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프랑스편 7)

한인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복

편집인 | 입력 : 2024/08/22 [04:30] | 조회수: 586

 

 나의신앙유산답사기(프랑스편 5) 

프랑스의 한인교회 

 

파리의 한인교회는 17개로서 모두 합쳐 교인 수는 약 1,800여명이 된다. 파리와 근교지역(13곳), 몽펠리에 스트라스부르그 그레노블 리옹(각 1곳) 등 이다. 장로교단 8곳, 개혁교회 3곳, 침례교 2곳, 순복음과 감리교 성결교 독립교회 각 1곳 등이다.

 

칼빈이 탄생한 스트라스부르그 교회는 현지 유학생 중심 목회가 이뤄지고 있다. 그레노블 교회, 리옹교회, 몽펠리에 교회는 개혁교회다. 출석교인 200명 이상 교회는 파리 장로교회, 파리한인 침례교회, 선한장로 교회 등이다. 목회자의 3분의 1이 20년 이상 장기체류 선교자이고 목회자 평균체류기간은 13년이다. 

 

  


파리연합교회

 

 

  

 

파리연합교회는 파리 최초의 한인교회로서 66년 파독광부로 떠났던 박광근 장로에 의하여 1972년 시작이 되었다. 한인이 800여 명이 넘지 않았을 때 대 여섯명의 평신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한 것이 신앙 공동체로의 첫 걸음이 된 것이다.

 

파리연합교회는 2년 후 ‘재불 한국인 기독교연합회’로 프랑스 경시청에 등록하였으며 1978년도부터 매주 예배를 안정적으로 드리기 시작했고 1980년부터는 자체적으로 담임목회자를 청빙, 신앙공동체로서 면모를 일신했다. 1997년에는 성결교단에 가입을 하게 된다. 

 

박광근 장로, 파리연합교회장로, 프랑스 한인회 감사, 프랑스 SIPLAST(쉬트방수제품 생산업체)한국지사장(1998-1999)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파독광부 3년을 마치고 파리 소로본 대학에 유학을 해서 프랑스에 거주하게 되었다 69년 당시에는 한인들이 약 180여 명 거주하고 있었는데 한인교회가 없었다. 

 

1972년에 파리 한인들이 50-60여명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300-400여 명까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 화란에서 공부하던 고신교단의 변의남 목사가 네덜란드 캄펜에서 파리까지 7,8시간의 기차를 타고 와서 예배를 드린 것이 최초 파리 한인교회가 되었다. 그 이후 한인들이 모여들면서 여러 개의 한인교회들이 우후죽순 발생하였다. 

 

파리연합교회는 프랑스 한인교회의 모교회로서 언어와 환경, 문화가 낯선 유학생들과 고국을 떠난 상실감과 다양한 고난을 겪는 한인들을 따뜻하게 품고 위로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파리 장로교회

 

파리장로교회는 지난 1982년 창립돼 초대 구의병 목사가 5년 간 시무한 뒤 87년 8월 2대 교역자로 부임한 이극범 선교사에 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극범목사는 예장통합 교단이 프랑스에 파송한 첫 선교사로 이 목사 부임 후 파리장로교회는 현 파리 퐁뇌프교회를 분립시키는 한편 남쪽 리용과 뚤루즈 지방에 각각 교회를 개척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프랑스 파송 첫 번째 선교사로서 인재 양성에 남달랐다.

 

1987년 8월 파리장로교회에 부임한 이래 퐁네프교회(김승천 목사) 선한장로교회(성원용 목사) 삼일장로교회(박용관 목사)를 차례로 분립 개척시켰다.

 

  

 

 

  퐁네프교회

 

  선한장로교회

 

  

 

파리장로교회는 프랑스어권 사역자들을 도울 뿐 아니라 92년부터 해마다 아프리카에서 단기 선교활동도 펼치고 프랑스와 해외 작은 교회들을 돕고 있다. 

 

이 목사는 권경숙(모리타니) 백남일(튀니지) 조성덕(소말리아) 전미자(토고) 이향모(알바니아) 등 프랑스어권 선교사는 물론 프랑스 국내 사역자 고금자(리용) 정철(룩셈부르크) 한상원 선교사 등도 후원을 했다. 현재 이극범 목사는 파리 장로교회의 원로목사이다.  2017년에 은퇴했다. 

 

  

 

 

 


현재 프랑스에 사는 한인유학생및 교포는 약 17,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교회는 17개 이다. 한인들은 어디에 머물든 가는 곳마다 교회부터 설립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설립된 교회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선교를 다해서 충성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은 한인들을 축복하신다. 

 

1950년 이후 1958년의 파리 거주 한인은 약 160명, 그 중 학생이 120명이었다. 프랑스 거주 한인 교민은 1961년에 170명, 1965년에 200명으로 증가했다.

 

1960년대에는 박병선(전 프랑스 국립도서관 임시직 사서, 서지학, 의궤 연구,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에 기여), 최석규(언어학, 국립학술연구원 연구원), 김련관(유네스코 직원), 드 코스타(De Costa)-송길자(프랑스 국립도서관 주임 큐레이터), 신재창(전 대우 프랑스 사장), 민은경(화학, 국립학술연구원 연구원) 등이 파리에 와서 자신들의 분야에서 애국을 했다. 현재 이들은 모두 은퇴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프랑스 정부 장학금을 받아 매년 10~15명의 한국 학생들이 프랑스에 유학을 올 수 있었다. 한국의 공공기관, 기업, 은행들의 파리 진출과 유학생의 증가로 1970년대 초반에 400여 명이던 이주민이 1970년 중반에 1,000여 명, 1980년대 초에 3,000명으로 증가했다. 한인교회도 1,800여 명의 신도로까지 성장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한인사회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1967년 4월 동백림 사건이 터져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34명인데, 그 중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4명이 강제 귀국 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1972년 4월 21일에는 주불 이수영 대사의 자살 사건이 있었고, 1974년 7월 31일에는 북한이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납치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1978년 8월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파리 무역관 직원 한영길을 회유하여 북한으로 보내려던 사건이 미수에 그쳤다. 한영길의 서울 부임을 앞두고 부인이 부부간의 불화로 세느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이에 충격을 받아 귀국 의사도 없고 실의에 빠져 있던 한영길이 친북 인사들을 만나면서 이들에 의해 북한에 가도록 회유를 받았으나 한영길은 한국으로 귀국하고 사건이 종결되었다.

 

한인교회는 교인들 수가 약 1,800여 명으로 한인사회를 이끌고 가고 있다. 교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하나님은 인재를 양산했다. 프랑스 여러 대학에서 여러명의 한인교수들이 한국학이나 한국문회를 가르쳤다. 

 

프랑스에서 한인교수들의 활동

 

한국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는 현직 대학 교수(프랑스 교육부 국가 공무원)는 이옥, 정성배, 최석규, 박병선 이래, 이병주(언어학, 파리7대학, 은퇴), 최승언(파리7대학, 언어학), 심승자(동양어대학, 언어학, 은퇴), 이진명(리옹3대학, 역사학), 김보나(보르도3대학, 문학, 시인), 샤발(Chabal)-최은숙(르-아브르대학, 언어학, 문학), 김대열(동양어대학, 종교학), 메르시에(Mercier)-홍석경(보르도3대학, 사회학, 커뮤니게이션), 권용해(라-로셸 대학, 언어학), 정은진(동양어대학, 문학), 김혜경(액스-앙-프로방스 대학, 언어학) 11명이다.

 

동양어학과 김대열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 출신으로서 필자와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이들 중 2011년 현재 현직에 있는 사람은 9명이며, 지금은 대부분 정교수로 되었거나 은퇴를 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은 프랑스와의 수교 50년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이진명교수는 한불 관계사, 독도 및 동해/일본해 명칭 표기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현대판 독립군이다.  

 

한국인들 외에 프랑스인 한국학 교수진은 정교수 2명과 부교수 7명으로, 프랑스 한국학 전체 교수진은 파리의 3개 대학과 지방의 5개 대학에 정교수 3명, 부교수 15명이다. BTS로 인해 프랑슨는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1년 프랑스의 2개 대학(파리7대학, 동양어대)의 학사 과정(1~3학년)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거나 지방의 5개 대학에서 한국어를 제3외국어로 선택하여 배우는 학생이 1,200여 명에 달하는데, 이 중 한국어 전공자 수는 600여 명이다.

 

프랑스의 유학생 한인화가들

 

1950년대에는 임영방, 손동진, 김흥수, 김환기, 남관, 이성자, 이응로(1904~89, 1958년 도불) 등 16명, 1960년대에는 변종하, 한묵, 문신, 김기린, 방혜자, 신용학, 김창렬, 이자경 등 23명이 파리에 왔다. 임영방은 이중섭의 스승이다. 

 

1970년대에는 임세택, 김순기, 이항성, 이우환, 김인중, 강정완을 포함하여 모두 35명이 파리에 왔는데, 그 중 21명이 공부하고 귀국했거나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로 갔고, 14명은 파리에 남아 예술 활동을 계속하다가 작고했거나 현재도 계속하고 있다. 이름이  있느 화가들 중 프랑스 출신자들이 더러 있다. 

 

1980년 이후로 파리에 유학 온 화가 지망생이 급증하여, 1980년대에는 135명, 1990년대에는 96명에 달했지만 최근까지는 수백명에 육박한다. 

 

건축가 지망생들도 수십 명이 파리에서 유학하고 돌아갔으며, 음악 분야의 인사로 파리에 거주하며 활동을 하는 이들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 바이올린니스트 강동석, 정명훈(국립 바스티유 오페라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 역임)이다.

 

 


이처럼 파리의 한인들은 교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교회가 설립된 이후 한인들은 과학과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다른 유럽과 달리 병인양요와 파리강화회의 등 일찍부터 독립군들이 활동한 곳으로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정신못지 않게 나름대로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독립정신을 계승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정신적 구심점인 한인교회

 

한인교회들은 한국과 프랑스간의 유대관계를 잘 활용하여 한인들의 정신적 신앙적 구심점의 역할을 하고 유럽의 관문이라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아프리카 선교의 박차를 더하고 있다.  특히 이번 파리올림픽에서의 13개 금메달로 인해 한국이 올림픽 8위를 한 것도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를 수확하며 종합순위 8위로 마무리했다. 직전 도쿄 올림픽 때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0개 등 종합 순위 16위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양궁은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파리의 한인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한인들로 하여금 각 부서에 뿌리를 내리게 했고, 이러한 복의 상징은 올림픽의 메달을 통해서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펜싱의 종주국이 프랑스인데 결승에서 프랑스의 자존심을 구겨 버렸다. 펜싱의 검이면에 성령의 검이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기적은 멈추지를 않았다.  

 https://www.lawtimes.net/5294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프랑스편7)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