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실크로드7)

하서회랑

편집인 | 입력 : 2024/11/02 [07:44] | 조회수: 152

실크로드는 고대중국과 서역 각국 간에 비단을 비롯한 여러가지 무역을 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를 이어준 교통로의 총칭이다.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역로를 통한 복음의 교역이다.

 

이 실크로드를 통해 경교 신자들과 카톨릭 사제들이 중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경교의 수도원 대진사

 

기독교인들은 땅끌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자 6,000키로가 넘는 길을 걸어서 시안(장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돌십자가가 경주불국사에게까지 들어온 것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경교신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십자가 형태의 화강암제 석물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경교 돌십자가는 높이 24.5㎝, 너비 24.0㎝, 폭 9.0㎝로 평면은 십자가형이며 단면은 사다리꼴로 앞면보다 뒷면의 폭이 넓다.

 

일반적으로 8~9세기 신라에서 제작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의 당(唐)으로부터 경교가 전래되었음을 뒷받침하는 주요 유물로 거론된다. 신라인들이 스스로 돌십자가를 제작한 것이다. 

 

 

  


당시 동제십자가, 마리아상이 함께 발굴되었다. 이는 중국불교와 도교로 토착화된 경교가 통일신라시대에까지 전하여졌다는 증거이다. 

 

 

  

 

 

이외에도 신라에서 십자가 장식품들이 발견되었다. 모두 1,300 여년 이후에 들어오게 될 복음의 상징물이었다.

 

 

 

 

 

하서회랑(하서주랑)

 

복음 전하는 자들은 하서회랑을 통해 산 넘고 물을 건너 수천 키로 떨어진 중국의 시안까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야말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때문이었다.   

 

  

 

그만큼 실크로드는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만든 길이었다. 실크로드는 복음을 실어 나른 골드로드였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실코로드를 통하는 사람들이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는 황하강 서쪽지역에 있는 복도처럼 긴 지역이있었다. 그래서 하서회랑이다.  

 

서역 사람들이 장안으로 가거나 중국 사람들이 서역으로 갈 경우, 하서회랑(하서주랑)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이었다.  하서회랑은 고비사막과 기린산맥 한 가운데 있었다.  

 

하서주랑(河西走廊)은 실크로드의 일부로서 황하의 서쪽에 있는 좁고 긴 길을 의미하는, 감숙성의 난주, 무위, 장액, 주천, 가욕관, 돈황, 양관으로 이어지는 약 1,6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간선도로이다.

 

  

     

  

 

하서주랑에는 난주, 무위, 장예, 가욕관, 돈황이 있다. 기린산맥의 빙하가 녹아 수로가 발달하자, 도시가 세워졌다.   

 

  

 

무위

 

하서주랑은 기린산맥의 빙하가 녹은 물로 인해 대초원지역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비옥한 옥토로 인해 일찌기 하서회랑을 둘러싸고 흉노, 티벳(월지), 한이 격돌하였다.  처음에는 한이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지만 결국 점령을 하고 말았다.  

 

흉노(匈奴)는 흉칙한 노예와같은 사람들로서 기원전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북아시아 스텝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 이들은 유라시아 스텝 동부에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살고 있었다.

 

  

 

기원전 209년 이후 묵돌 선우는 흉노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 제국을 세웠다.

 

  

 

그들은 호전적인 기마민족으로서 유라시아 스텝을 지배했던 인도유럽어족인 월지를 몰아내고, 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삼았다. 흉노의 활동 영역은 시베리아, 내몽골, 신장, 간쑤성 등이었다. 한 때 한나라가 조공을 바치기도 했을 정도로 강력한 부족이었다.  

 

  

 

이들에 대한 유물이 여전히 있다

 

  

 

흉노 지역의 동남부와 국경을 접한 중국의 왕조들과 흉노의 관계는 복잡했다. 흉노와 중국의 왕조는 평화롭게 지내기도 하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서로 복종시키기도 했다.

 

흉노는 한나라와의 오랜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였고, 결국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리되었으며, 한나라는 흉노족을 강제로 한나라와의 국경지역에 정착시켰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오호 중 하나였던 흉노는 장성 이남으로 내려와 여러 왕조를 세웠다. 영어로는 훈족이었다. 장건은 서역을 개척한 사람으로서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잡혀 13년만에 탈출한 사람이다.  

 

장건(BC 138~BC126)

 

 

 

 

기원전 138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나라는 흉노에 대항하기 장건이 자원을 해서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하였다.

 

당시 서역 지방은 흉노의 세력권이었으므로, 장건이 한의 세력권인 감숙성으로 나가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흉노의 군신 선우는 장건이 대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아채고, 장건을 십여 년 동안 구류하였다.

 

그 후 흉노의 땅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흉노 서쪽에 있는 대완에 이르렀다. 기원 전 123년, 무제는 장건의 경험과 지리 지식을 활용하여 흉노를 쳐부수었다. 

 

  

 

신라 김씨의 조상, 흉노의 김일제


흉노의 김일제는 한에 포로가 되어 마부였는데 한무제를 극적으로 구해주어 그는 투후라는 벼슬을 하게 된다. 

 

그래서 무위에 가면 김일제 석상이 있다. '알타이'란 '황금' 혹은 '금'이란 뜻을 가진 알타이어의 말이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흉노가 패배하자 한나라의 포로가 되어 마부생활을 하였다.  

 

  

 

 

김일제의 후손들

 

이러한 연고로 인해 중국 무위에는 김일제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 부락은 800여 명 중에 600여명이 김씨이다. 이들은 모두 흉노족의 후손이다. 흉노족은 알타이를 근거지로 한 부족들이다. 

 

우리나라는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 언어(어족)은 우랄산맥 이동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언어들을 포함하는 언어동조대 영역이다.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투르크어족· 한국어의 언어 사이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 언어는 우랄알타이 어족이라고 배웠다. 우랄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의 언어는 알타이 어족이다. 발생지가 알타이산맥 부근이다. 투르크어도 포함해 몽골, 만주, 한국, 일본까지의 언어들이다. 어순이 다른 중국어는 빠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관성을 찾기 힘들어 핀란드의 언어학자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와 러시아의 언어학자 니콜라스 포페는 우랄알타이어족의 폐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알타이에서 온 김일제

 

흉노를 정벌한 한나라 무제 때 태자가 포로로 끌려 왔다. 알타이에서 온 태자는 알타이가 금(金)이라고 대답했다. 똑똑한 태자에게 한 무제는 김(金)씨 성을 하사했다. 김일제다. 실제로 무위에는 김일제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무위에는 김씨성 마을이 있다. 모두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김일제가 중국 한나라에서 왕망의 사건으로 신라까지 도망을 하게 되어 훗날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된다. 문무왕비에 김일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3년)은 중국 전한 말의 외척, 권신이자 신의 유일한 황제이다.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금을 뜻하는 몽골어 알티와 같은 어원을 가졌으며 김일제와 유사한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투후 김일제는 흉노에 있다가 한무제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재상직을 얻은 유명인이고, 그의 후손들은 당시 한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살다가 전한이 멸망하는 시기에 요동으로 피난왔다는 것.

 

그러므로 신라까지 흉노의 후손들이 왔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한다. 대왕암에있는 문무왕비에는 "우리 조상 김일제는 흉노의 조정(용정)에서 왔다"고 적혀져 있다.

 

 

  

 

  

 

 

투후(秺侯)는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3자불명) 하였다.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문무왕릉비』

 

 

 

 

몽골의 비석에도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고, 아버지는 무열왕인 김춘추이며,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문무왕은 순수한 신라 김씨가 아니라 수로왕의 혈통이 섞인 왕이다. 신라 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강희자전에 투후 김일제라는 이름이 나온다. 

 

  


김일제를 비롯 후손들이 잘 살다가 정변이 일어나 신라로 이주하여 경주 김씨가 되었다. 시조가 김알지다. 알지는 알타이의 우리식 발음이다. 

 

김춘추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

 

김일제의 후손인 김춘추가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통일신라 출신의 김씨가 세운 나라이기에 금나라이며, 칭기즈칸을 비롯해 원나라 황제들이 김씨였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과 청나라 황제들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 안에 신라가 있다. 

 

이처럼 한반도 동남쪽 끝에서부터 선을 길게 이어 몽골 서쪽끝 알타이산맥에 이르기까지 어떤 역사의 끈이 있었다. 선의 길이를 퉁구스까지로 줄여 보면 동호(東胡)족의 만주어 발음이 퉁구스일 가능성이 크다. 그 일파 중 동이(東夷)족 예맥족이 한반도로 내려 왔을 것 같다. 그들 중에 쇠(金)를 잘 다루던 김씨가 김해와 경주 땅에서 권력을 가졌을 듯하다. 

 

이처럼 신라의 김씨는 흉노족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흉노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유물을 통해사 나타난다.  흉노가 신라에 살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금관

 

흉노는 황금의 민족이었다. 그래서 한 무제가 김일제의 김씨 성을 부여한 것이다. 신라에서 발견된 금관도 흉노족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내몽골에도 새가 있는 금관이 출토되었다.  

 

  

 

 이스라엘의 왕관에도 새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과 솔로몬이 썼던 왕관이다. 

 

출처, 염동옥,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 신라와 가야

 

동복(청동솥)

 

 이외에 북방계 흉노족의 청동 솥이 김해에서도 출토되었다.  

 

  



  

 

내몽고 박물관에도 똑같은 청동솥이 있다. 

 

  

 

대성동에는 다음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동복이다. 

  

 

이처럼 삼국시대 신라에 흉노족이 들어왔고, 서역인들도 경주까지 았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실크로드를 따라 온 사람들이다. 실크로드는 한반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라 원성왕릉을 지키는 석인상이 서역 사람으로 되어 있다. 

 

 

 

  

 

  

 

  

요악하면 신라에 실크로드를 타고 흉노족과 서역인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실크로드는 코리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연지산

 

하서주랑 지역에서 무위를 지나 장액으로 가기 전에 연지산이 있다. 연지산은 연지의 주원료인 홍람이 나오는 곳이다.  

 

  

 

당시 신라의 여인들은 시집을 갈 때 얼굴에 연지를 사용했다.  연지를 사용하여 이마에 동그랗게 칠하는 것을 곤지라고 한다. 

  

  

 

단오에 비녀 끝에 연지를 발라 재액을 물리치고, 일부 산간지방에서 전염병이 돌 때에 예방수단으로 이마에 연지를 칠하거나 붉은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시집갈 때 악귀를 물리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문지방과 문설주에 뿌리는 것과같은 것이다.   

 

  연지

 

 

  

 

따라서 '연지곤지'라고 하였을 때 시잡갈 때 악귀를 물리치기 위하여 연지로 이마에 점을 찍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지곤지는 고구려와 신라시대에 유행하기도 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인 수산리 벽화 무덤 행렬도와 쌍기둥 무덤 행렬도에 나타난 귀족 여성들의 모습에 연지곤지를 볼 수 있다.

 

  

 

  수산리 고분벽화

 

 

이익이 쓴 백과사전 ≪성호사설≫에는 연지풍속이 흉노에서 들어왔다고 했다. 

 

 

  


흉노의 황금문화, 연지문화, 솥문화, 김씨 혈연문화가 한반도 이남까지 흘러들어왔다. 알타이 어족은 흉노와 관련하고 있다. 흉노의 연지곤지문화까지 한반도에 들어와 악귀를 쫏고 있었다. 그러나 상징적 악귀가 아니라 실제 악귀를 쫏는 예수그리스도의 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올 때까지 약 2,000여 년이 필요했다.(계속)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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