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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과의 관계
14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명나라가 등장하였을 때 일본에서는 무신정권인 무로마치(室町)幕府의 시대였다.
1192년에 시작된 최초의 무신정부인 가마쿠라 막부(바쿠라) 133년만에 막을 내리고, 1338년부터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이 된다. 1392년에 조선에서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이씨조선을 창립하였을 때이다.
일본은 삼국시대에 야요이, 야마토 정권을 수립하고, 중세에 나라시대, 헤이안시대를 마치면서 12세기말부터는 고려시대와같은 무신정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을 막부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초기는 일본과 좋은 관계를 형성했다. 조선과 일본이 동시에 明의 조공제도에 편입되어 명의 조공제도가 제도적으로 정비됨에 따라 1404년에는 조선과 일본은 기존관계를 정리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15세기 초 조선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 명과 사대관계를 가지면서 일본과는 근린교린 관계를 형성했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에게는 조선·명과의 무역 이익이 대단히 중요하여 적극적으로 왜구를 단속하였다. 이처럼 당시 조선·일본·명은 국교를 재개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개시했다.
일본은 무역과 문화가 절실히 필요할 때였다. 조선은 명에 대해서는 사대주의, 여진과 일본에 대해서는 근린외교정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가 깨진 것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을 도운 다이요(영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하여 조선을 침탈하였던 것이다.
결국 군사로 무장한 막부의 무신정권은 조선의 발목을 잡고 만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전국시대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두 차례의 침략 중 1597년의 제 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화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15만명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으며, 12만여 명 이상의 코가 베워졌다.
일본의 1192년에 세워진 무신정권인 가마쿠라 막부 이후에 14C초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서 고묘 천황을 옹립하면서 무로마치 막부(1336~1573)를 개창했다.
당시에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교토에서 개창한 북조(무로마치 막부)와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現 나라현)에서 남조를 수립하면서 남북조시대(1336~1392)가 전개되었는데. 60년간의 남북조시대를 북조인 무로마치 막부가 통일시킨다.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는 명과 조공 무역을 통해 왜구를 단속함과 동시에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했는데 점점 무역의 실권이 쇼군이 아닌 다이묘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와 같았다. 다이묘는 장군(쇼군)밑에 있는 영주와 같은 사람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15C 후반 오닌의 난(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발생한 내란,1464~1475)이후로 사무라이들의 세력 다툼이 발생하면서 전국시대(일본이 100년간 분열된 시기로 각지의 다이묘들이 일본의 최고가 되기 위해 발생된 내란,15C후반~16C후반)가 시작했다.
16C에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16C 후반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시키면서 전국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전국시대 당시에 포르투갈의 조총이 들어 왔고 크리스트교(기독교)가 유입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총을 이용해 일본을 통일했고 심지어 조선까지 통일하고자 원했다.
역도래인 일본
삼국시대 사람ㄷ르은 순수하게 언어와 문물을 전달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래하였지만, 조선시대 일본은 조선을 총칼로 조선을 정복하기 위하여 도래했다. 그들은 역 도래인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총을 갖다보니 뵈는 게 없었다. 그는 조선을 침략했지만 이순신의 괄목할만한 방어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성사키싥 수 없었다.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 이순신때문에 보급로가 끊기면서 전쟁은 더이상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전행후 설상가상으로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 침략은 끝나게 되었다.
에도 막부시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에도 막부시대를 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창립하면서 조선의 포로를 귀환시킨다.
당시 조선은 포로귀환을 위하여 통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일본과 조선과의 화해무드가 조성된 것이다. 대마도에 가면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막부시대부터 일본은 칼이 아니라 모두 조총으로 무장했다. 당시 조선은 여전히 칼과 화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최대의 무기 수출국이 되었다.
선조이후 훈련도감을 설치하였지만 사림파, 훈구파의 당쟁과 사화, 대원군의 쇄국정책, 고종의 무능정책, 민비의 족벌 정책,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유학의 서원정치 등으로 인해 조선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동학혁명때 농민들은 칼과 낫으로 조총으로 무장한 청일과 전쟁을 벌여 대량 살상을 당하기도 했다.
동학교도들은 총에 맞지 않기 위해 장태를 굴리기도 했다.
일본의 막부정치는 군사로 무장한 무신정치로서 결국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일본의 막부정치는 군국주의로 이어져 조선이 감당할 그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막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의 막부정치는 관동대지진시 한민족을 6,000명이나 살해할 정도로 군사적이며 폭력적인 유전자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피에는 항시 약자에 대한 침략의 피가 흐르고 있다. 여전히 독도는 일본 땅이라 우기고 있다.
막부(幕府),장군의 막사
막부는 1192년부터 1868년까지 이어진다.
즉 막부는 일본은 천황의 정치가 아니라 천황을 명분으로한 쇼군(장군)들이 12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일본의 무사 정권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려시대는 최씨의 막부가 있었다.
일본에서 막부는 무인(武人) 가문의 통치를 상징하는 좀 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군사정부가 막부이다.
이로 인해 각 지방에서는 치안을 이유로 다이묘(大名, daimyo)를 비롯한 무사계급이 성장하였으며 군사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쇼군의 지위가 매우 높아졌다.
12세기 후반 결국 쇼군은 국가의 실질 통치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다이묘가 강해지면서 전국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가마쿠라 막부
첫 번째 막부는 1192년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1147~1199, 통치1192-1199)에 의해 세워졌다.
그가 세운 정권은 그의 본부가 위치했던 가마쿠라 (鎌倉, Kamakura)의 지명을 따라 가마쿠라 막부로 불린다. 군사 사령 본부로 시작한 막부는 점차 국가의 군사, 행정, 조세, 법체계를 비롯한 전 영역에 지배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12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이후 막부라는 군부정치 체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로마치 막부
1338년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막부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Muromachi shogunate, 아시카가 막부)가 등장했다. 16세기 무로마치시대는 쇼군 옹립을 둘러싼 갈등과 전쟁,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감에 따라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가마쿠라막부에서는 쇼군이 강했지만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다이묘들이 권력을 형성했다.
에도막부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 한다. 에도 막부는 바쿠한 체제 밑에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을 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 조선의 대원군과같은 막부였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서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통신사를 12회 초청하여 두 세기 동안 양국간의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에도 시대 말기, 막부 타도 운동이 융성하였던 격동의 시기는 막말(幕末 바쿠마쓰)이라 칭한다.
막부의 몰락
일본의 군사정권인 막부는 19세기 중반 서양세력의 개혁요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다이묘와 민중들의 불만을 샀고 이로 인해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통치권을 천황에게 넘겼다. 대원군의 위정착사 운동과 유사했다. 개방에 두려운 정권은 종말을 막맡게 된다.
일본은 비록 막부는 무너지고 기존 제도들이 상당부분 폐지되기 시작했으나 과거 도쿠가와 막부가 형성했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일부는 1868년 세워진 메이지(明治, Meiji) 정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일찍부터 개방의 길로 들어섰다. 하급무사들이 막부를 무너뜨려 청황체제로 하면서 적극 개혁을 추구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문물과 군사제도를 수용하고,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근대 산업을 육성하였다. 6세 이상 의무교육을 하고, 정부주도의 산업정책을 이끌었다.
사무라이
즉 호위무사이다. 일본인들은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사무라이 정신을 지금도 자랑스러워하고 본받으려 하고 있다. 일본이 칼로 무장할 때 조선은 부패할대로 부패하여 부패정치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수 막부시대와 성령의 검을 가진 사무라이
대원군과 민비의 주도권사움, 무능한 고정의 눈치보기, 구식군인과 신식 군인과의 싸움, 청나라파와 일본파의 싸움, 농민과 관리와의 싸움 등 나라는 사분오열되었고, 푸른 눈의 선교사들의 가르침 외에 희망이 없는 민족이었다.1995년부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예수의 막사를 통하여 조선에도 영적인 막부시대가 열린 것이다. 조선인들은 성령의 검을 찬 진정한 사무라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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