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은 팩트 전쟁이다.
1950. 6. 28. 새벽 2시 30분에 한강이 폭파되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국군이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를 폭파했고, 이 때문에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 수백 명이 희생됐다고 알려졌다. 희생자는 ‘800명’으로 언급됐고 ‘4000명’이었다고 쓴 출판물도 있었다. 이승만 본인은 피란을 갔으면서 국민은 정작 피란 가지 못하게 죽였다는 것이으로 이승만을 런승만으로 비하했다.
하지만 영화 ‘건국전쟁’은 ‘폭파 당시 민간인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통제했고, 폭파로 죽은 사람들은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 70명’이라며 민간인 희생설을 반박했다. 그리고 끝까지 국민과 함께한 대통령으로서 그를 추켜 올린다.
북한군 전차가 28일 오전 8시경에 서울시내 삼각지로 들어왔다고 한다. 한강교 폭파 시점은 새벽 2시 반쯤. 북한군 주력이 이날 오전 11시30분에 들어왔기 때문에 최소 5시30분, 최대 9시간이나 빨리 폭파했다고 볼 수도 있다.
런승만
지금까지 좌파들은 이승만을 폄하하기 위해서 700-800여 명이 죽었다고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서울시민을 두고 도망한 런승만 대통령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한 김덕영감독의 입장을 보자.
김덕영 감독은 2024. 3. 22. 자신의 책 출판 기념회에서 홍천에 사는 김충남씨의 증언을 영상으로 보여 주어 자신이 만든 영화의 팩트가 맞다고 했다. 즉 그 날 민간인 희생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현필 역사 강사(전남대 역사학)는 건국전쟁이 거짓말 영화라고 폄하했다.
140여 만 명 중에 도강한 사람은 25만 명이고, 잔류한 사람들은 120만 명이었다고 했다. 훗날 남아있었던 사람 중에 55만여 명이 북한에 부역을 하였다고 조사를 하였다고 했다.
황현필씨는 국방부 자료(한국전쟁사 1권 547p)도 민간이 사망이 500-800여 명이 있었다는 자료를 제시한다.
황현필씨의 강의도 자료를 제시하기 때문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황현필은 국방부 백서와 종군기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민간인들이 700-800여 명 죽었다고 증거를 제시한다. 먼저 그는 건국전쟁은 허구의 영화라고 시작한다.
황 강사는 민간인 희생이 많았다고 보고 있다.
황강사는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책을 쓴 로이 애플린이라는 당시의 종군기자도 500-800여 명이 공중으로 튀어오르고 다리 아래롤 쏟아져 내렸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국방국 정훈국 이창록 소위도 피란민들이 다리 밑바닥을 박박 긁으며 죽기 전 본능인 듯 저마다 어머니를 외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재구 중위도 수백 수천명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미군사고문단 자료도 500-800여 명 죽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김덕영감독은 옆에 부교가 있어서 민간인들을 미리 피신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민간인 통제를 한 후에 한강다리를 폭파시켰다고 주장하여 민간인의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국방부의 700-800여 명이 죽었다는 자료는 종군기자들이 본 내용을 토대로 해서 만들었다.
그런데다가 당시에 한강에 떨여져 수백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시체를 본 사람이 없는 것이다
다리위 사진을 보면 주로 경찰들이 탄 트럭이다. 당시 트럭에 탄 경찰은 77명이 죽는다.
그러나 민간인들도 일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폭파로 많게는 800명, 적게는 200여 명이 사망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폭파로 다리에서 떨어졌던 이의 증언이 아직 戰史에 없다).
‘민간인 희생자 800명’설은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이 ‘500~800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폭사 또는 익사했다’고 추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추정치였을 뿐 검증된 자료가 아니다.
1964년 설립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현 군사편찬연구소)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낸 ‘한국전쟁사’ 1권(1977년 개정판)은 “한강 다리 폭파로 희생된 사람 중 경찰 76명이 순직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신기철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 조사팀장은 2014년 연구서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서 이를 다시 확인했다. 경찰 70여명 외에 민간인 희생자는 확인되지 않았고, 당시 한강 다리는 군사 통제로 민간인이 건널 수 없었다는 것이다.(6·25때 “서울 남으라” 했다? 런승만 연설은 없었다 (chosun.com)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 스프링필드에 살고 있는 이창복(육사8기) 예비역 육군 준장은 “한강교 폭파는 황원회 중위, 한강철교는 저와 김재식 대위, 제1공병단 임흥순 중위가 맡았다”고 회고했다.
“한강교와 한강철교 3곳을 포함해 4개 교량에 폭약을 설치했는데 폭약량 계산을 제가 했었어요. 6월 26일 저녁에 공병감실에 불려 가 폭약 정찰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현장에 가 보니, 한강에 다리가 4개더군요. 한강교 남쪽 파출소에 방공호가 있어 그것을 이용했어요. 다시 공병감실로 돌아가 폭약량을 계산하고 폭약 신청을 한 뒤 김포 공병학교로 돌아갔다가 남산에 야전텐트를 치고 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오전 10시 폭약을 수령하고 한강교에 400파운드 정도의 폭약을 설치했으나 불발에 대비, 넉넉하게 900파운드를 썼어요. 하지만 27일 당시 전세가 호전돼 장착한 폭약을 거둬들이라는 명령을 받지는 못했어요. 전방 상황이 좋으면 차량이 미아리 쪽으로 향했고 상황이 나빠지면 한강 이남으로 향했어요.
(28일 새벽 2시경) 칠흑 같은 밤이었고 비가 내렸어요. 폭파 당시 교량 양측에 1개 분대 정도의 공병대를 배치, 인마(人馬)와 차량의 통행을 저지시키려 했으나 당시 동원된 병력이 부족해 공포까지 쏘았으나 저지하기 어려웠어요.”(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G&nNewsNumb=201307100031)
민간인들 숫자가 워낙 많아서 저지하기 어려웠다고 진술한다. 민간인이 일부 사망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南廷屋) 박사는 “한강교 폭파는 폭파 당시 인명 및 장비 피해가 있었지만, 미군이 참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강교 폭파는 한강 방어선을 6일간이나 지탱하게 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6월 29일 맥아더의 한강 전선 시찰이 이뤄졌으며 뒤이어 7월 1일 미 지상군 참전이 가능했던 것이죠. 미군 참전으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이어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해 결국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됐습니다.”고 했다.
최창식, 재심에서 무죄
법도 갈팡질팡한다.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던 채병덕 육군 참모 총장은 6.25전쟁 중에 전사했다. 이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 정부는 실제로 폭파를 지휘했던 최창식 공병감을 처형했다. 1962년 재심에서 폭파 명령의 책임은 채병덕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져 최창식 공병감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황현필 역시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홀로 피난후 거짓 방송을 했다며 런승만이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유튜버 GROUND C는 반박을 한다.
이승만은 런승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비겁하게 홀로 피신하지 않았다. 그의 연설이 이를 반영해 준다. 1950. 6. 29 이승만은 피난을 가면서 연설을 한다.
“내가 지나간 오륙 차 동안 연속으로 자랑한 것은 군사상 원조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내가 올 것을 믿고, 안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정치 하는 나라에서 그것은 (군사적 원조가 오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나는 상당한 시간 동안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한 말이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원수들이 사방에서 중무장한 비행기와 탱크와 군함을 몰고 와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군경은 역경을 무릅쓰며 사방으로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어제) 의정부 일대에서는 적군이 중무장한 수십 대의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왔습니다. 우리 군인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아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했으나, 나중에는 침략하는 도로에 지뢰를 매설해 탱크를 격파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적군은 탱크를 세우고 내려서 지뢰를 제거하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우리 군인들은 지뢰를 치우는 적군을 소총으로 저격하고자 했으나, 장거리 소총으로 무장한 적군에 반해 우리 군인들은 그런 무기가 없어 대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기도 없이 적과 대적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우리 군인들은 맨손으로 용감히 싸웠습니다. 결국 적군의 선봉대는 서울 외곽 수십 리 지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리는 약 400미터 거리).
이런 상황을 보고 나는 워싱턴과 동경에 밤과 이른 새벽 시간에 전화와 전보로 연락을 취해, 맥아더 장군과 통화를 했고 (워싱턴 주재 우리 대사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과도 통화를 했습니다. 내가 말한 바는 적이 우리 대문을 침입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기를 주면 우리는 미국, 일본, 한국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과 함께 온 국민이 나서 국경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트루먼에게 미국 의회를 통과하고 미국 대통령 승인도 난 1,000만 달러 원조가 우리가 이와 같은 비상사태를 맞이하고 있을 때 도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그 사이에 무초 대사의 노력도 있고 하여 (우리보다 더 긴급히 워싱턴과 도쿄에 이 상황을 호소하여), 오늘 오후에는 맥아더 장군이 내게 보낸 전보에서 중요한 언급을 하였기에, 이를 동포에게 급히 알리고자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바를 모두 철파하고, 이 기쁜 소식을 방송하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중대한 작전이 준비되고 있고, 충분한 원조가 가는 중입니다’). 맥아더의 서명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긴급한 정보 보고는 한국 원조가 해군과 공군 양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조는 오직 38선 이남을 방어하는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전폭기를 보내서 침략자들을 격파하고, 전투기로는 탱크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또한 처치 (Church) 장군은 즉시 동경에서 서울로 와 우리 국방 사무에 고문으로 도울 것이며, 고급 참모들도 (여럿이 오고, 군사 원조물자도 지금 오는 중이며, 또한 계속해서 올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국민이 피난을 떠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유력한 나라들도 공산당 세력 수중에 넘어갔고, 일부는 넘어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군대가 강력하게 싸워야 합니다. (원조가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서쪽 옹진반도부터 동해까지 38선 모든 지역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전선에서 적과 힘차게 싸우고 있는 우리 군과 경찰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히, 의정부 지역에서) 무기도 없이 용감히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더욱 고맙습니다.
출처 : 자유일보(1950년 6월 27일 밤 10시 방송 이승만 대통령 육성 연설 전문 < 류석춘의 시간을 달린 지도자, 이승만 < 연재 < 기사본문 - 자유일보 (jayupress.com)
결론
한강교 폭파 논란의 이면에는 폭파에 따른 긍·부정 측면이 상존한다. 조기 폭파로 희생자가 생기고 국군의 주력 장비와 무기, 정부의 재산이 한수 이남으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점이 부정적인 면이다.
그러나 한강교 폭파로 인민군의 진격을 늦춰,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미군(美軍) 참전이 가능해졌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승만은 런승만이 아니었다. 결국 건국전쟁은 팩트전쟁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에서 김덕영감독은 역사 팩트전쟁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졌음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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