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명은 진나라가 BC221년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이미 하상주를 통해서 완성이 되었다. 여기서 상나라때문에 상인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상인의 유래
기원전 17세기, 중국에 ‘상’이라는 부족이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 초, 주나라 무왕에 의해 멸망한다. 그런데 무왕이 상나라 왕조의 후예들인 상족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 상나라사람들은 화를 피했어도 주나라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로 한곳에 정착해 살 수가 없었다.
정착을 못하니 농사도 짓지 못했다. 그래서 거리로 나서 날품팔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길을 다니며 살아가는 상나라 유민들을 가리켜 행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정착해서 농사를 못하자 대부분 물건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했기에 상인이라는 말에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덧붙여지게 된 것이다. 상인은 장사를 해서 먹고 사는 상나라 사람들을 의미한다. 유교에서 신을 상제라고 하는데 상제도 상의 언어였다.
주의 건국
주(周)는 기원전 11세기 경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상을 이어 중국에 존재한 나라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로, 관중평야에서 시작하였다.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256년까지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 무왕이 은(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여, 호경에 도읍을 정하고 봉건 제도를 시행하였다.
주원(周原)은 중국의 옛 지명이며, 서주(西周)의 수도였다. 주원은 서주(西周)의 수도로서 동주(東周) 시대가 개막하기 전인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까지 수도 역할을 담당하였다.
주나라는 산시성 치산현과 푸펑현의 경계에 위치하였다. 마속이 전쟁에 실패한 기산 근처에 있는 도시였다.
주나라는 공자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나라이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나라 주공의 후예들이다.
봉건제도 실시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하고, 개국초부터 무왕은 자신의 친족과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며, 시간지나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혈연관계를 기본으로 했다. 이것이 곧 종법적 봉건제이다. 아비의 적장자가 大宗으로 왕위를 이어받고 그의 동생들은 小宗으로서 제후가 되었다.
특히 주나라의 예의 문화는 조선시대까지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와 현대시대까지 중시하는 제사문화와 예절문화는 주나라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남송시대 주희가 제창한 성리학에서는 단계적인 개인 수양의 뜻으로 사용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본래 주나라의 통치체계를 표현하고 상징하는 뜻이었다. 그만큼 주나라는 오늘날 중화사상의 기틀을 다진 나라이기도 했다.
천명사상
특히 주나라에는 하늘의 명을 따르는 천명사상이 있었다. 천자가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통치한다는 사상이다. 천하를 통치하는 능력과 덕을 겸비한 인물에게 통치의 정당성이 부여되며 이것이 천명이다.
천명사상은 상을 멸한 주 왕조가 상 유민을 포섭. 동화하기 위한 근거로도 제시되었다. 천명사상에 따르면 주왕은 천명을 받은 군주였고, 하늘의 자손이었다. 주왕은 자신을 천자라고 하였으며 이를 통해 통치의 유일성과 신성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대행하는 천자였기 때문에 그의 지배 영역은 당연히 천하였다. 이는 구약의 단지파가 주나라까지 흘러거 하늘의 사상이 스며들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역술문화
그러나 주는 역술문화도 발달했다. 주역도 주나라에서 온 것이다. 중국사상의 처음과 긑이라고 하는 주역도 무왕이 감옥살이를 하면서 64괘를 만들었고, 주공이 여기에 패사를 붙인 것이 주역이다.
주역(周易)은 서주 시대의 점(占)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원제는 단순히 역(易)후에 경전을 의미하는 경(經)을 붙여 역경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주역은 우주의 질서를 체계화, 도식화, 수량화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상수역학이자 음양론으로 우주만물과 그 운행원리(道)를 설명 및 그 이치(우주만물의 이치)를 담은 철학서이자 우주만물의 변화를 음양의 변화원리로 풀이한 서책이며 변화의 원리로 미래를 예측하는 점서(占書)이자 그 점으로 마음을 닦는 수양서이며, 우주의 순행원리와 대자연의 질서, 인간세계의 도를 규명하는 학문이며, 달리 만학의 제왕으로 불린다.
김건희와 역술
김건희 역사가 그토록 좋아하는 역술문화도 주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는 역술인을 끼고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김건희 여사가 주가조작에 몰려있다. 그만큼 돈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고, 심지어 그의 논문도 주역의 운세를 통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다.
역술에 입각한 김건희 논문 새창보기 ㅣ 편집인
요약하면 주나라는 통치 질서 외에도, 주나라는 인문주의적인 사상의 기틀과 현실적인 정치 체계, 가정 및 종법 질서의 확립을 통해 중국 고대 질서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전제와 정약용
주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민간에서는 정전제가 시행되기도 했다. 이에 큰 영향을 받은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론과 정전제론도 당연히 주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정전제는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 실시한 토지 제도이다. 주나라에서는 사방 1리(里)의 농지를 ‘井’ 자 모양으로 100무(畝)씩 9등분 한 다음, 그 중앙의 한 구역을 공전(公田)이라고 하고, 둘레의 여덟 구역을 사전(私田)이라고 하여 여덟 농가에게 맡기고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공전을 부치어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주나라의 관제는 전근대 중국왕조들과 고려, 조선의 관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은 농지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반드시 수백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하되 절대 굽히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토지의 수용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하되 그 선후(先後)의 순서를 따라 시행한다면 정전제의 이상(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 『경세유표』 ‘정전론’ 중에서
정전제를 시행하면 비록 당장에 토지개혁의 이상은 실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대토지 소유와 지주-소작 관계의 만연으로 피폐해진 나라 재정을 튼튼하게 하는 한편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은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약용은 이러한 부호나 지주 소유의 토지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수백 년에 걸쳐서라도 점진적으로 나라에서 사들이거나 혹은 헌납·기증을 받아 정전의 본래 목적, 곧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갑골문자
주는 개화된 은나라(상나라)의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였고, 은나라 사람들이 점칠 적에 쓰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한자로 개량하여 상용 문자로 쓰도록 하여 진(秦)·한(漢)과 수(隋)·당(唐) 등 대제국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사회제도와 학술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갑골문자와 창세기
이러한 갑골문자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를 반영한 한자 배를 의미하는 (선)자의 문자가 있기도 했다.
배에 노아의 가족 8명이 승선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단지파의 후손이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단지파는 사라진 지파이다. 배와 관련한 갑골문자를 보자.
성서와 한자
이외에 한자에 성경적인 많은 의미가 있다.
주와 성서의 연관성
그렇지만 실크로드는 이전부터 유대인들이 중국까지 들어온 바이블 로드였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중국에 가서 한자를 통해 성서의 이야기를 표현했을 수도있다. 구약의 바이블 로드는 경교가 들어오면서 신약의 가스펠로드로 바뀌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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