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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도래인
일본과 조선의 개신교
일본의 기독교는 1549년 예수회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에 의해 처음 전파되었다. 임진란 이전이다. 임진란 때는 쎄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왔을 정도이다.
구교는 일본에 지금부터 474년 전에 전파되었고, 개신교의 역사는 1859년에 전파되었다. 개신교는 조선보다 26년 일찍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는 인구대비 전체의 0.4%에 불과하고, 일본의 개신교도는 수치상 509,668명이며 도쿄에만 3,000개의 개신교회들이 있으며 일본 전체에는 7,700개의 개신교회가 있다. 100만 명도 안되는 숫자이다.
그러나 한국은 예장통합 교단만해도 약 9,000여개의 교회가 있고, 신도들 숫자는 약 230만명이다. 합동교단도 비슷하다. 한국은 전체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약 6만개의 교회가 존재하며, 800만명의 신도가 존재한다.
개신교는 인구대비 약 25%정도이다. 이렇게 격차가 나는 것은 지리적 여건, 사회구조적 여건, 종교적 여건이 있다.
일본과 조선의 초기 선교
한국의 초기 기독교는 서민종교로 출발했고 일본은 귀족들이 출발했다.
그런데다가 막부시대에 일본 기독교인들이 40만명 이상 처형된다. 기독교의 박해나 너무 심했던 것이다.
에도시대에는 기독교 금기령을 내렸다.
일본교회는 처음부터 지식층 신자들로 구성된 면이 서민종교로서 출발하지 못한데다가 기독교의 탄압이 너무 강해서 성장의 한계도 있었다.
일본의 기독교는 메이지 유신을 할 무렵에 들어와 그들은 순수신앙보다 서양학문과 문물의 수용을 통한 국가발전 및 사회개혁을 신앙적 가치의 중심에 두고 있었다.
교회보다 메이지유신이 먼저였다. 반면 한국은 일제의 압박속에서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기독교를 통한 근대화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반상구조라는 사회적 요인도 있었지만 한국인에게는 선천적인 종교심이 강하였다. 특히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상민과 천민들까지 하늘이라고 하여 반상사회로 구성된 조선사회에 에서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양반들의 위치가 흔들릴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개신교는 서민 특징의 종교로서 현세 현세구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내적으로 죄의 고백과 회개, 성경탐독 등을 중시하는 영혼구원적 성격을 가진 개인영혼구원이라는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동학도 종교적 속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100만여 명의 교도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카스트 제도, 양반사회
특히 서민들의 관심을 끈 것은 신분차별의 해체였다. 조선의 신분구조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되었다. 조선의 카스트제도이다.
양반은 고려 초인 976년 경종 1년 전시과를 기점으로 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신분화된 사족으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조선초에는 양반은 약 1%에 불과하였지만 중기이후 철종시대에는 약 10%가 양반이었다. 카스트제도는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었다.
1910년 전국 호구 조사에 의하면 총 가구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양반을 헤아린 통계이다.
조선시대 양반들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다음으로는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강원도(1.1%) 순이었다.
그 뒤로는 전라북도(1%), 경기도(0.8%), 함경북도(0.8%), 전라남도(0.5%), 경상남도(0.4%), 함경남도(0.4%) 순이며 최하위는 황해도(0.3%), 평안북도(0.2%), 평안남도(0.1%)였다.
인구 대비로 봤을 때는 충남의 상당수 지역은 양반의 비중이 20~30%대였고 충북 일부 지역, 안동 일대는 10% 후반~20대 중반 정도였다. 경주가 11.5%로 여기까지 지역이 10%를 넘었고 나머지 지역은 10%를 넘지 못했다.
양반의 약 10%가 90% 이상의 주민을 지배한 것이다. 양반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작농이거나 노예에 불과했다.기독교는 이러한 반상의 질서를 철폐하는데 앞장선 것이다.
개신교는 조선의 카스트제도를 철폐하는데 앞장을 섰기 때문에 많은 서민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었다. 김제 금산교회는 천민이 목사가 되고 귀족이 장로가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본 개신교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관점 차이였다. 그들은 개신교는 단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수단으로서 존재했고 조선의 개신교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사회개혁을 하는 목적으로서 존재한 것이다.
일본은 수단의 기독교였고 한국은 목적의 기독교였다. 1907년 부흥훈동, 1973년 빌리그라함 초청 집회는 사회개혁을 위한 수단이 아닌 개인 영혼구원을 위한 목적으로서의 종교였다.
요약하면 한국기독교는 서민종교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부흥사경회와 같은 종교적 감정에 호소하는 영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저항적 에너지를 축적시킨 반면, 일본기독교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바탕으로 강한 독립지향성을 가진 지식인 공동체를 배타적으로 형성하였고, 강한 엘리트적 윤리의식을 가지고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기제로 기능하였다. 수단으로서의 종교였다.
목적으로서의 종교를 추구한 한국의 기독교는 1907년을 기회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여세를 몰아 일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을 상대로 선교하기 위해 일본선교전략을 마련하였다.
일본 선교
2008년에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오사카 여학원 헤르채플에서 선교10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다.
설교는 총회장 정연원 목사(오사카 교회)가 ‘감사의 100년, 희망의 100년’이라는 제목으로 "1905년 한일보호조약 이후 동경으로 유학을 온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경조선 YMCA가 설립되었고, 1908년 평양에서 도일한 정익노장로와 김정식 YMCA 총무 및 유학생이 모여 별도로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오늘의 재일 한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일본 한인 교회의 시작
동경교회
1908년 YMCA의 학생들이 교회설립
동경 YMCA에서 할동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훗날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돼 교회가 설립된 지 11년만에 동경에서 독립선언문이 선포되었다.
동경교회의 역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19년 2월 8일 조선 YMCA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11명 중 9명이 동경교회 청년이었다는 점이다. 전영택, 주요한, 최팔용, 백남규, 백남훈, 윤창식 등은 깊은 신앙심으로 나라를 회복하고 민족을 살리는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동경의 2·8 독립선언은 곧바로 국내로 옮겨져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만방에 대한독립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독립선언서는 최팔용, 이종근, 송계백, 김도연, 이광수, 최근우, 김철수, 김상덕, 백관수, 서춘, 윤창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도쿄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선포했다. 춘원 이광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9년, 2.8 독립선언
훗날 동경 YMCA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선포한 곳이다. 신앙심을 통하여 독립을 추구하고자 했다. 독립선언문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유학생들에 의해서 공표되었다.
2.8 독립선언문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4천3백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민족의 하나이다.
비록 한때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양국 황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할 뿐, 조선은 항상 우리의 조선이었고 통일된 국가를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 우리는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그것이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저해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므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2. 우리는 일본의회 및 정부에 대해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고 대회의 결의에 따라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3. 우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할 것을 청구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의 대사, 공사에게 우리의 의사를 그들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다. 이들 위원은 이미 파견된 우리 민족의 위원과 함께 행동을 취할 것이다.
4. 앞의 세 가지 요구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1919년 2월 8일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대표
최팔용, 윤창석, 이종근, 이광수, 최근우, 서 춘, 백관수, 김도연, 송계백, 김철수, 김상덕
이처럼 유학생 교인들은 그들이 신앙을 통하여 국가의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일본땅에서도 순교의 정신으로 일했다.
독노회, 한석진 목사 선교사 파송
유학생들은 본국에 목사 파송을 요청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를 제1대 목회자로 동경교회에 보냈다.
이후 감리교와 장로교가 2년 혹은 3년마다 목회자를 교대로 파송하여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다. 〈동경교회 100주년 문집〉에 의하면, 당시 한국에 머물렀던 클라크 선교사가 동경교회를 방문했을 때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80명 수용의 예배당에 350여명이 예배를 드렸다고 되어 있다.
클라크 선교사는 조선으로 돌아와 동경교회의 뜨거운 열정을 보고 교회구입비로 2만 5000달러(현재 1억원)를 헌금했다고 한다.
이후 동경교회를 중심으로 나고야, 오사카 등 일본 전국 90여 개 한인교회가 모여 재일대한기독교교회(교단)를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동경교회는 교단 내에서 ‘어머니 교회’로 평가받는다.
그 이전에는 1882년 제4차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농학을 연구하러 갔던 이수정이 농학자 쯔다센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1883년 4월에 세례를 받고 조선인교회(동경교회)를 개척하여 일본선교를 시작했다.
1911년에는 제1대 한석진목사(장로교) 가 부임하여 영수 3명(조만식, 김정식, 오찬동)과 집사 4명을 임명한후 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동경과 요꼬하마를 중심으로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무고한 조선인 희생으로 이어졌다.
1923년 일본 정부는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희생양을 조선인들에게서 찾았다. 당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재일조선인 6,661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일본 정부는 두 가지 사실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영향과 그후 조선을 넘어 중국·일본으로 번져가는 조선인의 해방운동이었으며, 또 하나는 재일조선인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가 일본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2.8 독립선언의 후유증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여 계엄령을 포고한 결과, 군대와 경찰뿐 아니라 민족적 편견을 가진 일본 민중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 학살에 합세했다. 1923년 동경교회는 이러한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1938년에는 동경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1942년 제14대 오윤태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가 안정되고, 전쟁도 차츰 끝이 나 그동안 기도제목이었던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여 1951년 완공을 보게 된다.
이 시기에 동경교회는 일본 내에 만연한 한국인 차별 문제에 저항하고 동시에 복음의 전초기지를 다지며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해왔다. 오윤태 목사는 1980년까지 목회를 하면서 동경교회의 기틀을 잡고, 일본선교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1923년 9월 1일 동경과 요꼬하마를 중심으로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예배처소도 붕괴되어 교인들은 마치 광야생활을 하듯 떠돌아 다니면서도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1929년 조선YMCA가 건축되어 동경교회는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동경교회는 한국의 영락교회처럼 일본 땅에서 영적, 정신적 어머니의 역할을 하였다. 그 이후 1945년까지 많은 약 200만명의 한인들이 일본에 여러가지 이유로 도래하게 되어 일부가 동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현재는 약 60만명의 재일교포들이 남아있다. 그들의 50%는 제주출신이고, 40%는 영남출신, 나머지 10%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다. 호남출신자들은 소수이다.
현재 동경교회는 재적 1,200여명, 평균 1,000여 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며, 우에노공원과 아라까와 홈리스 급식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한인교회에 걸맞게 한글교실 7개반과 36개 구역활동을 통해 주재원과 상사원의 구심점을 형성하며 일본사회에서 기반을 튼실히 하고 있다.
오사카 한인교회
1910년 한일강제합병 이전은 대부분 유학생이 일본에 거주했고, 합방이후에는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 일본 경제의 활황과 때를 맞이한 노동자들이 일본에 이주했다. 일본의 수도는 동경이지만 재일동포의 수도는 오사카일정도로 많은 한인들이 오사카에 거주한다
조선인 노동자는 간사이 지방을 비롯, 아치, 규슈, 홋카이도 등의 일본 노동시장에 유입되었다. 재일 조선인구는 1920년에는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1930년에는 30만명으로 급증한다.
이러한 노동자를 바탕으로 1917년부터는 요코하마, 고베, 1920년대 초기에는 오사카, 교토, 나고야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1922년에 간사이 지방에 김이곤 목사가, 1925년에는 나고야에 김필도 신학생이 파견되었다. 대부분이 고베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었다.
관동지방에서는 동경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관서 지방에서 1921년 세워진 오사카교회이다. 당시 고베신학교 유학생이던 김우현 전도사가 한국인 전도를 목적으로 방적회사를 찾았다가 여공이었던 김의생 자매와 신남수 자매를 만나 여공들의 기숙사에서 기도모임을 가짐으로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신남수 자매의 손자가 오사카 교회의 윤호신 장로로서 5대째 섬기고 있다
1970년 김덕성목사가 부임하여 1981년 현교회당을 건축한다. 이 교회는 재일교포들의 차별행위로 인한 인권, 2세들의 교육, 오사카교민들의 정체성 확립 등 교인들이 일본에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류문화로 일본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서 세계적인 다신국가인 일본에 유일신 사상을 접맥시켜 일본의 복음화를 꾀하고 있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도래인인 것이다.
1920년대 도래인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지만 현대의 도래인들은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영적 투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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