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일본5)

노예로 끌려간 도래인들

편집인 | 입력 : 2023/08/11 [02:44] | 조회수: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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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사 도래인 일본

 

조선은 중국 송(宋)대에 들어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인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실학운동이 발생할 때까지 성리학은 조선의 정신사조를 지배하였으며 개신교를 통한 신문명이 들어오면서 성리학의 열풍은 점점사라지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이 다른 점은 조선은 서구의 개신교를 먼저 수용하였지만 일본은 종교보다도 문화와 기술에 관심을 가졌다.  

 

성리학은 13세기의 중국철학이었다. 공자, 맹자, 주자의 학문이었다. 이씨조선 500년의 정신사조였다. 

 

  

 

조선에서는 이퇴계가 조선에 맞는 성리학으로 토착화시켰다. 조선은 이퇴계의 철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義理)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不能舍己從人, 學者之大病. 天下之義理無窮, 豈可是己而非人

 

군사 도래인, 일본

 

조선은 이퇴계가 있었지만 일본은 총칼로 무장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있었다.  그는 1590년에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였으며 1592년에는 명나라까지 통일하고자 조선으로 진출했다. 조선에 진출한 군사 도래인이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철학이나 종교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화보다는 형이하학적인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선은 13세기의 중국철학으로 무장하여 전국은 유교의 서원으로 가득찼다.   

 

  

 

정한론


16세기에 서구의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은 자신들의 무기를 실현한 제물을 찾고 있었다. 임진란은 정한론의 시작이었다. 정한론은 훗날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고, 현대에도 독도의 정벌을 교과서에 싣고 있을 정도이다. 임진란 때 시작된 정한론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 편집인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정벌을 추구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사 집안 출신이 아닌 까닭에 쇼군(장군)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쇼군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자신들의 영토를 회복하고 그를 방해하는 오랑캐를 물리쳐 승전군이 되어 천황에게 다시 대장군의 칭호를 받아 막부를 구성하는 것뿐이었다.

 

이를 위해 과거 영토라고 주장하는 미나미(임나)에 해당하는 조선 남부를 회복(히데요시의 관점)하고 이에 반대하는 명나라 군대를 섬멸하는 것만이 막부를 구성하고 쇼군이 될 명분을 얻는 유일한 길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영지들을 무사들에게 하사함으로써 가신관계를 굳건히 만들고자 했다. 전리품을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8년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사이고 다카마의 정한론

 

일본의 사이고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에서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서로 조정을 정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10년 권력이 끝나가던 1873년 겨울, 일본에서도 메이지정부의 운명을 가를 거대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한론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연속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사람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등박문(이토오히로부미)도 정한론자이다. 

 

1875년에 시작된 메이지유신은 서구처럼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보다 근대화가 덜 된 중국과 한반도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양무운동의 한계 

 

청나라도 일본처럼 근대화를 위한  양무개혁운동을 시작하였다. 양무 운동(1861년 ~ 1894년)은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에 관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군사중심의 근대화운동으로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 하였던 운동이다. 

 

 

  


우리나라는 그 당시 민비와 대원군의 조정점령 싸움, 아관파천(1896), 위정척사운동(1860년대-1880년대),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의 실패(1884), 동학혁명(1894)이 발생하였을 때이다.

뭐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동학혁명은 민비의 내민족 죽이기였다. 그녀는 청을 끌어들여 동학란을 그치게 하고자 하였다. 

 

민비의 척족이던 민겸호가 임오군란의 주범 김춘영을 잡아 포도청으로 넘겨 형살시키려 하자. 이 문제를 도화로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  

 

  


이후 바로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일본을 힘입어 개혁을 주도하려고 하였던 사건이다. 

 

 


1894년에는 전라도 정읍에서 동학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칼이 없는 모든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중국의 양무운동은 총칼을 근대화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은 유럽 근대기술의 도입으로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보강하려 했던 청나라의 자강 운동이다.

 

  

 

양무(洋務)는 다른 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관한 사무를 뜻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쓰였다. 중국사상을 위주로 하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군사운동에 그쳤다. 중국의 형이상학을 갖고서 양무운동을 추진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서구의 근대적 개혁에 동참하였다. 조선도 일부 사람들이 서구의 근대적 혁명을 하고자 노력하였지만 민비와 대원군이 대립하는 데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유일한 희망은 검이 아니라 말씀이었다. 즉 무력이 아니라 영력이었다. 선교사들을 통한 영력만이 조선을 바꿀 수 있었다. 3.1운동은 무력이 아닌 영력의 운동이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일본을 통한 식민지적 강제 운동에 불과했다. 근대화를 위해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지불해야 했다.  

 

복음이 결여된 청의 양무운동도 안팎의 여러 장애에 부닥쳐 제한된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가장 커다란 한계는 전국적 차원에서 통일된 계획 아래 추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양무파는 중앙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사중심의 근대화에 너무 치중했을 뿐, 사회, 정치 체제의 근대화는 무시되었다.

 

그 결과, 때마침 일어난 청불전쟁(1884)과 청일전쟁(1894)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어 그 약체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청은 신식무기로 무장하는데 일본보다 뒤쳐져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성공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단지 군사무기만 치중하지 않고, 사회, 정치, 문화 등 전반적인 개혁운동이었다. 영국의 의회중심적 입한적 군주제는 아니었지만 일본은 천황중심적 전제적 군주제였다. 복음의 운동은 없었다.  

 

  

 

복음이 없다보니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여 한반도를 침공하고, 중국, 러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세계대전을 일으키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그들의 야망은 1945년 8. 6.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복음이 없는 인간의 욕망은 신의 경지 이상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서구의 문물과 문화로 무장하여 근대화에 성공하였지만 제국주의 본성으로 조선을 약탈하는 유신이었다.

 

특히 그들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영일전쟁, 미일전쟁(진주만 습격)까지 그들의 욕망을 발산하였다. 1876년 일본은 조선 강화도에 나타나 바로 강화도 불평등조약을 맺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구와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조선과 맺었다. 조선은 일본의 밥이었다. 

 

  


2. 문화 도래인 한국

 

유학 도래인

 

조용필의 간양록은 조선 도래인 강항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간양록은 조선시대 문신 강항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겪었던 참상을 기록한 포로기이다.

강항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서 일본에 유학을 전하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임진란의 유학 도래인이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면 시를 썼다. 그것은 조용필이 가사로 만들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피눈물로 한줄한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고대 삼국시대에도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가서 문화와 종교, 문자, 언어를 전했다. 삼국시대가 일본보다 힘이 있을 때였다. 그러나 1592년 임진란 때의 도래인들은 대부분이 포로와 노예 도래인이었다.

 

강항은 일본으로 끌려가 더이상 임진란의 피해를 막기위하여 일본의 문화, 지리 등 간양록을 저술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의 유학을 전파하기도 한 포로 도래인이었다.   

 

  

 

일본 유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코는 강항으로부터 유학을 배웠고, 훗날 강항이 간양록을 쓸 수있도록 일본 지리서 등 많은 책을 갖다가 주었다.   

 

  

 

후지와라 세이코는 귀족집안이었다. 

 

  


한 사무라이는 후지와라 세이코한테 유학공부를 하고 칼을 버렸을 정도였다. 

 

  


1592년 당시는 조선이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있을 때, 일본은 서양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강양을 통하여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예 도래인

 

  

 

조선 통신사였던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일본의 요도 강가 진주성(진주시마)에 조선인들이 살았다고 했다. 

 

 

  


해유록에는 요도 강가에 진주도가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요도 강가를 가보았더니 조선통신사가 왔던 흔적이 있었다. 일본에는 조선통신사 박물관도 있다.

 

  

 

일본에는 요도 강이 있다.  

 

 

 

당인은 외국인을 말한다. 외국인들이 이 곳에 왔다는 표시이다. 

 

  



  

 

신유한은 왜인들의 말을 듣고 요도 강변에 진주도라는 데가 있는데 임진년에 진주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부 도래인


일본 책 남로지에는 박호인이라는 사람이 끌려와서 두부공장을 하며 살았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조선에 침입하여 조선 두부를 먹고 두부 맛이 좋아 두부를 만드는 사람을 끌고왔다는 것이다. 

 

  


그 두부집은 최근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 편집인

 

의복 도래인


이외에도 노비로 끌려온 사람 중에 조선국녀가 있었다. 그녀는 일본에서도 추앙을 받는다.  

  

 

그녀는 베틀을 짜서 옷을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후 조선국녀의 묘를 만들기까지 했다. 

 

  


이처럼 조선의 도래인들은 포로나 노예로 끌려가 일본에게 의복문화와 음식문화 유학문화를 전하였다. 

 

도자기 도래인

 

조선시대의 도공이었던 이삼평은 1616년 사가현의 시골마을인 아리타 이즈미산에서 발견한 백자광으로 일본 최초의 자기를 구웠다. 그는 자기 도래인이었다. 

 

현재 아리타는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자기의 발상지로서 매년 대규모의 도자기 시장을 개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리타 도자미술관, 도자기 축제 등 도자기와 관련된 관광지, 축제가 잘 발달해 있어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규슈 사가현 아리타 마을은 400년 전 조선 도공 이삼평이 고령토를 발견하고 일본 최초의 백자를 빚는데 성공한 이래 일본 도자기 역사의 중심이 되어왔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백자들은 조선인 도공들이 만든 것이다. 

 

  



  

 

삼국시대 도래인

 

삼국시대는 저수지, 세형동검, 철기, 유리, 기와 등을 전하기도 했다. 일본 곳곳에 한국인의 숨결이 없는 곳이 없다.  신석기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

 

  

 

백제의 도래인들은 저수지를 만들어 논농사를 시작했다. 

 

  

 

삼국시대는 세형동검을 전하기도 했다.

 

 

  


유리도 전달했다. 

 

  


심지어 백제 도래인들은 기와까지 전했다.  

 

  

 

그러나 일본에는 조선인의 코를 절취한 수량이 4만 여개나 되어 조선인들의 피와 눈물이 도래하였다.   

 

  


그들은 노예로 끌려와서 심지어 마카오, 리스본까지 갔다. 

 

  

 

수녀가 된 오타 줄라아와 신부가 된 권비센떼라

 

조선인들의 노예 중에는 수녀와 신부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작가 모리 레이코(森禮子)의 소설 ‘삼채(三彩)의 여자’는 한국 여성을 토대로 소설을 쓴 것이다.

이 소설은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생(生)을 마친 실존 인물 ‘오다 줄리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며칠 후의 이른 새벽. 포로들과 그들의 가족은 작은 배에 실려 바다 위에 떠 있는 큰 군선으로 옮겨졌다. 배에는 이미 많은 포로들이 잡혀 와 있었고, 배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의 몸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적게는 5만, 많게는 15만 명이나 된다.  

그 중의 한 한인 여성은 일본 이름이 '오다 줄리아' 였는데 일본장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를 일본으로 데려왔다.  
 
도리쓰 죠우(鳥津亮二)라는 일본인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연구함과 동시에 오다 줄리아의 생애(生涯)를 조명해서 논문의 부록으로 실기도 했고 일본에서는 한국의 성녀 오타 줄리아에 대한 뮤지컬 공연까지 있었다.
 
오타줄리아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일본을 정복한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구혼을 해도 그녀가 끝까지 거부하고 정절과 신앙을 지키다가 먼 섬까지 유배를 하게 된다.
 

 

 
거기서 소녀는  가장 낮은 민중들 속에 들어가 봉사도 하고 선교도 하면서 희생적인 삶을 살다가 체포돼 재판을 받고 추방되는 등 신앙인으로서의 고귀한 삶을 지속하다가 죽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지금의 일본을 세운 인물이다. 그런 인물 앞에서도 오타 줄리아는 굴복하지 않았고 끝까지 순결을 지켰고 신앙심으로 봉사하였던 것이다.  
 

 

  
이외에  ‘권 비센떼라’는 조선인은 한양 출신의 양반 자제였고, 1593년 13세의 나이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포로가 있었다. 

그는 서양인으로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세스페데스 신부에 의해 일본으로 가서 교토신학교를 졸업하고 1603년부터 예수회 수사가 되어 전도활동을 한 기록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천주교 탄압을 피해 나가사키의 시마바라(島原)에 숨어 지내면서 일본인 및 조선인들을 전도하기도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인이지만 양식있는 일본 기독교인이었다.
 
이와같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사람들이 기독교신앙에 접하게 되어 수녀가 되거나 신부가 된 역사적 기록물들이 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도래인들은 수많은 문화 유적과 유학, 음식, 의복, 도자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심지어 문화 도래인중에서는 수녀와 신부까지 탄생되었다. 도래인들은 처음부터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 문명을 개척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현재 조선인들은 임진란 때나 지금까지 어디서나 세계 각지에서 복음의 도래인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워 한국인들은 복음의 도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3. 한류 도래인

4. 복음의 도래인 (계속)

 

 

 

http://lawtimes.net/4074 (독일편) 

 

http://lawtimes.net/4098 (독일편2) 

 

http://lawtimes.net/3910  (하와이1)

 

http://lawtimes.net/3912 (하와이편2) 

 

http://lawtimes.net/4102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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