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일본편11)

복음의 도래인 이수정, 일본으로 도래한 이수정과 조선으로 도래한 이수정

편집인 | 입력 : 2023/09/10 [11:52] | 조회수: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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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도래인 이수정

 

1. 일본으로 도래한 이수정 

 

앞에서 필자는 일본은 복음의 씨앗을 전해준 나라라고 했다. 일본의 농학자 쯔다센은 한국의 안종수와 이수정에게 복음의 씨앗을 전하여 주었다. 1881년 안종수는 한인 최초로 일본에서 쯔다센으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고 개신교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이수정

 

안종수로부터 들은 이수정은 일본에 가서 쯔다센을 만나서 기독교와 유교가 어떻게 다르며 불교와 어떻게 다른 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수정은 실학자로서 이미 농학에 심취하였고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열려있었다. 그러한 도중에 쯔다센을 통해서 영적인 농학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여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선교사 루미스는 "이수정은 성경을 공부해서 이제 신자가 되었는데 그를 통해 복음이 '은자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고 했다. 

 

  

 

이수정은 일본 기독교인 대친목회(1883년)에서 우찌무라 간조, 쯔다센, 도시샤 대학교(동지사대학)의 설립자인 니지마 조를 만나게 되었다. 일본 기독교인들이 이수정을 도와준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처럼 일본에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일본 기독교인 대친목회(1883년)

 

 

 

우치무라 간조와 이수정

 

도시샤대 신학부 나카노야수하르 교수는 우치무라 간조 신앙전집에 이수정에 대해 적혀있다고 했다.  

 

 

 

 

 

당시 우찌무라 간조는 "이수정은 자기나라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는 마지막의 '아멘'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이 곳에 출석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 장소와 광경을 한층 오순철의 기척처럼 느끼게 했다"고 했다.

 

 

 

이수정은 누구인가

 

이수정은 전남 곡성출신으로 유학자 이병규의 아들이었다. 그는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고, 일찍부터 개화설을 주장하였으며 여러차례 국가에 공로가 많았으며 1882년 9월 19일 임오군란때 민비의 생명을 구해 준 인물로서 "왕과 가까운 친우로 왕의 근친"이었다. 민씨집안과는 좋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본래 개화사상을 갖고 있는데다가 친척이 천주교도로서 손과 팔다리, 머리가 절단 당하여 죽어 서학에 대해서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오래전부터 일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가기 전에 일본 주우은행에 적금도 들어놓았으며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고, 예술적인 재능도 가지고 있었으며 민영익과 무역과 상업을 통하여 국가의 부를 늘리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수정은 학문과 예술에 있어서 당대의 천재였다. 하나님은 이수정의 기능을 사용한 것이다. 

 

이수정과 안종수

 

이수정은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지 4년 전 1881년 신사유람단의 농학부문담당으로 간 안종수를 통하여 쯔다센을 알게 되었다.

 

1881년부터 복음을 들은 최초의 조선인, 안종수

 

이수정이 기독교복음을 알기 전에 안종수는 이미 쯔다센으로부터 기독교복음을 들었고, 안종수는 "나는 산상수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처럼 고상한 정취를 본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매우 놀랍고 그러한 가르침은 확실히 매우 유용하다"고 했다. 

 

안종수는 "기독교가 내국인들에게 금교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산상수훈을 담음 두루마리를 본국으로 가지고 갈 수는 없지만 내가 바운 바를 왕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할 것이다"고 쯔다센과 약속했다.

  

안종수는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안종수는 쯔다센으로부터 예수에 대해서 배웠다고 이수정에게 말하고 꼭 그를 만나보라고 했다.

 

이미 1881년부터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예수에 대해서 알기 시작했다. 

 

  안종수와 이수정


쯔다센의 선진농법에 감명을 받은 안종수는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기술 서적인 농정신편을 저술하여 농업선진화를 하는에 일조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 기술서로 과거의 농서와는 판이한 체계와 내용을 수록하였다. 특히 근대 과학을 토대로 한 식물학 또는 농화학적 지식을 원용한 농법을 소개하고 있다.
 

안종수의 말을 듣고 이수정은 1882년 9월 19일 일본으로 행해 그 해 9월 29일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그는 안종수가 소개한 쯔다센을 만나 교분을 갖기 시작한다. 쯔다센은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주었고 일본의 개신교 지도자들, 미국인 선교사와 교류를 갖게 했다.

 

  

 

  

 

그리고 쯔다센은 이수정에게 한문성경을 한권 주면서 한문만을 인용하여 성경의 진리를 이수정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와 한문성경을 읽는 동안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쯔다센 박사로부터 농업기술을 배우는 동안 그의 인격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의 인격의 기원이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쯔다센 박사가 다니는 감리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츠키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당시 주변사람들은 이수정을 매우 멋진 의상을 가진 대단히 솔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생각했다.

 

이수정은 쯔다센에게 체계적으로 성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전도하였던 것이다. 한국은 일본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지 9개월만에 로개쥬초교회에서 세레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서 존낙스에게서 세레를 받았다.

당시 문답에 대한 답변이 너무 명확하여 일본 목사나 미국선교사가 이수정의 신앙고백과 유창한 일본에 실력에 놀랐다.

 

그의 나이 40세 였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한문시는 일본 신문에 자주 기고되었고, 그림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열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학문적 탁월성은 물론 신앙의 열정도 일본사회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도쿄 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은 "만일 이수정이 기독교때문에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까지 말하였을 정도로 그는 언어와 예술, 한시에 천재였다.   

 

이수정이 너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니 일본제과에도 이수정의 축복문이 적혀있었다. 

 

 


"조선인 이수정은 쓰노니 청컨대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의 축북을 받으며 이 상업이 번창케 되어 주일도 잘 지키며 상업가의 큼 모범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조선 일본의 화해를 위해서 조선의 지리, 민속, 제도들을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최초의 한류전파자였다. 

 

  

    

이수정의 친척 중의 한 명은 천주교도인데 팔다리가 먼저 절단되고 머리가 절단되어 죽었다. 이수정은 자신도 "조선에 있었더라면 언제든지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에 가자마자 이수정은 죽는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 일본에서는 상당한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조선에 대한 선교열을 한층 더해 주었다. 이수정이 세례받던 날, 1883년 5월에 우친무라 간조, 니이지마 조를 비롯한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각교파 목사, 교사,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이수정의 세례식은 일본에서 상당한 관심거리였다.

 

마게도냐인 이수정  

 

이수정은 일본에 와있던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글을 쓴다. 그의 글은 1883년 12월 13일에 선교잡지에 실리게 된다.  

 

1883년 12월 13일 미국에서 발간되던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의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 외국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1884년 7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 맥클레이(Maclay, R. S.)를 김옥균(金玉均) 등과 만나게 하여 입국을 실현시켰다.

 

  

 

이 한 통이 서신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의 가슴을 움직였던 것이다. 바울의 마게도냐 환상처럼 이수정의 손짓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한국에 오게 만들었다. 한국판 마게도냐인이었다.

 

이수정 글의 내용

 

Yokohama, Dec. 13, 1883

I, Rijutei, a servant of Jesus Christ, send salutation to the brethren and sisters of the churches in America.

 

예수그리스도의 종 이수정(이주태)은 미국에 있는 교회의 형제 자매들에게 문안드립니다. 

 

By the power of faith and truth I receive great blessings of the Lord and my happiness is unlimited. Since by your prayers and supplications we are able to keep our faith firmly and are not moved by Satan, we ascribe praise and glory to the Lord.

 

신앙과 진리의 힘으로 내가 받은 하나님의 큰 축복은 무한합니다. 당신들의 기도와 배려로 저희들은 확고하게 신앙을 유지할 수있었고, 사탄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돌리는 바입니다. 

 

  

 

Tens of thousands of people in our country are still ignorant of the way of the true God and live as heathen. They have not yet received the saving grace of the Lord.

 

우리 조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방인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길로 가는 법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In this day of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our country is unfortunately situated in an obscure corner of the globe where it has not enjoyed the blessings of Christianity.

 

이시대에 복음이 전파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조선)는 기독교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세계의 구석진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Therefore, I am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Corean language in order to make it a means of extending the gospel. For the success of this work, I am praying day and night. The Gospel of Mark is nearly completed.

 

그러므로 나는 복음의 확산을 위해 한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의 성공을 위하여 저는 밤낮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번역작업이 거의 끝났습니다.  

 

 

 

이수정의 편지를 읽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이 편지는 인도 선교사로 가려던 언더우드의 마음을 움직여 조선으로 향하게 했고, 심지어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언더우드는 이 글을 보고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나라로 갈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일본에 있는 회심한 한 조선인인 귀족으로부터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호소편지를 받고 내마음은 떨리고 흥분되었습니다. 그 조선인의 이름은 리주태(이수정의 일본 발음)입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이수정은 일본에서 1884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만나게 된다. 

 

  



  

 

한인에 의한 최초의 성서 번역

 

또한 신령한 꿈을 통해 소명을 받은 이수정은 성경번역에 소명을 받는다. 그는 1882년 신사유람단원의 한 명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의 선진 농업정책을 물려받고 싶었다.  

 

  

 

그는 농학을 배우기 위하여 신사유람단자격으로 1882년 일본으로 떠났다. 

 

 

 

상술했지만 이수정은 일본에 가자마자 일본인 쯔다센을 통해 예수를 만나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다. 

  

 

이수정의 번역작업

 

이수정은 번역작업에 몰두하면서 먼저 한문성서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전서>를 만들었다.

 

1884년 예수 믿은지 1년밖에 안되었는데 신약성서 마대전, 신약성서 마하전, 신약성서로가전, 신약전서약습서, 신약전서사도행전을 간행하였다. 미국성서공회가 자금지원을 했다. 

 

 


그 이듬해 1885년에는 우리말로 된 번역본 <신약전서마가복음언해>를 출간하였다. 1885년 언더우드가 갖고 들어온 성서였다. 

 

  

 

언더우는 그의 번역본을 갖고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성서로 가르치는 선교사들


선교사들은 이 한글성경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회만 가면 한글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글자조차 몰랐던 민중들이 교회에 가서 한글을 알기 시작했다. 언더우드가 갖고온 한글성경은 교회부흥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결정적 요인은 루터가 사제들만 알았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 성경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한글로 된 성서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기독교는 순식간에 부흥이 되었다.  

 

  


이수정의 일본 40개월 체류가 조선을 성서한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수정의 슬로건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우리 민족의 소망이다"이다. 

 

  


그는 만주에서 로스와 조선상인이 번역한 성서에 오역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수정은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 사도행전, 야보고서를 번역하여 1천권씩 출간하였다. 

 

  

 

마가복음서 번역


신약 마가복음은 1885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6천부가 간행되었다. 만일 이수정이 조선 땅에 살고 있었다면 성서번역은 불가능하였다. 당시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베푼 최대의 호의는 예수를 알게 하였고, 성서를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일본은 우리를 박해하고 고난만 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게해주었고 미국의 선교사들을 초청하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이수정이 성서를 번역하도록 해준 것이다.  

이수정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는 것은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을 믿으면 꽃이 피고 얽히고 설킨 가지마다 열매가 가득하니 깊이가 있고 심히 크고 달도다"고 했다.  

 

  

 

성경번역자로서의 소명

 

하나님은 이미 꿈을 통하여 성서번역자가 될 것을 보여주었다. 

 

루미스 선교사는 "이수정은 어느날 꿈을 꾸었습니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책으로 가득 찬 보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수정은 그 책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 책은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그 어느 것보다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고 했다.

 

 

 

  

 

 

2. 조선으로 도래한 이수정

 

이수정은 1882년 일본으로 가서 일본인에 의하여 예수를 알고 성경을 번역하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한국에 오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1886년 조선으로 온 이수정은 오자마자 성경번역을 이유로 죽고 만다.  

 

이수정은 복음을 접하고 1885년 7월부터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 예배집례를 주관했으며, 이들 유학생들에게 일본의 선진 문물을 전수하였다. 그는 개화파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에게 개신교 교리를 전파했다.

 

1886년 갑신정변이 끝나고 이수정은 조선으로 그의 임무를 마치고 왔다. 조선은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수구파가 득세하고 있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수정은 조선 조정과 김옥균의 미움을 양쪽에서 받게 되었으며, 특히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수정은 민씨집안과 친숙했기 때문에 김옥균을 죽이려고 했던 민비측과는 호의적이었다. 민비측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김옥균은 민비가 파송한 프랑스 유학생 홍정우에 의하여 중국에서 1894년 3월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김옥균을 죽인 민비는 1895년 조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공모에 의해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옥호루에서 암살당했다(을미사변). 민비가 청일전쟁시 청이 일본에서 패배하자, 친러파와 손을 잡고 배일정책을 행하자 일본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왕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옥호루

 

  


이수정도 1886년 귀국과 동시에 개화파를 적대시하던 당시 수구파 집권 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1886년 귀국하자마자, 보수 우익세력들에 의해 성경번역을 이유로 죽게 된다. 일본으로 간 이수정은 복음때문에 살았고, 조선으로 온 이수정은 복음때문에 죽었다. 그만큼 조선사회는 여전히 폐쇄된 사회였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살고 조선에서 죽었다. .

 

조선에 복음을 갖고 들어온 이수정은 죽었지만 일본에서 번역한 복음은 조선의 민중을 통하여 그들의 가슴에 살아 있었다.    

 

이수정은 천재학자로서 하나님은 그의 천재적인 어학 능력을 성경을 번역하는데 사용하였다. 이수정은 순교를 당했어도 그가 번역한 성경을 통하여 한반도에는 예수의 역사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보편사 속에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성경을 통해 구속사가 들어와 보편사는 근대화의 길목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쯔다센이 없었더라면 안종수도 없었고, 안종수가 소개하지 않았더라면 이수정은 쯔다센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한 명의 일본인이 전한 복음이 한국을 복음의 물결로 뒤덮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났고, 1973년 빌리그라함 부흥운동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2023년에는 빌리그라함 방문 50주년 기념식이 열리기도 했다.

 

한국 기독교인이 천만 명 시대로 접어든 것도 성경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이수정의 영향도 일조하였을 것이다. 

 

이수정의 회심은 암흑의 조선 500년사에 근대의 눈을 뜨기 위한 한 줄기의 빛이 되고 말았다. 보편사속에 구속사가 들어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근대화문물을 배우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수정은 복음의 도래인이 되어 한반도에 복음을 갖고 도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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