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를 따라 서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로마로 가는 길의 출발점은 당나라의 장안이다. 중국에서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을 낙양이라고도 하고, 한국에서는 경주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교토라고 한다. 한국에서 실크로드의 출발점을 경주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신라 원성왕릉을 지키는 석인상이 서역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는 "덕수 장씨(德水張氏)는 개성시 판문구역 덕수리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장순룡(張舜龍)은 회회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원 세조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낸 바 있다. 장순룡은 1275년(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금자광록대부,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덕수부원군에 봉해졌다. 배우 장동건도 같은 성씨이다"고 말한다. 그래서 장목사는 덕수장씨의 조상은 서역인으로 보고 있다. 장동건의 인물을 보면 서역인의 피가 섞인 것으로 보인다. 이목구비가 큰 것으로 보았을 때 서역인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도 크다.
중국 서안시내 옛 장안성의 서쪽 대문 이름은 개원문이다. "서역으로 멀리 열려있다"는 뜻이다. 1987년 서안시에서는 한나라 장건의 서역 개척 2,100주년을 맞이하여 '사로군조상'이라는 거대한 기념 조형을 만들기도 했다. 여기도 서역인이 조형되었다. 맨앞에 있는 사람은 서역인이다.
이처럼 서역인들이 중국을 거쳐서 경주까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경교의 돌십자가가 경주불국사까지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마리아의 모습을 닮은 관음상까지 경주에 들어왔다. 이는 서역인들이 가져왔거나 당나라에 진출한 신라인들이 가져왔을 수 있다. 7-8세기 경이다.
1930년대 중국은 서안, 낙양, 개봉, 항주, 남경, 북경 등 6곳을 ‘전국적인 고도’로 지정했다. 서안은 당나라시대는 장안이라고 불리웠다.
장안은 오호십육국, 남북조시대에도 주목받았지만, “중국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로 평가되는 당(唐)나라(618~907) 때 가장 빛을 발했다.
서양에 로마가 있었다면 동양엔 장안이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이 7~10세기 동양에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했다.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 장안은 수도를 의미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차이니즈 드림(chinese dream)’을 찾아 “장안으로! 장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유학승, 유학생들도, 돌궐, 위구르의 부족장도, 사마르칸드, 부하라의 오아시스 상인들도, 인도, 아랍, 페르시아 사람들도 저마다의 꿈을 안고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심지어 유대인들까지 비단무역을 한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다.
장안(서안)
장안은 중국의 천년고도이자 현재 북서부 개발의 중점 개발도시이다.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특히 유서깊은 곳이다. 역사에 등장한 때가 주나라 시기로 역사가 3,000년을 넘는 굉장히 오랜 도시다. 현재 명칭은 시안(서안)이나, 옛 이름인 장안(長安)으로 더욱 유명하다.
현대의 시안시 자체는 한나라가 장안을 수도로 삼으며 발전이 시작되었지만 그 전부터 이 일대는 중국의 중심이었다. 서주의 수도인 호경,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 모두 이 일대에 위치한 도시였으니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후 907년까지 2,140년간 번영한 셈이다. 이후 장안은 낙양과 함께 중국의 양대 수도로 번창했다.
장안은 낙양(洛陽, 뤄양)에 견주어 서도(西都), 서경(西京) 또는 상도(上都)라고도 불리기도 했으며, 낙양과 함께 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 장안과 낙양이 고대 중국의 수도였던 것은, 당시 황허와 그 지류 유역이 중국에서 가장 농업생산력이 풍부했고,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안이라는 도시는 관중 지방에 속해 있었고, 중원은 낙양과 그 인근을 한정하여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현재는 고대와 현대가 아우러져 있다.
실크로드의 출발지는 신라의 경주보다 중국의 장안이었다. 둔황은 장안에서도 약 1,700키로나 떨어져 있다.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 13개 왕조가 이 곳에 수도를 세웠으며, 고대부터 ‘장안은 황제들이 수도를 세우는 곳’이라고 칭송 받아왔다. 진시황은 이 곳에 아방궁을 건축하고, 리산(驪山)에는 대규모의 역사 보고인 진시황릉을 건축했다.
한나라와 당나라 때 시안은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대외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 국제적인 대도시였다. ‘서방에는 로마가 있고, 동방에는 장안이 있다’는 말은 바로 시안의 역사적 지위를 말해준다.
시안은 세계적인 유명 도시인 아테네, 카이로, 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4대 문명의 고도라고도 불리는 ‘화하(華夏, 중국의 고대 명칭) 문명의 발원지’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뿐만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유대인들까지 몰려들었다.
유대인의 흔적
최근 중국에서는 당(唐, 618-907)나라 시절 유대인 무역상이 히브리어로 쓴 편지가 발견된바 있다.
1908년 중국 간쑤(甘肅)성 둔황(敦煌)의 막고굴(천불동, 天佛洞) 유적지를 발굴한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는 프랑스 학회지에 “유대인이 당나라 때 비단무역을 한 기록이 페르시아어로 된 고문서에 나타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 그들이 사용한 성씨로는 이(李), 장(張), 엄(俺), 금(金)씨 등이 었다. 서역인들도 장씨를 사용하였다.
송나라 개봉(카이펑)시에는 유대인의 회당도 존재했다.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실크로드편1) 새창보기 ㅣ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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