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멕시코2)

교회를 설립한 멕시코 한인 노예들....120년 후 멕시코는 한류열풍

편집인 | 입력 : 2023/09/19 [05:07] | 조회수: 347

http://lawtimes.net/4823  (나의신앙유산답사기 멕시코1)

 

  



멕시코의 노예 생활 

 

멕시코의 한인들은 노예 브로커 상인 존마이어의 사기이민에 속아 멕시코 유카탄주의 애니깽(어저귀, 용설란) 농장으로 팔려간 당시는 부채 노예제가 전성을 이루었을 때였고, 소수의 백인과 소수의 스페인 식민자의 손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노예의 굴레속에 벗어나고자 일무 한인들은 탈주가 시도되었지만 이광준, 김용화 등 일부 사람들만 성공하고 대부분 감시병에 체포되어 숱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화병으로 죽거나 병들어 벌판에 버려지거나 매맞거나 자살해 죽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독립군 자금 지원

 

이들은 이렇게 해서 번 돈을 광주 학생운동에 약 100여원(현재 2억 5천만원정도)를 샌프란시스코를 통하여 독립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 편집인

 

특히 멕시코의 김익주 선생은 많은 돈을 벌어서 국내 독립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미국에 알려진 멕시코 노예생활


이러한 사실은 인삼장사 박영순의 한 통의 서신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사회에 알려지게 되았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4월 3일 유카탄 한인들의 농장계약 만료일인 5월 12일 한달을 앞두고 방화중, 황사용 두명의 견묵위원을 현지로 파송한 이유는 그 곳 실상을 알고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창립하기 위해서였다. 

 

 

  

미주 한인교회 설립(1904년) 

 

1904년에 하와이에만 한인교회가 14개, 1914년에는 39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진다. 일부 한인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미국본토에는 1904년 L.A 연합감리교회, 1905년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1906년 나성한인엽함장로교회가 설립된다.

 

1914년 오클랜드 한인연합감리교회, 1919년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1921년 뉴욕 감리교회 순으로 세워졌다.     

  

 

  1906년 나성한인연합교회 창립

 

당시 한인들은 주로 1904년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이탈하여 미국 본토로 유입된 사람들과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살고 있던 교포들이었으며, 특히 하와이로부터 이민온 사람들 중에는 고국에서부터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이 있었으나 로스엔젤레스에는 아직 교포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 없었다.

 

방화중전도사, 라성한인교회 설립

 

1906년초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방화중 전도사(고향은 평양이고 하와이를 거쳐서 미주로 건너왔다)가 로스엔젤레스에 머물던중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목사가 그때 마침 안식년으로 귀국해 있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방화중 전도사

   

마포삼열 목사는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교포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장로교회를 세우기로 마음을 정한후 미 북장로교 나성노회(Presbytery of Los Angeles)에 뜻을 전달한다. 노회에서는 한인을 위한 교회 창립을 위해 프리챠드(Augustus B. Pritchard)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조직하고 인도하도록 하였다.

 

방화중 전도사는 1906년 시내 벙커힐(Bunker Hill)에 사가를 얻어 프리챠드목사의 인도 하에 1906년 5월 10일 18명의 교인들이 모여 창립 예배를 드리면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100년이 넘는 역사가 시작 된다.

 

 

 

그러나 이 교회는 단순히 선교 활동을 펼치는 데 국한되지 않고, 하와이·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한인 동포들의 친교를 도모하고, 을사늑약 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창립된 미주한인독립운동단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장로교 노회선교부와 교섭하였고, 5월 10일 노회로부터 교회조직의 책임자로 파견된 프리차드(Augustus B. Prichard) 목사의 집례로 올리브 코트 2번지(2 Olive Court)의 건물에서 창립 예배를 드렸다. 

 

  

 

1921일 4월 9일 이 예배당은 한인장로교회로 승격되었으나 1928년까지 노회에서 미국인 목사를 파송해서 관리했으며, 1929년 김중수 목사가 취임하면서부터 자치교회가 되었다.

 

방화중은 누구인가

  

여기서 방화중이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방화중은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인 7인 중 한 사람인 방기창(1851-1911)의 아들이다.

 

  

 

방기창은 원래는 동학 접주였지만 1907년 목사안수를 맏고 1911년 소천을 한다. 방기창은 장로회신학대학 초대교장이었던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을 만나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입문하게 되었다.

 

  

 

  


마펫은 미국에 1906년 머물 때는 아들 방화중에게 라성한인장로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부자가 모두 장신대 초대교장이었던 마펫에게 영적 도움을 받았다. 방화중은 190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멕시코로 간 두 전도사들(방화중, 황사용)

 

대한인민국회는 두 명의 전도사를 멕시코에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방화중 전도사는 감리교 황사용 전도사와 함께 1908년 4월 3일경 로스앤젤레스를 출발, 6일 텍사스의 미국경 도시 엘파소(El Paso)를 경유해 멕시코 북부도시 치와와(Chihuahua)에 도착, 또 거기서 미국 잠입을 시도 중인 채등신을 만나 하룻밤을 유숙한 뒤 4일 만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거기서 메리다로 이동하였다. 

 

 

  

  

멕시코 교포들을 본 방화중은 다음과 같이 글을 쓰기도 하였다. 

 

방화중의 글

 

장하다. 멕시코국 유카탄도 메리다 지방에 설립한바 재묵 한인의 국민회 조직이여 유카탄이 생긴 후 60여 년에 처음되는 경사로다.

 

묵국정치로 말하면 제도는 비록 공화라하되 백성을 종으로 부리는 야만의 행정이 있으매 언권은 비록 자유라하되 10인 이상이 모여서 담론을 크게 못하는 땅이라.

 

그런고로 국민이 단합한 단체가 없으며 인민을 깨우기 위하여 연설 한마디 하는 것을 들어볼 수도 없었으니 이와같이 암흑동천에 저와 같이 속박을 당하는 천여 명 동포가 우리의 조국을 건질 목적으로 국민회를 조직하였으니 어찌 묵국 일월이 놀라지 아니하며 묵국 산천이 하례하지 아니함이요.

 

자유의 몸이 된 멕시코 한인들

 

1909년 5월 12일에 멕시코의 유카탄(Yucatán)으로 이민을 온 한인들은 4년 동안의 계약 노동이 끝나자 에네켄(henequén) 농장을 나왔다. 자유의 몸이 된 한인들은 미국의 국민회 본부에 연락하여 자신들의 생존과 보호를 요청하였다.

 

멕시코의 일본인들은 이전부터 한인들을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인들은 농장에서 나오기 전부터 생존을 위해 미국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국민회는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멕시코 한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견묵위원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상항(桑港 ; San Francisco) 한인청년회는 견묵위원을 멕시코로 보내는 여비로 6원 50전을 지원하였다.

 

항구에는 한인농장에서 대표로 나온 10여 명의 총대들과 멕시코 선교사 1명,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간 미국 선교사 2명이 영접 나와 있었다. 

 

멕시코시티에서 출발한 지 15일 만에 메리다에 도착한 이들은 각지의 농장을 다니며 한인 동포들의 상황을 조사하고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조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메리다 지방회 설립

 

  

  

 

 

  

  

1909년 5월 9일 유카탄 지역 16개의 에네켄 농장에서 대표를 선출하여 메리다지방회 설립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즉, 메리다지방회는 조국을 잃고 이역만리 타지에서 속박당하던 1천여 명의 한인들이 권익을 신장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한인국민회의 도움을 받아 조직한 것이다.

 

  

  

도산 안창호의 멕시코 방문

 

1918년에는 도산 안창호가 멕시코 한인사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도선안창호는 감리교회 사람이지만 언더우드 고아원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일찍부터 예수를 믿고 도미하여 L.A 에서 한인사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언더우드 고아원에서 자라며 예수에 대해서 들었다.   

 

  

 

그는 경신학교의 전신인 밀러 학당에서 공부를 하여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훗날 차범근이 경신학교출신이 된다. 

 

  

 

이처럼 방화중, 황사용, 안창호 등이 일찍부터 기독교인이 되어 멕시코 한인사회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멕시코까지 방문을 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는 총 314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1909년 5월 9일에 설립되었다. 창립회에는 16개 농장에서 보낸 총대 등 7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회장 이근영, 부회장 방경일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의 인준을 받은 후, 5월 24일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1917년 멕시코의 한인들은 약 600여 명 

 

191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메리다 인근의 한인수는 총 513명인데, 그 밖에 유카탄과 캄페체의 인구 2백 명을 합하면 유카탄 인근의 인구는 총 713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의 513명 가운데에는 현지 부인 41명과 어린아이 109명이 포함되고 있어서 메리다 인근에는 유카탄 도착 인구 1,031명 가운데 4백 명 미만의 인구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쿠바로 1921년 288명이 떠나갔는데 그 가운데 95명을 메리다에서 모집했다는 점에서 출산으로 인한 인구증가를 고려한다 해도 1920년대 초의 인구는 6백 명 내외에 불과했으리라고 본다.

 

600여명이 남아 3,4대까지 이어지면서 멕시코 한인 후손들은 약 10,000여명에 이르고 있다.

 

한인교회 설립

 

김제선 집에서 시작된 한인교회(1908년)

 

두 대표는 김제선의 집에 머물렀다. 김제선은 이근영.조병하 등과 함께 계약만료 8개월 전에 농장주에게 80페소44)(또는 1백 페소)를 지불하고 해방되었던 8명 가운데 하나로 집을 장만해 주일이면 예배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김제선의 집은 멕시코의 한인사회에서 최초의 개인주택임은 물론 최초의 교회이자 최초의 공공장소로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주일예배에 70-80명의 동포들이 참가하였다. 김제선의 집에서 처음 전도회를 조직하고 성경공부와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1908년 10월 5일이었다.

광무군에 속했던 퇴역군인 중에 예수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전한 복음때문이었다. 퇴역군인 200여명이 멕시코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김제선이 구입한 집 주소는 ‘Apartado 229, Merida(사서함 주소)’인 것으로 추정되며 후에 메리다 지방회 회관 주소로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나 김제선의 집이 회관과 교회로 함께 쓰여진 것으로 파악된다.

 

김제선은 농장 밖으로 해방되어 1908년 10월 5일 메리다 시내에서 감리교 첫 속회를 열었는데 교인 수는 1909년이 되면서 70명, 그리고 3월에는 300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김제선·최춘택 등 이미 한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여 이들이 비밀 전도 운동을 벌여 김윤원·이근영·김성민 등을 새로운 신자로 받아들이면서 교인이 400명이나 되는 초기 교회로 성장하였다. 초기 이민자들은 거의 교회를 다녔다.

  

이들은 19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방화중 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으며 그해 5월 12일 정식으로 멕시코 한인선교회를 조직했다. 방화중 이후 김제선 전도사가 맡아 본 이 교회는 교포들의 잦은 이동으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멕시코에 사기 이민으로 1905년에 도착한 한인들은 4년동안의 노예계약이 끝나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얻게된 교포들이 독자적으로 신앙집회를 갖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이 회당을 세우듯이 교회부터 세웠던 것이다. 

 

일본 쯔다센의 복음전파로인해 예수를 믿게된 이수정의 한 통의 서신이 미국의 언더우드를 한국에 오게 했고, 언더우드에 의해 복음을 들은 광무군 소속의 군인들이 멕시코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우게 된다.

언더우드의 고아원 출신인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감리교회의 창립회원이 되어 멕시코까지 방문하게 된다.

 

이수정의 한 통의 편지가 결국 멕시코에까지 그 열매가 맺혀졌던 것이다.  이 열매는 쿠바에까지 이어졌다.   

 

현재 멕시코 한인이민 100주년을 기념비가 메리다시내에 건립되어 있다.

 

  

 

한인들의 멕시코 선교활동

 

현재는 이렇게  많은 교회와 선교센터가 세워져 멕시코의 복음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멕시코의 한류열풍

 

120년이 지났다. 멕시코에 교회를 한민족들은 결국 선으로서 악을 이겼다. 지금 멕시코는 한류열풍으로 가득하다.  

 

  

 

  © 편집인



  

 

 멕시코 한인들의 이주생할은 다음의 유튜브를 통해 실상을 알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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