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일본9)

일본의 천주교와 신앙인 도래인들

편집인 | 입력 : 2023/08/30 [01:24] | 조회수: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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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구조 

 

일본은 태평양 연안의 섬나라로 홋가이도, 혼슈, 시코큐, 규슈의 4개의 큰 섬과 오키나와를 비롯한 6800여 개의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졌고, 크기는 37만Km²로 한반도의 1.7배 남한의 3.8배이며,  인구는 1억2천6백만명으로 남한(5천1백만명)의 2.4배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다.

 

  

 

무신정권, 제국주의로 승화  

 

일본은 천황과 무사정권인 막부(쇼군)에 의해 통치되어 왔을 정도로 사무라이로 표시되는 무신정권이 오랫동안 일본을 지배했다. 이러한 무신정권은 1941년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공격에까지 이어졌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자산업과 제철산업으로 세계 최고의 나라였으며, 현재는 최고 자동차의 나라로 인식되어 있다. 

 

이렇게되기까지 일본은 일찍부터 막부시대의 무신정권을 끝내고, 1854년 미국의 강압으로 미일수호조약을 체결되는 것을 시작했다.

일본은 서구 열강에 문호가 개방되어 일본 내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막부정부가 끝나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통치와 함께 근대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쇄국정책


조선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국가로서 '나라의 문호를 걸어잠근다'는 의미에서 쇄국정책을 실시할 때였다. 1866년(병인년)에 만든 척화비를 1871년(신미년)에 전국적으로 세운 것은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당시는 병인양요, 신미양요사건을 경험할 때였다.

 

  

쇄국정책과 개방정책

 

우리나라가 쇄국정책을 실시할 무렵, 일본은 1854년부터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어 개방으로 나아갔고, 1868년은 메지이유신의 단행으로 서구의 근대화 길로 나아갔다. 일본 무사들이 막부정치를 끝내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다. 

 

  

 

메이지유신(1868년)

 

메이지유신은 에도막부를 타도하여 천황(덴노)중심의 체제를 마련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으로서 그 범위는 법률, 신분제도, 지방행정, 금융, 유통, 산업, 경제, 문화, 교육, 외교, 종교 등 다방면에 미쳐 서구화로 가는 작업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제국주의


그러나 메이지유신은 일본근대화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이면에는 제국주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메이지유신은 제국주의, 군국주의 유신으로 나아갔다. 

 

 

 

메이지유신과 조선침탈 유신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지 8년 만에 조선은 일본과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맺는다.

제2의 임진란이 시작되었다. 임진란이 끝난 지 280년 만에 일본은 조선에 다시 쳐들어와 1945년까지 조선은 짓밟혔다.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조선점령은 20세기 중간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은 처음부터 의도된 접근을 하여 조선수군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이것이 운요오호 사건이었다. 

 

 

메이지유신과 정한론


이처럼 일본의 메지이유신은 조선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세력은 정한론을 주장했다. 정한론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메이지 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당시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의 10년 권력이 끝나가던 1873년 겨울,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한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사이고는 “군대를 파견하면 조선 측에서 반드시 철수를 요청할 것이고 우리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사절을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조선이 (사절에 대해) 폭거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므로 전쟁의 명분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절을 파견하면 잡아 죽일 것이 예상되므로 부디 저를 보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 죽는 것 정도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조선의 침략유신이었다. 조선은 칼로 무장했을 때, 일본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조선 해군은 돛단 배로 무장하였지만 일본은 군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초읽기였다. 

 

일본의 기독교 전래 

 

일찌기 칼로 군사 막부정책을 추구하였던 일본에도 천주교를 통하여 복음이 들어왔다.

일본의 첫 복음의 시작은 1549년 8월 15일 스페인 소속 프란시스코 사비엘 선교사(1505~1552)가 일본인 야지로의 안내로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 상륙함으로 시작되었다. 

 

  사비엘

 

사비엘 선교사는 일본에 2년 3개월 가량 머물면서 전도를 하여 그가 머물렀던 가고시마, 히라도, 야마구찌 지방에는 많은 신자가 생겨났다. 

특히 야마구찌 지방에는 5개월간 머물면서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가 떠난 이후에도 신자가 계속 늘어 1556년엔 2천명이 넘는 신자가 생기기도 해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과 다이묘(지역 영주)가 개종하여 한때 기독교 인구가 50~70만명이나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친기독교 정책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찌 막부의 쇼군을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후(1573) 전 일본을 통일해 나갔는데 불교를 대항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영주(다이묘)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에 우호적이었던 기독교는 교토에 교회도 세우고 신학교까지 설립토록 지원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정권을 잡으면서 기독교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인 천주교도들

 

임진왜란(1592~1598) 때에 고니시(小西行長) 부대가 거의 크리스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아주 적극적인 탄압은 아니었다.

그들은 십자가 깃발을 들고 조선에 쳐들어 왔다. 천주교도들이 십자가를 걸고 남미를 쳐들어갔던 것과 같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왕래 


당시 고니시 부대는 경남 웅천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병사들이 지쳐 사기가 저하되자 고니시는 1593년 12월에 군종 신부를 초빙하여 조선에 오게 했다. 

 

  

 

  


기독교 이름으로 처음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은 그레고리 세스페데스(1551-1611) 신부이다. 지금도 창원에 가면 세스페데스 공원이 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진해 웅천왜성에서 일본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가 왜성에 머물때 조선인 대상 포교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 세스페데스는 대마도에 붙잡혀 와 있던 조선 소년 1명을 데리고 가 신학교에 보내고 세스페데스 사후 이 소년이 중국을 통해 조선 땅에 선교할 기회를 엿보았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조선인, 일본에서 최초의 교회 설립

 

당시 끌려온 조선인 포로 2천여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고 이들은 나가사키에 조선인 천주교 연합회를 만들었다.

일본내 유일한 조선인 천주교회인 성 라우렌시오 성당이 건립된 것도 세스페데스와 동료 선교사들이 있어 가능했다.

조선인들이 최초로 예수를 알게 되어 그들은  일본땅에서 노동을 하여 돈을 모아 조선인 교회를 개척하였다. 하와이 사탕수수 한인 노동자들이 교회를  설립한 것과 같다. 조선인들은 어디를 가나 교회부터 세웠다.

 

  

 

빈센트 권의 순교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이승훈 씨보다 200년 앞서 신자가 된 후 일본에서 순교한 '빈센트 권'은 임진왜란 때 스페인 신부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사 수업을 받았으며 막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포교에 전념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리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한 빈센트 권은 결국 탄압으로 고초를 겪다 화형당했고, 당시 일본에서 작성된 '205인 순교복자'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빈센트 권은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였다. 그는 "조선인들이 자유를 빼앗긴 것은 하늘나라의 자유를 얻기위한 것이다" 라며 한국에도 그리스도의 자유가 상륙할 것을 예측하기도 했다. 

 

자유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노예 도래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임진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은 고려정에  한인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세례받은 조선 천주교도들

 

빈센트 권 이외에도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1593년부터 일본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빈센트 권은 신앙을 지키다가 그만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다른 조선인들도 신앙을 지키다가 화형을 당했다. 

 

  


일본인들은 거꾸로 매달고 배교하기를 바랬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막부의 반기독교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  

 

일본의 개신교와 신앙인 도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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