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이란편3)

편집인 | 입력 : 2023/10/28 [14:20] | 조회수: 233

 

http://lawtimes.net/4892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이란1)

http://lawtimes.net/4898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이란2)

 

이란과 한국과의 관계 

 

이란은 반미, 친북성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의 관계가 좋았다. 통일신라 시기엔 이란의 전신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무역으로 교류가 있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혜초가 파사국(波斯國)도 갔다 왔음이 언급된다. 

 

  

 

 

왕오천축국전


신라 고승 혜초의 가 쓴 <왕오천축국전>중 파사(지금의 이란)와 대식(아랍)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다시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에 이른다......”

 

  

 

신라의 승려 혜초는 723년부터 727년까지 인도를 비롯한 파사,국, 대식국등을 다니면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책을 썼다.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로 손꼽히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여행기이다. 천축은 인도를 말한다. 

 

혜초는 불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723년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천축(인도)으로 향한다.

 

  


혜초는 당시 서역 요충지인 토화라(吐火羅: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얼마간 머물다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파사(波斯: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와 대식(大食: 아랍)까지를 방문한다. 헤초는 이란의 니샤푸르를 방문하였다. 

 

  


마슈하드는 이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시아파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 도시는 테헤란에서 동쪽으로 85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2016년 3,372,090명이었다. 김승호 전 이란대사는 헤초가 마슈하드에까지 왔다고 했다. 

 

  

 

  마슈하드

 

헤초는 마슈하드까지 방문하여 4년 동안의 ‘서역기행’을 책으로 남겼다.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내용에는 파사국을 방문한 기록이 나온다. 

 

대발률국(大勃律國), 양동국(楊同國), 사파자국(娑播慈國), 토번국(吐蕃國, 티베트), 소발률국(小勃律國), 건타라국(建馱羅國, 간다라), 오장국(烏長國), 구위국(拘衛國), 람파국(覽波國, 남파국, 람파카), 계빈국(罽賓國, 카피시), 사율국(謝䫻國), 범인국(犯引國, 바미안), 토화라국(吐火羅國, 토카리스탄(발흐)), 파사국(波斯國, 파샤), 대식국(大食國, 니샤푸르), 대불림국(大拂臨國(비잔틴제국)

 

앙오천축국전은 둔황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루우브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러 층으로 뚫린 석굴은 현재 확인된 것만도 492개에 이르고, 2천여 개의 불상과, 총 면적이 4500㎡에 이르는 벽화가 있다. 사막(莫)의 높은 곳(高)에 있는 석굴(窟)이라 하여 막고굴(莫高窟)이라 부른다

 

  

 

이란과의 관계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신라는 이란과 관계를 가졌다. 이란의 구전 설화집 『쿠쉬나메(KUSH-NAME)』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설화이지만, 1300여년 전 신라시대부터 페르시아와 교류가 있어, 당시 유물에서 페르시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아랍의 문헌에 ‘al-Silla’ 또는 ‘al-Sila’가 등장하는데, 이슬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우리 한반도의 ‘신라’라고 한다.

“아랍어로 표기된 al-Shila, al-Sila 등의 지명은 ‘신라’의 음역이다. 한국외국어대 김정위 교수도 “‘al’은 관사이므로 Sila는 ‘신라’의 음역임이 명백하다” 했다. 이들이 우리의 신라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은잔은 신라 5세기의 보물로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무늬이다. 페르시안인들이 신라에까지 진입한 것이다.  

 

 

 

 

경주 괘능에 가면 서역인들의 비석이 있다. 괘릉은 신라 제 38대 원성왕(785~798)의 능이다. 

괘릉이라는 별칭은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연못이 있어 유해를 수면상에 걸어 안장하였을 것이라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걸어놓은 능’이라는 뜻이다.

 

 

 

왕릉 앞 석상들 가운데, 마주보고 있는 무인상 한 쌍이 이국적인 외모로 깊은 눈, 넓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등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당시 신라를 떠올리면, 무인석의 모델이 무역을 위해 신라에 왔다가 눌러 살게 된 서역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란인들일 수도 있다.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사진전에도 한국과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1962년 수교 

 

  

이란은 대한민국과 교역을 시작한 중동 국가 중 최초의 나라이고,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중동진건설에 진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1961년 대한민국의 중동친선사절단이 이란을 방문하여 이듬해(1962년) 10월 23일 수교하였다. 1967년 4월에 주이란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고, 1969년 5월에는 우호조약이 체결되었다.

1973년에는 이란-북한이 수교하였으나, 형식적인 관계에 불과하였다. 1975년 8월에 주한 이란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75년 5월에는국내 최초로 이스파한 군용 공장 공사를 위해 이란을 진출한다. 

 

  


사실 1970년대 한국과 이란은 같은 제1세계 국가로 개발독재를 통한 급진적 근대화 추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즈음하여 이란으로 2만 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일하러 갔다.

1977년 6월 17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 시장의 서울특별시 방문을 기념해 서울특별시에 '테헤란로'를, 테헤란에는 '서울로'를 명명했다.

  

1961년 8월 대한민국의 중동친선사절단이 이란을 방문한 이래 양국은 1962년 10월 23일 수교하였다.

 

 

 

1967년 4월에 주이란 한국대사관이 설치되면서 대한민국과 이란과의 우호관계는 긴밀해 졌다.

1971년 10월 이란 건국 2,500주년 기념식에 김종필 총리가 대통령특사로 참석하였으며 그후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수차례에 걸친 특사 및 사절단이 상호방문 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는 더욱 견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중동국가중에서도 비교적 대한민국의 대(對)UN정책을 지지해 온 우방국가이다.

한국은 1974년에 이란에 진출한다. 2016년까지 양국의 우호관계는 깊었다. 

  

이란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다음과 같다.

 

박티아리 수력발전 댐(대림산업, 약 19억달러)

이스파한-아와즈 철도(대림산업, 약 53억달러)

철도차량 150량 공급 사업(현대로템, 2.6억달러)

사우스파 12 확장 Ⅱ 사업(현대엔지니어링, 36억달러)

NGL-2300 건설 사업(천연가스액 플랜트, 대림산업, 9억달러)

잔잔·네이자르·바프 가스복합 발전소(현대엔지니어링, 현대건설, 대림에너지, 각 4~5억달러)

 

대한민국의 대(對)이란 수출은 60억6827만 USD, 이란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13억74837만 USD(각 2011년)에 달하여, 이란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21위의 수출국이자 제12위의 수입국이다.

모두 320 명(재외국민 268 명, 시민권자 52 명)의 한민족들이 이란에 거주(2015년 9월 기준)하고 있다. 서울에 테헤란로가 있고 테헤란에 서울로(路)가 있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사태로 인해 관계가 어떻게 유지될지는 미지수이다.  

 

  

 

이란의 한인교회

 

이란의 한국교회는 1974년부터 세워졌다. 1974년 창립한 테헤란 한인교회는 120여 명의 한인들이 신앙생활을하고 있으며, 이란 교민의 1/3가량이 종교활동을 하고 있어 사실상 이란 최대 한인 공동체이다.

 

  

 

  

 

  

 

그러나 2017년부터 이란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교회를 압수수색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란대사는  "영장이나 권고 없이 종교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곳을 압수수색한 것은 대한민국 재외 국민의 주권과 인권이 침해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란 정부가 담임목사의 종교 비자를 연장해주지 않아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성도들의 신분증을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고 밝히기도 하여 사실상 신앙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현재 이란에는 한인교회가 정식으로 신앙활동을 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나 교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해하고 있다. 

 

이처럼 이란의 한인들은 중동붐을 타고 가 근로를 하면서 교회부터 세우기 시작했다. 한인들은 아랍이나 중동상관없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워 영적인 유대인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중동에서 교회사역을 한 사람중에 예장통합 교단의 이만석 목사가 있다.  

 

 

  


그는 86년부터 90년까지는 근로자들 대상으로 상담과 예배를 통하여 사역하였으며 91년부터는 본격적인 사역으로 현지인 교회의 목회자들 약 14명과 강단 교류를 통하여 이란 교회를 알아가며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2004년에 추방당하였다.  

 

이목사는 이슬람은 기독교를 뿌리째 뽑으려는 악령의 종교라고 했다. 예수 십자가를 부인하고, 예수 부활도 부인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다고 했다.

또한 이슬람은 3위 1체를 부인하고  쿠란에 기독교인은 지옥에 간다고 적혀 있으며 기독교는 무슬림을 타락시키는 종교라고 오도하고 있으며 기독교인 뿐아니라 기독교인의 친구도 지옥간다고 말하고 있다고 했다.  

 

당분간 이란에서의 공적 신앙활동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교회를 재개하여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한국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없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통하여 영적 안정과 정신적 안정을 갖고 교회야 말로 이민사회의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들은 어디를 가든지 에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인들은 페르시아에서 기독교의 유적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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