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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구조
일본은 태평양 연안의 섬나라로 홋가이도, 혼슈, 시코큐, 규슈의 4개의 큰 섬과 오키나와를 비롯한 6800여 개의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졌고, 크기는 37만Km²로 한반도의 1.7배 남한의 3.8배이며, 인구는 1억2천6백만명으로 남한(5천1백만명)의 2.4배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다.
무신정권, 제국주의로 승화
일본은 천황과 무사정권인 막부(쇼군)에 의해 통치되어 왔을 정도로 사무라이로 표시되는 무신정권이 오랫동안 일본을 지배했다. 이러한 무신정권은 1941년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공격에까지 이어졌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자산업과 제철산업으로 세계 최고의 나라였으며, 현재는 최고 자동차의 나라로 인식되어 있다.
이렇게되기까지 일본은 일찍부터 막부시대의 무신정권을 끝내고, 1854년 미국의 강압으로 미일수호조약을 체결되는 것을 시작했다.
조선의 쇄국정책
쇄국정책과 개방정책
우리나라가 쇄국정책을 실시할 무렵, 일본은 1854년부터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어 개방으로 나아갔고, 1868년은 메지이유신의 단행으로 서구의 근대화 길로 나아갔다. 일본 무사들이 막부정치를 끝내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다.
메이지유신(1868년)
메이지유신은 에도막부를 타도하여 천황(덴노)중심의 체제를 마련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으로서 그 범위는 법률, 신분제도, 지방행정, 금융, 유통, 산업, 경제, 문화, 교육, 외교, 종교 등 다방면에 미쳐 서구화로 가는 작업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제국주의
메이지유신과 조선침탈 유신
일본은 처음부터 의도된 접근을 하여 조선수군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이것이 운요오호 사건이었다.
메이지유신과 정한론
당시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의 10년 권력이 끝나가던 1873년 겨울,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한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사이고는 “군대를 파견하면 조선 측에서 반드시 철수를 요청할 것이고 우리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사절을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처럼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조선의 침략유신이었다. 조선은 칼로 무장했을 때, 일본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조선 해군은 돛단 배로 무장하였지만 일본은 군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초읽기였다.
일본의 기독교 전래
일찌기 칼로 군사 막부정책을 추구하였던 일본에도 천주교를 통하여 복음이 들어왔다.
사비엘 선교사는 일본에 2년 3개월 가량 머물면서 전도를 하여 그가 머물렀던 가고시마, 히라도, 야마구찌 지방에는 많은 신자가 생겨났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과 다이묘(지역 영주)가 개종하여 한때 기독교 인구가 50~70만명이나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친기독교 정책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찌 막부의 쇼군을 몰아내고 실권을 잡은 후(1573) 전 일본을 통일해 나갔는데 불교를 대항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영주(다이묘)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에 우호적이었던 기독교는 교토에 교회도 세우고 신학교까지 설립토록 지원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정권을 잡으면서 기독교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인 천주교도들
임진왜란(1592~1598) 때에 고니시(小西行長) 부대가 거의 크리스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아주 적극적인 탄압은 아니었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왕래
세스페데스 신부는 진해 웅천왜성에서 일본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가 왜성에 머물때 조선인 대상 포교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인, 일본에서 최초의 교회 설립
당시 끌려온 조선인 포로 2천여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고 이들은 나가사키에 조선인 천주교 연합회를 만들었다.
빈센트 권의 순교
그는 교리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한 빈센트 권은 결국 탄압으로 고초를 겪다 화형당했고, 당시 일본에서 작성된 '205인 순교복자'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빈센트 권은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였다. 그는 "조선인들이 자유를 빼앗긴 것은 하늘나라의 자유를 얻기위한 것이다" 라며 한국에도 그리스도의 자유가 상륙할 것을 예측하기도 했다. 자유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노예 도래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임진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은 고려정에 한인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세례받은 조선 천주교도들
빈센트 권 이외에도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1593년부터 일본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빈센트 권은 신앙을 지키다가 그만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다른 조선인들도 신앙을 지키다가 화형을 당했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막부의 반기독교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
일본의 개신교와 신앙인 도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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