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이란편1)

편집인 | 입력 : 2023/10/18 [05:36] | 조회수: 708

하마스와 이스라엘

 

20203. 10. 7.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전방위 공격을 감행한 가운데 8일에는 레바논의 무장단체 헤즈볼라 또한 이스라엘에 박격포를 발사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무차별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스라엘도 가자지역을 공격하여 수 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란의 개입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모두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지원을 받는 단체다. 이란, 하마스, 헤즈볼라는 모두 내년 11월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외교 치적을 위해 추진해 온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에 격렬히 반발해 왔다.

 

이란이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 등을 앞세워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 ‘선제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을 16일(현지시간) 내비쳤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지상군 투입을 막고 이스라엘 북부 전선을 교란하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과 헤즈볼라에 “이번 사태에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그런 만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이란 대 미국 및 서방국 간 대리전 양상으로 중동 전체로 확전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

 

최근 이란이 이스라엘 근처로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가자지역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통제가 불가능할 것이라며 경고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만약 시오니스트정권(이스라엘)의 범죄가 계속된다면 무슬림과 저항군은 참을 수 없을 것이며 누구도 멈출수 없을 것이다"며 전쟁개입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이란은 연일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다. 

 

  


전쟁이 발생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태가 오고갈 것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시리아나 이라크, 요르단 등 경계지역이 있는 국가들과 분쟁이 있어왔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쟁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분쟁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로 1600㎞ 떨어져 있어 국경분쟁도 없고 경제적으로 경쟁하거나 자원 분쟁이나 과거 군사적으로도 충돌한 적도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국경을 접하는 나라들인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와 분쟁이 있었고 이란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걸프만이 분쟁 또는 관심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이란 양국 간의 분쟁 원인은 직접적인 원인과 근본적인 원인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립의 원인

 

현재 대립의 원인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이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이란 핵시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이스라엘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이란과 경쟁하는 나라를 비롯해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른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등도 핵무기를 가지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중동정세가 불안정해져 결국 중동에서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인 이스라엘의 독점적인 위치가 깨지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되면 이스라엘과 국경분쟁을 하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를 이란이 군사적으로 지원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위태롭게 되는 우려가 있다.

 

현재 이란은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라믹 지하드, 팔레스타인 해방전선 등의 테러집단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고 있으면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것을 독려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이란이 북한과 손을 잡고 있다. 

 

  

 

  

 

실제로 이란제 무기들은 2006년 이스라엘과 레바논 전쟁, 그리고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테러 공격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 개발 후 핵무기를 이들에게 공급할 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있다. 

 

이스라엘, 이란의 핵무기 개발 공격

 

이처럼 양국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때문이다. 이란은 2012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해왔다.  

 

2023. 1월에도 이스라엘은 이란 이스파한에 있는 군수공장이 드론에 의해 공격을 받았는데 이란은 이스라엘이 배후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미 전쟁기운은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2006년부터 시설과 핵과학자 공격


이스라엘은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이란 핵과학자와 시설을 꾸준히 공격하여 왔다. 2010년 1월 테헤란에서 핵개발 고문 마수드 알리모하디가 차량폭발로 사망했고, 11월에는 핵개발책임자 샤리아리가 차량폭발로 사망했다.

 

2011년에 7월에는 물리학교수 다리우시레자이레저드가 총격으로 사망했고, 2020년 11월에는 이란최고 핵과학자 모센파크리자데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란은 모두 이스라엘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 이란의 핵무기 불용

 

이스라엘의 입장은 이란의 핵무기를 불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핵과학자를 죽이고 핵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다. 

 

네타나후 이스라엘총리는 "이란이 핵능력 확보를 통해 이스라엘제거라는 학살적 목표를 실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나의 정책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은 팔레스타인전쟁을 빌미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

 

원래 이스라엘은 이란과 관계가 좋았다. B.C 6세기에는 고레스왕이 이스라엘을 귀환하게 해주었고, 에스더는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으며, 다리오 왕은 성전건측을 하게끔 하였다.

하나님은 고레스가 나의 목자라고 까지 칭하였다. 실제로 이란은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학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팔레스 왕까지였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정권이 무너지기까지 이스라엘은 이란에서 원유를 공급받기까지 하였을 정도이다. 이러한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깨지게된다.

미국위주였던 팔레비정권이 무너지면서 이스라엘과 이란은 적대적이 되었다.   

 

이란혁명이 발생하면서 이란이 미국을 적대시하게되자,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악화된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중동의 작은 미국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정책결정에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워싱톤의 정가와 경제계, 법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다.

 

The Little Satan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이 미국을 'The Great Satan', 이스라엘을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The Little Satan'이라고 낙인찍은 것도 그 때문이다. 

 

1979년 이란 혁명 전까지 이란을 통치했던 팔레비 국왕은 해외에 망명해 있다가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1951년 정권에 복귀하여 친미, 친영의 입장을 띠었다.

 

당시에 이스라엘도 팔레비 정권과 매우 친밀했으며 팔레비는 충분한 오일 생산을 독려해 1973년부터 1978년까지 국제 원유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미국와 이란과의 관계가 깨지면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도 깨지기 시작했다. 

 

1979년 이후 이란의 혁명정부는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체제로 전환을 추진하면서 농업을 강조했고 석유도 물품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벌 만큼만 생산하도록 정책을 전환하면서 미국의 경제적인 이해와 상치되기 시작했다.

전 세계 매장량의 57%를 가진 이란을 비롯한 중동이 이란만을 제외하고 대부분 친미정책을 구사한다. 

 

이란은 어떤 나라인가?

 

  

 

수도는 테헤란 이고, 인구는 약 8,000만 명이다. 면적은 한반도의 7.5배 이고, 공용어는 페르시아어 이다.

 

페르시아 어원은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인 파르스에서 왔다. 2,300년전 아케메네스 왕조(B.C 550-B.C330)는 200년에 골쳐서 거대한 제국을 이룬 왕조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벌벌 떨게 했던 페르시아제국(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리스인들에 세운 셀루쿠스 왕조와 다하족이 세운 파르티아 왕조의 지배를 받아왔다. 징기스칸이 사라지듯 페르시아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기원후 226년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계자임을 자청했다. 자신을 샤한사('샤'는 왕이고, '샤한샤'는 왕들의 왕)라고 칭했다. 

 

사산왕조

 

그 이후 페르시아의 부활이 사산왕조를 통해 살현되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중세 페르시아 왕조의 하나로, AD 226년에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 226-241 재위)가 파르티아(Parthia) 왕국을 점령한 뒤 건설하였다. 그러나 사산왕조는 AD. 651년에 아랍[사라센 제국]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약 400년 지속된 왕조였다. 

그러므로 이란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와 사산왕조는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알리는 왕조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세운 아르다시르 1세는 오늘날 이란 남서부 파르스(Fars) 지방에 있던 이스타크르(Istakh, 고대의 페르세폴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제사장인 사산(Sāsān)의 손자이자, 이 파르스 지방의 실권자였던 파파크(Papag 혹은 Papak)의 아들이다.


왕조의 명칭은 아르다시르 1세의 조부 이름인 사산(Sāsān)에서 유래한다.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를 계승하고, 그 중세적 재흥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로 불렸다.

조로아스터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A.D 661년 이슬람 제국의 정복으로 멸망하기 이전까지 고도로 발달된 페르시아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의 이란을 중심으로 하여, 이라크· 아르메니아·코카서스·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인도 북부·터키 동부에 이르렀으며, 호스로 2세(Khosrau II, 590-628 재위)의 치세기에는 팔레스타인(610)·이집트 지역도 제국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사산왕조는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을 찾고자 다시 일어섰다.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 공화국  

 

그러나 현재의 이란은 사산왕조처럼 이란의 토착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국교를 이슬람으로 표방하는 서아시아의 시아파 이슬람 공화국이다. A.D 7세기에 사라센의 침입으로 이슬람공화국이 되었다.

이란은 북서쪽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과 접경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카스피해가 있으며 북동쪽에는 투르크메니스탄,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남동쪽에는 파키스탄이 자리하며, 남부 해안선을 따라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튀르키예(TURKEY)와 이라크와 접경하고 있다.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교를 따르는 무슬림은 크게 두개의 종파,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로 나뉜다. 오늘날 전 세계 약 18 억 무슬림 중 약 85%가 수니파이고 15%는 시아파이다.

시아파는 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수니파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40 개 이상의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한다.

  

 

 

후계로자로 인한 갈등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은 이슬람의 시조 무하마드가 서기 632년에 죽으면서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자 갈등이다. 수니파는 아랍어로 '순나를 따르는 자' 라는 뜻이다. 여기서 순나는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말한다.

 

다수인 수니파는 선출된 칼리파(대표자)가 후계를 이을 수 있다고 본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혈통, 알리를 계승자로 여겼다. 즉 수니파는 합의에 의한 결정을 중시했고 시아파는 혈연을 중시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니파는 무함마드가 사키파에서 아부 바크르 아스시디크를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보는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후계자로 세웠다고 본다. 

 

시아파의 알리 피살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였던 알리는 이라크에서 쿠데타 세력에게 암살당했다. 그러자 알리의 추종자들은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만이 할리파(칼리파)의 자격이 있다'면서 새 지배자들에게 저항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모두 수세기에 걸친 이데올로기 간의 경쟁의 최종 산물이다. 두 종파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교리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서로를 이용했다.

 

서구의 개입으로 시아파와 순니파의 갈등 고조

 

수니파와 시아파는 1400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 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함께 살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중동 여러 국가와 종교 세력들이 종교적,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수니파와 시아파 간 분열이 심화되었고, 서구(미국)의 개입에 지역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며 이 분열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팔레비의 축출로 시아파 강성

 

특히 이란의 팔레비 축출은 시아파에게 힘을 실어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란의 국왕 무하마드 리자 팔레비(Reza Pahlavi) 는 미·소 냉전 체제에서 미국에 의지하며 국내 민주주의를 억압해 왔다.

 

1970년대 미국의 이란 중시 중동 정책 하에 이란의 석유 수출이 급증했는데, 일부 국왕 측근 만이 경제 붐에 편승하여 부를 누렸고, 일반 상공인과 농인 대부분은 파산하였다.

이렇게 국정운영의 비민주성,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 서구화 과정에서의 성직자 불만 고조로 왕정 체제의 위기가 가중되었다.

 

호메이니, 자신만이 세계 무슬림의 지도자

 

1979년 정권을 장악한 호메니이는 자신이 한 나라에서 혁명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순히 시아파와 이란의 페르시아인의 지도자가 아니니 전체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사우디 아라이바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의 종교지도자들이 급빈적 수니파 단체들을 독려하여 이란에 대항하게 하였다. 

 

알케에다, IS는 급진 순니파

 

그 결과는 알 카에다(Al Qaeda), 탈레반(Taliban), ISIS(The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와 같은 급진적이며 폭력적인 수니 정치 테러 집단이 발생하게 된다.

이 집단들의 목표는 세속적 정부 체제의 전복과 이슬람 국가의 설립 뿐만 아니라, 시아파를 억압하는데 있었다. 결국 급진적 수니파와 시아파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은 시아파와 순니파의 전쟁 

 

그 중의 하나가 이라크 이란의 전쟁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8)은 이란의 시아파 혁명에 대해 가장 폭력적으로 반응한 국가는 이웃나라 이라크였다.

당시 이라크의 수니파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1980년, 이란의 유전을 장악하고 호메이니의 혁명을 파괴하기 위한 침공을 명령했다.

 

이라크의 침략과 후세인의 잔혹한 정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아랍 전역의 수니파 무슬림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전쟁은 또한 이라크 내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과 차별의 시작이었다.

 

이라크에서는 시아파를 무참히 숙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함으로 후세인은 사망했고, 이라크는 시아파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시리아에서는 여전히 이란의 군대, 레바논의 헤즈볼라, 그리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민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시아파 주도 정부가 수니파 야당과 맞서 싸우고 있다.

ISIS를 비롯한 수니파 테러 단체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있는 시아파와 그들의 예배당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ISIS 수니파이다. 

 

요약하면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결은 중동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다. 무하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하니 사로 후계자를 자청하여 지금까지 피터지게 싸우고 있다.   

 

시아파 혁명에 성공한 이란 광장 한복판에는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사진이 있다. 

 

  

  

이란은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

 

  


이러한 이란은 시아파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로서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원래 이슬람국가가 아니다.

티우의 월남, 팔레비의 이란, 러시아의 짜르체제는 부패에 기초하다보니 반대급부로서 공산주의, 이슬람이 자리를 잡게되는 곳이다. 이명박. 박근혜정부도 부패하고 무능하다보니 반대급부로 종북세력이 등단하게 된다.

 

 우르의 지구라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의 법 원칙이 기록된 ‘함무라비 법전’(B.C 1792-1750)은 모세의 십계명보다 300여년 앞서 반포된 세계 최초의 법전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의 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재통일한 군주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lex talionis)’란 문구로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01년 프랑스의 드 모르간이 지휘하는 페르샤의 탐험대가 수사(Susa ; 페르샤 만 북방에 있는 고대 도시의 유적)에서 큰 돌기둥 하나를 발굴했다.

이 돌기둥은 높이 2.5m, 둘레가 1.8m였다. 그리고 돌기둥의 상부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광경이 조각되어있다.

 

이 함무라비 법전에는 이란의 고대문자인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이란은 이라크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서 인류 최초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서의 주역들이 살던 역사적인 곳이다. 

 

이란은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가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흐르는  에덴동산이 있는 곳으로 아담, 하와, 셋의 고향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노아가 살았던 성서인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성지이다. 

 

  

 

  

 

이란의 역사 

 

이란은 기원전 4000년 경 엘람의 왕국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700년경에 이란계 메디아인들이 이란 유역을 통합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기원전 6세기 경에 키루스(고레스) 대제가 아케메네스 제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들 중 하나였기도 했다.

 

  


아케메니스 왕국의 수도는 페르세 폴리스였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제국은 기원전 5세기 경(B.C 492),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마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퇴하면서 멸망하였고, 그 자리에 여러 헬레니즘 국가들이 세워지면서 쪼개지게 된다.

 

그리스에 패배한 페르시아

 

페르시아의 그리이스 첫번째 침공은 B.C 492년에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라톤에서 대패했다.

마지막으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한 것은 B.C 480년 살라미스 해전이었다. 그리스는 B.C480년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켰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은 역사상 최초로 동서문명권이 충돌했다. 그리스는 최종 승리를 거두고 개방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였고, 아테네는 전성기를 맞게되어 철학과 학문이 발전하게 된다.

그 후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게 된다. 페르시아가 승리했다면 플라톤, 소크라테스는 없었을 것이다.

 

사산왕조

 

기원전 3세기에는 페르시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파르티아 제국을 세웠으며, 3세기경에는 파르티아 제국을 계승하여 사산 제국이 새로이 들어섰다. 사산 제국은 이후 약 400여 년 동안 세계적인 제국으로 군림하였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사산제국을 정벌하였고, 이후 페르시아 지방의 급격한 이슬람화가 진행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즉 이란 지역은 이슬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번영하면서 이슬람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란은 원래부터 이슬람제국이 아니었다. (계속)

 

  



http://lawtimes.net/4887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의 기원: 알라와 야훼의 싸움(2)

 

http://lawtimes.net/4884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의 기원은 3,000년 전부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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