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일본6)

일제 강점기의 도래인

편집인 | 입력 : 2023/08/12 [03:06] | 조회수: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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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도래인

 

일본의 '국가'라는 책은 1910-1925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이 약 21만 5천명, 만주로 이주한 한인은 약 53만 5천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제국 국가>에서 인용


그러나 1940년대가 되면 120만 명이 되고, 1945년 해방시점에는 210만명으로 증폭하였다. 

 

  

 

현재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 혈통, 즉 한국계 일본인의 숫자는 2021년 6월의 일본 정부 통계에 의하면, 특별영주자 전체 수 300,441명의 98.8%인 296,922명이다. 약 30만 명이 재일 교포이다.

 

일본의 통계에 의하더라도 1944년까지 약 200만명에 육박하던 재일동포들은 해방 후 1945년 부터 약 140만 명이 한국으로 돌아간다. 현재는 약 60만 명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실제로 약 30만 명 정도는 이미 일본에 귀화를 한 상태이기때문에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재일교포는 약 30만 명이다.   

 

 

 

이 중 북송된 교포도 9만 명에 해당한다. 거류민단보다 조총련에 가입하였던 사람들은 북한을 동경하여 북한으로 북송되었다.  

 

  

 

재일교포의 대부분은 제주도와 영남 사람

 

재일교포들은 상당수가 호남사람보다 영남과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있다. 호남사람들은 광주학생의거 등 다른 지역과 달리 반일본감정이 앞선 상태이다. 

 

한일 합방이후 영남사람들은 호남에 비해 평야가 적기 때문에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경제적인 이유로 많이 일본으로 갔다. 즉 일본에는 영남 도래인, 제주도 도래인들이 많이 있다. 비율로 보면 제주도 출신이 50%, 영남 출신이 40%, 나머지 지역 사람들이 10%이다. 재일교포 중에 호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제주도는 주산업이 농업과 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거리도 가깝고, 제주도 출신의 차별분위기, 4. 3 사건 등으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해방이후에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특히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 발전과 공업화의 부진,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병역의무로 인해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 취급하게 된다.

  

정신대 도래인

 

본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되었다.

 

 

  

 

일본은 1944년 봄에 취업 및 진학을 시켜준다고 꾀어 당시 12세에서 14세의 소녀들을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서 모집한 뒤 미쓰비시 중공업의 군용 항공기 공장에서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다.

 

  


이 가운데는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간 경우도 있었다. 이 공장에서 강제로 노동한 조선인 여성은 약 400명으로 파악된다

 

 

 


위안부 도래인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인들의 성착취 위안부로서 종사하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위안부를 자원하지 않았다. 일본도 처음부터 여성에 대해서도 강제 징발한 것이 아니라 군수공장에 취직을 시켜준다고 기만하여 억지로 끌고간 것이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노동력의 동원이라는 점에서 성적 착취가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르지만 사실 근로정신대라고 모집해 놓고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만삭을 한 위안부는 고박영심씨이다. 북한에 거주했다. 북한 위안부이다.   

 

  

 

  

박영심 씨는 지난 2000년 1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북한에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의 실상을 처음으로 증언했다.

 

이후 북한 조선일본군위원부 및 강제연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를 통해 박영심씨가 2006년 8월 사망한 사실이 전해졌다. 그러나 일본은 위안부피해가 없었다고 거짓 증언하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

 

1941년 김학순은 17세 였다. 그녀는 친한 언니와 함께 중국 북경에 갔다가 영문도 모르고 일본군인들에게 끌려 일본군 부대로 이송돼 다른 여섯명의 조선인 여성들과 함께 갇힌 채 일본군인들에게 짓밟혔다.

 

김학순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일본인들이 위안부가 없었다며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모포가 씌어진 침대 하나와 세수대야가 놓인 좁은 방에 갇혀, 옷이 찢기고 맞아가며 김 씨는 도망칠 생각만 했다.

김 씨는 운이 좋게도 5개월만에 한 조선인의 도움을 받아 부대를 탈출할 수 있었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17살이었다. 

 

 

 

문옥주 할머니 

 

1991년 12월, 김학순에 이어 국내에서는 두 번째로,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밝혔다.

이듬해 3월에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우체국을 상대로 ‘위안부’로 있을 당시 군인들의 팁을 모아 저금했던 군사우편저금의 지급을 청구하기도 하였다.

 

대구 대명동 출신인 문옥주할머니(1924-1996)는 만 16세이던 1940년 친구네 집에 다녀오던 길에 칼을 찬 일본군에게 붙들려 중국 동북부 도안성으로 이송됐다.

 

  

 

그녀는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열두 살 무렵인 1936년 규슈(九州) 오무타(大牟田)의 요릿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이듬 해 도망쳐 돌아왔다.

열일곱 살 가을, 만주의 동안성(東安省)으로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다가 1년 뒤 다시 도망쳐 돌아왔다.

 

문옥주씨는 운이 좋게도 일본인 장교의 눈에 들어 1년만에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으나 1942년 7월 급여가 좋은 식당에 취직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또다시 버마(미얀마) 랑군으로 끌려갔다.

 

이때로부터 문씨는 다시 3년 4개월을 갇혀서, 술취한 일본군으로부터 살해될 위험에 놓이거나 자살시도를 하는 등 죽음과 삶을 넘나들었다.

 

도래인들의 친구, 루미코와 고노

 

니시노루미코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 관장은 “아베 총리는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9건의 손해배상 청구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 법원은 강제성을 인정했다”고 지적한 한인 도래인들이 친구였다. 

    

니시노 루미코는 임신한 위안부 박염심의 사진을 처음 공개한 사람이다. 그는 미얀마와 중국 국경지대에서 미군이 촬영한 이른바 ‘임신한 위안부’ 사진의 당사자가 북한에 거주하는 박영심 씨(2006년 별세)라는 사실을 2000년에 처음 발굴해 공개했다.

 

박영심씨는 사진 속의 임신을 한 위안부가 자신이라고 가르킨다. 

 

  

 

 

‘전쟁과 여성 대상 폭력에 반대하는 연구행동센터(VAWW RAC)’의 관장으로서 루미코는 "사기·감언(병원, 공장 등에서 일하게 해준다며 속이는 등의)에 의한 연행이 33명(63.5%), 납치·유괴가 11명(21.2%), 인신매매가 8명(15.4%)였다.(피해자 증언으로 본 일본군 ‘위안부’연행의 강제성이 있다"고 하면서 “아베 총리는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9건의 손해배상 청구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 법원은 강제성을 인정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아베 총리가 공식적으로는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 반성한 ‘고노(河野) 담화의 계승’을 말하면서도 ‘피해자 증언은 증거가 안 된다’고 하면 이는 모순에 가득 찬 ‘더블토크(이중발언)’”라며 “미 하원에 제출된 군위안부 결의안의 요점도 일본정부가 지금까지 해 온 ‘분명하지 않은 사죄’”라고 질타했다.

 

이처럼 위안부는 감언이설로 속인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강제 납치도 일부 있었다. 이들은 대다수가 20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이었다.

 

윤정옥 교수가 보건사회부에 신고된 56건을 분석한 바에 의하면 전체의 80%가 미성년(12~19세)이었고, 12%만이 20세 이상이었다.

나머지는 정확한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였다.(‘조선 식민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일본 관방 장관 고노

 

1993년 일본관방장관이었던 고노는 ‘고노 담화’를 직접 발표했다. 그는 최근 일본 정치권에서 분출되는 고노 담화 폐지 또는 수정론에 대해 “일본의 인권 의식이 의심받고 국가 신용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고노 전 장관은 "16명의 위안부에게서 직접 청취한 결과 일본군이 여성을 위협해 연행했고, (여성들은)공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속았으며, 때로는 하루에 20명이 넘는 병사들을 상대해야 했고, 일본군이 패주할 때 버려졌다는 참혹한 체험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위안부들이) 일본군에 거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강제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위안부들의 증언 내용을 본 미야자와 총리도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계속)

 

 

강제징용과 강제징병의 도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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