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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도래인들
중국을 통한 조선 선교, 1866년 토마스 선교사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해 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쇄국정책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명을 죽이는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그러나 1866년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미국상선 제너널 셔어먼호가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셔먼호는 통상을 강요하자, 평양감사는 대원군의 쇄곡정책에 따라 외국과의 통상은 국법에 벗어난다고 판단, 수교를 거절하였다.
갑자기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운항이 어려워지자 난폭하게 대포까지 발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셔먼호가 먼저 공격을 했다. 셔먼호는 80급 증기선으로 12파운드의 대포 2문을 갖추고 선원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토머스는 셔먼호를 타기 전 1865년 9~12월 황해도 연안 섬에서 선교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셔먼호는 백령도 · 초도 · 곶석도를 거쳐 대동강 하구의 급수문을 지나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셔먼호의 승조원들은 프랑스 신부를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통상, 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 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했다.
그러나 중무장한 셔먼호는 이를 뿌리치고 항행을 강행, 드디어 평양 만경대까지 올라왔다. 조선 관리는 이러한 무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세 차례나 음식물을 후하게 공급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호는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마비가 그치자 갑자기 수량이 줄어들어 운항이 어렵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토마스선교사도 이 때 같이 순교하였다. 토마스(R.J. Thomas)는 1866년 9월 5일 대동강변 모래밭에서 27세 나이로 순교된다.
토마스의 순교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와 선교를 위해 배를 탄 사람이다. 그러나 배는 소실되고 승무원 전원이 죽었으며 통역관 역할을 한 토마스는 이 과정에서 사로 잡혀 순교했다.
"내가 오늘 서양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에 웃으면서 책 한 권을 내밀며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 없어서 가지고 왔다.
이처럼 그를 죽인 병사는 회고 했고,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으로 조선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한석진 목사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평양에 온 것은 임진년 10월, 즉 주후 1892년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26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 때 저는 성경을 팔며 전도하러 다니면서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탈 때 바깥으로 성경을 던지면서 "야소(예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전도하는 내용과 팔러다니는 책자가 그 서양인이 배에서 던진 책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배의 향방을 찾던 미군 해군의 노력으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72년 신미양요의 직접적인인 단서를 제공한다. 많은 한인을 살해하고 미군은 철수했다.
조선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서구 외세의 물결이 밀려오자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맺고 미국과 공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서양 국가 중 처음 맺은 조약이었다.
그러나 이 때 알려진 조선에 대한 미군의 관심이 1882년 한미통상수호조약(인천)을 체결하고 그 뒤를 이은 미국 각교단의 선교사 파송으로 연결된다.
일본을 통한 조선 선교, 쯔다센과 이수정
이수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유튜브를 클릭하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WBUbcvkwREo
공교롭게도 한국의 선교는 일본인을 통하여 복음이 전래된다.
일본은 침략과 전쟁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지만 복음을 전하여준 나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본인 농학자 쯔다센이 이수정을 전도하였고, 이수정은 마가복음까지 번역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농학자 안정수는 일본에 가면 반드시 쯔다센을 만나고 쯔다센의 예수교사상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보라고 조언했다.
이수정은 “전라도 옥과현에서 1843년 대학자 이병규(李炳逵)의 장남으로 출생”했고, 큰 아버지 이달규는 천주교 탄압으로 처형 당한 순교자였다. 일찌기 그의 가문에는 기독교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882년 9월 개혁파 이수정은 민영익과의 친분관계로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게 된다.
얼마 뒤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이수정은 농부로 변장하여 명성황후를 지게에 거름이 나가는 것처럼 꾸며 궁궐에서 빠져나와 광나루를 건너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켰다.
그의 친구 농학자 안정수가 이수정을 쯔다센에게 소개했다. 안정수는 근대농학에 대한 농정신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수정은 일본으로 올 때 예수교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훗날 이수정은 예수교리에 심취되어 세례를 받고 성서번역자가 되고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한국에 오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언더우드의 결심
언더우드는 이수정의 글을 보고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언더우드는 해외선교부에 보내는 글에 한 조선인 귀족이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말에 내 마음은 떨리고 흥분되었다고 했다.
이수정의 글이 없었다면 언더우는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 통의 편지가 한국을 영적으로 구원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언더우드는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나라로 갈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일본에 있는 회신한 한 조선인인 귀족으로부터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호소편지를 받고 내마음은 떨리고 흥분되었습니다. 그 조선인의 이름은 리주태(이수정의 일본 발음)입니다"고 했다.
윌리암 그리피스도 그의 책에서 이수정이 개종된 기독교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한 지식인이 예수를 믿고, 그의 달군의 어학실력으로 미국선교잡지에 글을 올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1885년 한국에 첫 발을 내디게 되었던 것이다.
쯔다센이 없었다면 이수정은 없었고, 이수정이 없었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한국에 없었을 것이다.
한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것이 큰 씨앗이 되어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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