성교회의 당회장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교회만 세우는데 끝나지 않았고, 안동성소병원을 인수하여 굴지의 안동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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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오피아에도 약 600억원을 들여 이디오피아 최대의 병원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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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이상을 들여 여주 민영교도소를 설립하는데도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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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의 영광여고까지 인수하여 전원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최고의 학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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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장학관을 비롯하여 농어촌의 목회자 자녀를 위하여 7개의 장학관을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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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호남에는 4개의 장학관을 세웠다. 그러나 호남목회자들이 명성에 가장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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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재단법인 빛과 소금을 만들어 교파를 초월하여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매달 1,000여명씩 돕고 있다. 그리고 파송선교사 42 명을 매달 200 만원씩 지원하고, 300 여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매달 일정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코로나의 상황에서도 한 명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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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용산참사, 태안반도 기름닦기, 정의연 할머니 사택제공, 군선교회, 이북돕기, 통일선교 등 사회와 국가의 일에도 앞장서서 도왔다.

 

김삼환목사는 그야말로 신화를 창조했다. 김삼환목사가 근현대 박물관을 찾은 것은 과거의 빈궁했던 추억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빈궁하고 가난할 때, 하나님만 붙잡으면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추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초롱불을 보면서 어둠을 밝혀주었던 유일한 교회의 한 줄기 빛을 기억했고, 등잔불을 보면서 어두웠던 집을 생각했지만 예수의 빛이 그의 앞길을 밝혀주었다는 것을 기억했을 것이다.  어두운 초롱불과 등잔불 가운데서 영원히 환한 그리스도의 빛을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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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빵 기계를 보면서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몰래 집안을 빠져나가 풀빵 장사를 해서 돈을 모으고자 했지만 그마저 사기당해 생선장사를 하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야단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며 집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옛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야단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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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풀빵 장사가 아니라 수 만명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빵 장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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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그의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명성교회 특별 새벽집회


오늘이 있기까지 아내의 기도와 배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  


김목사는 진열돼 있는 꽃가마를 보면서 아무 것도 없었던 자신에게 시집온 아내를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안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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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를 보면서 돈없는 개척교회목사가 이발하던 시절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이발을 하면 그 날만이라도 개척교회 목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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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패 등 많은 기구들은 김목사에게 모두 낯익은 추억의 물품들이었다.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 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그의 삶의 궤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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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개척교회하느라 돈이 없어서 당시 가장 인기였던 고교얄개조차 볼 시간적, 물질적, 영적 여유도 없었다. 이승현은 당시는 최고의 인기 배우였지만 현재로서는 영화감독도 실패하고 목회도 실패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목회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었다.

 

인생의 성공은 젊어서 한 때가 아니라 인생 말년에도 후회가 없어야 한다. 그러는 의미에서 이승현은 고교 때는 즐거운 얄개였지만 인생말년에는 선정적 포르노식 영화를 찍다가 우리에게 웃음을 주지 못하는 실패한 얄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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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젊은 시절을 가수 김수철의 말대로 눈물로 보냈던 것이다. 교회에서도 오직 눈물의 기도뿐이었다. 눈물은 그의 친구였다. 살 소망이 끊어질 때마다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늘 예수가 계시니 눈물은 그의 미래를 예비하는 복의 물방울이었다.    

 

그는 희망없는 시골 소년이었지만 청와대까지 내집 드나들듯이 넘나들면서 최근 김영삼 전대통령의 추도식 3주기 기념에 축도자로 초청되어 "김영삼 대통령도 대한민국을 위해 보내신 주의 종"라고 축복하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대통령의 가는 길에는 항시 그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에도 그가 있었다 . 
 
김삼환목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추도식에도 명성교회 성가대를 보내기도 할 정도로 야당출신 대통령과도 좋은 관계를 가진 바 있다.  

 

김목사는 다른 대부분의 기계는 알아보았지만 가난한 동네에 사느라 굴뚝 청소기는 알아보지 못하였다. 굴 뚝 청소기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마을의 가옥은 열악해서 혼자 뜷어도 하자가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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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의 마을은 빈궁과 가난이 친구였다. 대부분 판자집이거나 초가집이었다.  

 

  김삼환목사 동네 

 

김목사는 어머니와 함께 했던 다듬이 방망이를 두들기면서 유일한 피난처였던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절을 추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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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인두와 다리미를 보며서 자신도 인두질을 해서 옷을 다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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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초등학교 교실을 보면서 옛날의 동료들을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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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가방을 보면서 자신도 동일한 가방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 가난했지만 아버지가  장에 가서 가방을 사와서 학교 아이들이 부러워했다고 했다. 즉 보자기로 책을 싸서 간 신세는 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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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늘 자신을 때렸지만 그래도 공부잘 하라고 가방을 사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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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석목사의 사진은 자신도 이천석목사처럼 크게 목회하기를 바라며 한얼산기도원에서 비를 맞아가며 산에서 기도했던 시절이 떠올랐을 것이다. 비맞으면서도 기도하는 그의 영성이 오늘의 명성을 만들었다. 

 

반도 감도는 북한 강물에 발목을 담그며 우뚝 선 성산

굴과 얼굴에 화평을 심고 

마다 곬마다 풍성한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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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그의 가난과 고난속에서의 눈물의 기도와 영성이 오늘의 명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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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관람을 마치고, 30년동안 60-70년대의 문화를 만들어 자신의 과거를 다시 생각나게 해주었던 김종복 목사에 대해 감사하다며 기도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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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가난과 빈궁이 친구처럼 따라 다녔어도 예수가 함께 하였기에 어디를 가나 복의 근원이 되어 수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다행히 김하나목사 역시 아버지처럼 그의 정신을 잊지않고 실천하고 있다. 한 때 승계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삶을 구현시키고자 애쓰고 있다. 

 

김삼환목사의 눈물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를 통하여 신화가 만들어졌다. 김목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한, 손에 마른 나무 하나만 있어도 모세나 다윗처럼 놀라운 기적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난의 나무막대기를 철굴구조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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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는 막대기는 영성(영양의 소리)을 명성(명일동의 소리)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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