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일본13)

복듬의 도래인이 된 한인선교사들

편집인 | 입력 : 2023/10/12 [08:01] | 조회수: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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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유산답사기를 쓰기 위해 지난 월요일(10.9) 일본을 방문했다. 다행히 동료 오필재 목사와 무목선교회 허창범 목사의 도움으로 여기저기 방문할 수 있었다. 

 

먼저 불루라이또 요코하마를 방문해서 1872년에 세워진 교회와 1874년에 세워진 장로교회를 방문했다. 요코하마 해안교회이다. 

  

  요꼬하마 해안교회

 

  

 

그리고 1874년에는 일본 최초로 일본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지로교회이다.  

 

 지로장로교회

  

일본인들은 세계2차 대전시절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종을 요구하였지만 이 교회는 끝내 거부하였다고 한다. 당시도 양심있는 교회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도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무덤이 있다. 십자가가 군데 군데 세워져 있다. 일본의 기독교문화의 상륙을 알 수 있다.  

 

  © 편집인


요꼬하마의 밤은 그야말로 불루라이또 요꼬하마였다. 

 

  


이시다 아유미는 불루라이또 요꼬하마를 불러 일약 스타가 되었다. 당시 한국사람들도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류가 아닌 일류가 한국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요꼬하마에는 이시다 아유마가 없었다. 여전히 불루라이또만 빛나고 있었다.  

 

  

 

YMCA


동경에 있는 재일본한국 YMCA는 1908년 평양의 정익노 장로가 내일하여 김정식 YMCA총무 및 약10여명의 학생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 교회를 잉태시킨 최초의 장소였다. 이 곳은 1919년 2월 8일 최초의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YMCA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동경 YMCA

 

여기서 1919. 2. 8 독립선언문이 발표 되었다.  

 

2.8 독립선언문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4천3백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족의 하나이다.

 

비록 한때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양국 황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할 뿐, 조선은 항상 우리의 조선이었고 통일된 국가를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 우리는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그것이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저해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므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2. 우리는 일본의회 및 정부에 대해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고 대회의 결의에 따라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3. 우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할 것을 청구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의 대사, 공사에게 우리의 의사를 그들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다. 이들 위원은 이미 파견된 우리 민족의 위원과 함께 행동을 취할 것이다.

 

4. 앞의 세 가지 요구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1919년 2월 8일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대표

 

  

1908년에 동경한인교회 설립

 

일한일합병 1910년 이전 1908년 이전부터 YMCA에서 예배드리던 유학생들은 숫자가 점점 많아지자, 본국에 목사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독노회는 1911년에는 제1대 한석진목사(장로교)를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을 했다. 한목사가 부임하여 영수 3명(조만식, 김정식, 오찬동)과 집사 4명을 임명한후 교회를 조직하였다.

 

  

 

그 교회가 재일대한 기독교회 동경교회이다. 

 

  

 

  

 

이 교회의 역사는 YMCA에서 예배드렸던 1908년을 효시로 한다. 최초의 재일한국인교회는 1908년에 설립이 되었다. 

 

  



  

 

동경한인교회를 통하여 동경의 유학생들, 재일교포들이 참석하여 일본의 정착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수정이 세례 받은 시바교회

 

 

  

 

동경 한인교회 근처에 가면 ‘일본기독교단시바교회(日本基督敎團芝敎會)’가 있다. 시바교회는 이수정이 세례를 받았던 로게츠쵸(露月町)교회가 그 뿌리이다. 명칭이 바뀐 것이다.

 

1883년 4월 29일 주일. 이수정은 로게츠쵸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조지 녹스(G W Knox)에게서다.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 세례였다. 

 

이교회는 1874년에 세워졌다. 

 

 

 

 

 

 

 

  

 

최근에 시바교회는 건물을 새롭게 단장을 하였다. 

 

 

 

 

  


 

이수정이 대표로 기도한 신사카에 교회

 

세례를 받고 공식 기독교인이 된 이수정은 1883년 5월 8∼13일까지 제3회 전일본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했다. 당시 대친목회는 신사카에(新榮)교회에서 열렸다. 이수정은 여기서 한국어로 대표기도를 드렸다. 그는 요한복음 14장으로 신앙을 고백했다. 

 

신사카에 교회는 1872년에 세워져 창립 150주년이 된 교회로서 한국인이 최초로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 

 

  

 

  

 

  


150년이 되었어도 20-30여 명 밖에 참석하지 않는다. 

 

  



  


시바교회나 신카에 교회는 이수정의 자취가 묻어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인교회는 교세가 상당히 미약하다. 너무 경제가 발전하고 신사가 깊게 뿌리 내리다 보니 교회가 필요없는 시대가 되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신사를 찾아 종교의식을 행한다.  

 

 

  

 

 

  

 

 

 

신사에 자신들이 기독제목을 올려놓기도 한다. 

 

  

 

새문안교회에서도 신사의 기도문을 모방하여 기도주술 나무에 기도문을 걸어 주술적인 행동이 끊이지 않고 있다. 논란이 되자 기도주술 나무를 치워버렸다. 일본 신사와 다름이 없었다. 일본 신사의 영성이 새문안교회에 정착한 것이다. 

 

 

 일본인들과 관광객들은 줄을 서서 신사를 참배하였다. 

 

  


그들은 향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 들어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모두 주술적인 행위들이 일상적으로 치러지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은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작고한 아베도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였다. 

 

  


이러한 신사와 막강한 경제능력과 선진화된 나라로서 더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없게 되었다. 동경은 넓었지만 교회십자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교회도 점점 무너지고 있고, 일본사람들은 교회를 찾지를 않고 있다. 다신론이나 삼신론에 익숙한 일본인들은 유일신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일본교회도 신학생들이 없자, 목사가 없는 무목교회가 늘어나고있다. 다행이 일본어를 할 줄아는 한국의 선교사들이 무목교회에 사역을 하고 있다.   

예장통합교단 출신인 오필재 목사 역시 아픈 몸을 이끌고 아야세 그리스도교회를 이끌고 있다. 한인들과 일인들이 연합해서 매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일본에 정착하고자 하는 한인들은 한인교회를 통하여 일본정보를 얻고 일본에 뿌리내리기를 하고 있다. 매주일마다 한인들은 교회에 나가서 교제를 나누고 한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의식을 높이고 있다.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을 깨우고, 한인교회는 이민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글어 개설도 하고, 한인인권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1882년에 일본 땅을 밟은 한 사람으로 인해 인구의 4분의 1이나 예수를 믿게 되었고, 지금은 복음의 도래인이 되어 일본선교를 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복음의 빚을 돌려주어 일본을 깨우자는 것이다.

 

일본은 36년 동안 억압을 통하여 우리민족에게 근대화의 눈을 뜨게 하였고, 총을 갖고 도래하여 국가의 힘을 자각하게 하였다. 고통은 당했지만 말이다. 

 

현재 한국은 문화의 도래인이 되어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고, 선교사들은 복음의 도래인이 일본을 영적으로 각성시키고 있다. 일본은 우리에게 총칼을 가진 도래인들이아면 우리민족은 문화와 복음의 도래인이 되어 다시 역으로 일본을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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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동이 아니고 오순형입니다. 홍길동 24/07/04 [03:08]
기사에서, 영수 3명(조만식, 김정식, 오찬동)이라고 하셨는데요. 오찬동이 아니고 오순형(吳舜炯)입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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