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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한인교회
한인들이 1921년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주하자마자 맛단다스 지방회를 설립한 지 4개월이 되던 1921년 10월 5일에 이곳 까타자스 지역에 ‘한인예수교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인 쿠바 이민사를 쓴 이자경에 의하면 쿠바 이주단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 교회(미슌)의 필요성이 절실해 교회가 문을 연 것은 그해 10월 5일로 바로 맛단사스 ‘한인예수교회’였다고 말한다.
쿠바 지영범 선교사에 의하면 쿠바 한인 후손 2대 할머니 김모(71)씨의 집에서 그의 부친이 1905년 한국을 떠나면서 성경 두권을 가지고 나왔다고 전했다. 이미 한국에서 예수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고신교단에서 파송한 지영범 선교사는 20년 이상 쿠바선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가 한인 후손으로부터 성경책 한권을 발견하게 된다. 1905년 멕시코로 건너한 한인이 한국에서 가져간 성경이다.
이 성경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세운 성서번역회에서 1900년에 스코틀랜드 로스 선교사나 일본의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성경을 보고 개역한 성서일 것이다.
1897년에 로스팀은 신약성경을 모두 번역했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로스가 번역한 요한복음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수정은 1885년 일본 요코하마(橫濱) 미국성서공회에서 1,000부를 간행하였다. 이 번역성서는 최초의 한국선교사 중 한 사람인 언더우드(Underwood,H.G.)가 조선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책이다.
그는 내한한 지 1년여 만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이수정역의 마가복음서를 고쳐서 1900년에 신약전서 완간을 출간했다.
이수정의 번역본은 사투리와 한문 투가 심했고, 오역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 번역본을 일일이 고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새롭게 번역하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로스나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그대로 읽기 보다는 1887년 2월에 성경전서를 번역 출판 보급하기 위한 ‘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4월에 ‘한국상설성경위원회’로 개명하고 그 밑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를 두었다.
1893년에는 ‘상설성경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중심이 되어 세운 성서번역위원회는 레이놀즈도 가담하여 1900년에 신약전체를 번역하게 된다. 1911년이 되어서야 구약과 신약정체의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레이놀즈
레이놀즈는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 노포크의 기독교인 집안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7년 6월 햄든시드니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레이놀즈는 언어에 대한 재능을 살려 고전 언어 분야의 교수가 되기 위해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대학 라틴-그리스-산스크리트어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는 미국 남장로교회 출신으로서 호남선교의 개척자이다. 그는 자신을 늘 전주 이씨 이눌서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11년 ‘한글 성경전서’가 인쇄된 것. 10년 이상 소요하며 한글 신구약 성경전서를 완성한 그의 공로는 대단한 것이다. 또한 그는 한영사전도 편찬했다.
한일합방과 한예합병
한일합병이 있기 4개월전,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레이놀즈는 구약의 마지막 구절 번역을 마치자마자 서울에 있던 영국성서공회의 대리인인 휴 밀러(Hugh Miller)에게 번역을 모두 마쳤다고 전보를 보냈다. 외적으로는 일본과의 합병이지만 내적으로는 성경번역 완간을 통하여 조선은 예수와 합병이 되고 있었다. 한예합병이었다.
성경번역은 한글보존으로 이어져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한국이 예수와 합병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서울대 교수는 교회를 통하여 한국어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했다. 예수와 합병하니 한글이 보존되어 민족혼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도 남대문에 있는 상동교회 교인이었다.
성기지 한글학술부장은 한글의 보존이 일제 강점기에 한글의 불꽃을 사라지지 않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한글을 통하여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된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민족을 구원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한예합병이 민족을 살린 것이다. 성서번역회는 1900년에는 신약전서를, 1911년에는 구약까지 완간을 한다.
멕시코로 떠난 신도들은 1900년의 번역 성경을 들고 들어왔을 것이다. 지영범 선교사는 그는 당시 쿠바 한인이 갖고 갔던 찬송가도 공개했다.
지영범 선교사의 편지
쿠바한인교회, 1921년에 설립
성경을 품에 지난 한인들은 전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인들은 교회부터 설립을 하였다. 중동에 근로자로 파송된 사람들도 먼저 교회부터 세웠다. 한인들은 중동의 사막을 가든지, 멕시코와 쿠바의 선인장밭을 가더라도 교회부터 세웠다.
그러므로 이미 한인들은 1905년 멕시코로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예수를 믿거나 멕시코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이 쿠바에 가자마자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쿠바는 1959년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교회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
1921년의 쿠바한인교회는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자신들이 속한 교단을 주장하지 않은 한인 독립교회였으나 한인감리교회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인감리교회로 하나로 뭉친다. 그래서 쿠바에 최초로 세워진 한인교회는 감리교회였다.
멕시코에서는 1908년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자 한인들은 신앙생할을 하기 시작했다. 1908년 10월 5일 메리다 시내에서 감리교 첫 속회를 열었는데 교인 수는 1909년이 되면서 70명, 그리고 3월에는 300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쿠바에 오기 전에 많은 한인들은 이미 교회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2살에 멕시코에 도착한 쿠바의 한인지도자 임천택도 자신은 원래 천도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이었다고 증언한다.
나의 원적지는 광주(廣州)군이나 나기는 이로부터 26년 전 계묘 3월 19일 양주군 외가에서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말도 배우기 전 을사년 3월에 어머니께서 묵국(墨西可) 유카탄 이민축에 들어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시게 됨에 나도 어머니를 따라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 하다가 조선의 어린 몸이 묵서가 생활을 한 지가 이렁저렁 16년 성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다가 어찌 어찌하여 신유년 3월에 제2 고향이라 할 만한 묵서가를 떠나 쿠바라는 이곳으로 오게 되어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나이는 어언 26세가 되었습니다.
나이는 비록 26세나 남달리 불우한 가정에 태어나서 해외 만 리에 표박하는 몸이 되고 보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배울 것은 하나도못 배우는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26년 간 배운 시간을 통틀어 계산하면 불과 1년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지식여하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독자 여러분이 짐작하실 줄 압니다. 그러니까 먼저 말씀과 같이 내가 기독교를 믿었다 해도 그곳은 모두 무의식적이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천도교 최린이 친일파로 전락하자. 자신도 천도교를 버리고 다시 감리교도가 된다.
1921년 쿠바한인교회는 처음에는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섞여 있었으나 감리교 미션을 설립했는데 관청에서 인가를 받기는 1929년 10 월에 와서야 가능했다. 맛단사스는 1923년 인구는 62,638명이었고, 아바나로부터 518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한국인을 찾은 미국 여선교사
1921년에 한인들 스스로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1924년에 말미라 B. 터커 여선교사가 한인 예수교회를 찾았다.
터커 선교사는 한인 동포를 사랑했고, 친절하게 한인교회를 섬겼다. 이듬해 2월에 미국인 선교사가 주례하여 한인 예수교회에서 부경조와 김용복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이우식은 한인예수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이우식(李雨植)은 1868년에 황해도 개성 대원에서 출생하여 부인 열례와 함께 1905년에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하였다.
1923년에는 쿠바 마딴사스 민성국어학교에서 한인동포 국어보급운동을 전개하고, 1929년 조선국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마딴사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서 재쿠바 한인사회 단결을 도모하며 1919년경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립금 62.36달러를 지원했다. 정부는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29년 10월에 맛단사스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되던 때까지 이우식이 전도사로 활동했을 것인데 1926년 3월에 터커 여선교사가 전도부인으로 활동할 때부터라면 약 3년간으로 보인다.
베르타 터커(Berta Turker) 미국인 전도부인
쿠바한인교회 성자에 공헌을 한 사람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했던 터커(대허)부인이다. 그녀는 대허 부인으로 불렸다.
1916년 10월, 미국의 모친이 신병으로 위중하다는 급보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다시 쿠바 선교를 떠나 거기서 한인노동자를 발견하고 교회를 도운 것이다. 이처럼 한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1924년 맛단사스 감리교 이레네 또란드 신학교(Colegio Irene de Toland)에 합류하고,기독교 신학원(Centro Cristiano)을 창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후에 이 신학교는 복음신학교(Seminario Evangélico de Teología)로 발전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맛단사스 기독교 모임은 이레네 또란드 학교의 장학금으로 민성학교를 지원했다. 그녀는 또 쿠바에서 유명한 두 학교인 맛단사스의 이레네 또란드 학교와 까르데나스의 프로그레시바(La Progresiva) 학교에서 한인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수여했던 것이다. 당시 한인 교인은 50명이고 학생 수는 25명이었다.
대허부인은 엘 볼로 한인촌을 정규적으로 방문하고 장영기(Angel Chang) 목사를 교육시켰는데 결국 불미한 사건에 휘몰려 결국 1932년 2월에 교단의 연차회의를 플로르 레이나(Flor S.Reyna) 목사에게 맡기고 그곳을 떠났다. 장영기도 그 사건으로 목사직에서 쫓겨났다.(이자경, 쿠바한인사)
이러한 영향으로 아바나에는 최근 낮아짐이라는 한인교회가 설립되고 쿠바한인들후손과 쿠바인들의 선교를 하고 있다.
결론
이처럼 멕시코로 입성할 때 한인들은 조선에서 이미 기독교인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교회를 설립했고, 쿠바에서도 이들은 교회부터 세웠다. 기독교인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1900년판 성경을 가방에 넣고 떠났던 것이다.
한인들이 지금까지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한인교회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이민자들은 고된 삶들을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통하여 극복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한독립, 쿠바혁명 그리고 꼬레아노라는 정체성을 이어 온 임천택, 임은조가족은 생생하게 쿠바의 한인역사를 문자로 남겨 '꼬레아노'의 꿈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행히 한인교회가 전혀없었던 쿠바 아바나에 최근 한인교회가 설립되어 꼬레아노의 진정한 꿈을 이루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교회가 설립되고 지영범 한인선교사들이 지금까지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인들의 장족의 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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