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일본2)

도래인과 역도래인

편집인 | 입력 : 2023/08/03 [05:03] | 조회수: 587

 

도래인

 

일본어로 도래인은 '물을 건너온 사람들'을 말한다. 중국북방과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걸쳐서 많이 이주하였다.

도래인이 최초로 정착하였을 때는 기원전 3세기 조몬시대(신석기)시대와 4세기에 해당하는 일본 야요이 시대에 많이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도래인들은 조몬시대부터 도래하여 조몬인을 몰아내고 정착하여 일본 열도에 벼농법과 금속제련 기수술을 전수하여 석기시대인 조문시대에서 청동기 철기시대인 야요이 시대로 넘어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삼국시의 도래인들이 철기문명을 갖고 갔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의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진출하여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철기문명으로 가도록 하였다. 

 

 

 

야요이, 야마토 시대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와 일치하여 이 당시에 백제와 가야 등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문물을 전파하기도 했다. 

 

특히 야요이 시대부터 삼국시대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백제와 신라인들이 건너가기도 했고, 고구려인들도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였다. 

 

고구려는 학문과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담징, 혜자, 혜관등을 파송했고, 신라는 조선술, 축제술, 토기술, 음악, 의학 등을 전파했고, 백제는 아직기, 왕인, 헤총 등을 파송하여 유학, 천자문, 불교, 예술을 전파하기도 했다.

 

 

  

백제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외교 관계를 맺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에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 와 『고사기』에 따르면 진구(神功)황후 46년(366)에 양국이 최초로 국교를 맺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근초고왕대로, 국교 수립 후 양국은 꾸준히 사신을 교환하며 문화를 교류하였다.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곳곳에는 백제의 문화가 남아 있다.

 

일본과 백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문화적 교류가 많았다. 일본에는 백제 근초고왕을 모신 석상신궁(石上神宮: 일본의 고대 왕족 물부가(物部, 모노노베) 까지 있다. 

 

일본에선 백제(百濟)를 ‘구다라(くたら)’라고 부른다. 큰 나라라는 뜻이다. 일본말의 ‘나라(なら)’는 한국어의 ‘국가(國)’라는 뜻으로 백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백제가 문화강국으로 자리잡을 때 변변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일본은 국가란 개념이 없었기에 이를 빌려 쓴 것이다. 훌륭하고 뛰어난 것을 지칭할 때 ‘구다라(百濟)’라고 불렀다. 

 

  

 

 

 

근초고왕은 가야가 점령하였던 왜지를 공략하여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다. 근초고왕은 일본땅에서 가야계 응신(왜왕 찬)의 공격으로 전사하였으며 능히 일본 오사카 부근에 있다. 근초고왕을 모신 석상신궁에는 유명한 칠지도(우측 사진)가 전해온다.

 

  백제 근초고왕을 모신 선상신국


백제는 열도에 먼저 진출한 가야계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근초고왕이 전사하였고 그 무덤은 오사카 근처(河内国 西宮市의 舊市陵)에 있다.

 

이외에 백제는 일본과 교류하면서 건축술(대별걸물 터), 베틀, 꽃가루, 토기, 유리 등을 전파했다. 일본인들에게 백제는 큰 나라였다.

 

대벽건물터는 백제의 건축양식이다.

 

 

 

 

 

  일본 고고학 연구원

 

 

 

 

 백제는 베틀도 전하였다.

 

 

 

 

 

 


심지어 꽃가루까지 전했다.

 

 

 

 

 

 

 

 

  

 

 

아스카, 나라시대 일본의 사원은 백제인 등 한반도 이주민들의 기술로 건립되었으며, 불상도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직접 들여왔고 삼국계 이주 호족들과의 밀접한 연관 하에 제작되었다.

 

 

 

일본에는 백제왕 신사도 있을 정도이다.

 

 


페르시아의 유리잔이 백제까지 가서 다시 일본으로 건네졌다. 

 

 

 

 

가야

 

가야의 문명도 일본의 나라현까지 전파된 흔적이 많이 나온다.  한국 고대 사회에서 삼국을 비롯한 가야의 여러 나라와 일본 열도의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 열도의 정치 집단들은 가까운 거리의 가야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과 가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가야를 표현하는 ‘가야(加耶)’·‘가라(加羅)’에 대한 일본어 표기인 ‘가라(から)’[唐·韓·漢·加羅·加耶·迦羅·伽羅·伽耶]는 일본어 사전에 의하면 “일본어 내지는 일본 문화를 모르는 외국인 또는 외국제 물건”으로 정의되어 있다. 즉 일본인에게 가야 사람은 최초의 외국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간 가야의 흔적은 도처에 나타난다.

 

 

 

 

금동말안장, 가야계갑주, 금동신발 등 일본 오사카현 아스카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다. 이는 가야시대 도래인들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심지어 가야시대 배모양의 토기도 일본에서 발견이 되었다.

 

 

 

 

고구려

 

고구려도 많은 문물을 전파했다.

 

고구려 영양왕  때 일본에 건너간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은 유교의 5경과 그림을 가르쳤으며,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까지 전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호류지 금당벽화는 이 담징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담징이 신라에 머물고 있을 때 이 명성을 들은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당시 일본에서 제일 큰 호류지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담징을 모셔 가려고 사람을 보냈다.

백제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610) 담징은 스님들에게 불교의 경전을 가르치며 절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담징이 그린 호류지 금당벽화는 ‘인류문화사를 빛낸 명화’로 손꼽힐 만하다. 이 그림은 석가·아미타·미륵·약사여래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로, 안타깝게도 1948년에 불탔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지 5층탑 벽화의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됐고 지금은 컴퓨터로 재생돼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고구려의 음악(고려악) 에 관한 기록이 서기 684년, 고구려가 멸망한 지 16년 이후에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는 고구려악과 백제, 신라악이 모두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 후, 삼국의 음악은 발해악을 흡수하면서 고려악으로 통일되어 궁중음악인 가가쿠(雅樂)의 한 장르로써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속일본기 <續日本紀> 731년 7월 29일자 기록에 의하면 아악료(雅樂寮)에 소속하는 악생(樂生)의 정원은 대당악 39명, 백제악 26명, 고구려악8명, 신라락 4명, 탐라악 62명”이라고 나와 있다..

 

 


고대 한반도 출신 악사들의 활동은 고마가쿠(高麗樂, 고려라고 쓰고, 고마라고 읽는다. 고구려를 뜻한다)라는 장르로 분류되어 현재까지도 그 맥을 이어 오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 편집인



신라

 

 



일본 황실의 보물 창고 쇼소인에서 수많은 신라 공예품을 발견할 수 있다. 신라의 가야금과 먹 등이 전시돼 있다.

 

 



당나라나 신라로 갔던 일본 사절단이 탔던 배. 후쿠오카 해양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라 먹’. 신라 이두 등이 새겨진 명문도 있다.



신라시대의 놋수저가 일본에 그대로 있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마네(島根)현, 돗토리(鳥取)현, 후쿠이(福井)현 지역에서는 우리, 특히 신라계와 연관된 유적과 유물, 이야기는 물론이고, ‘시라기(신라)’라는 지명도 많이 남아 있다.

돗토리현에는 시라기(신라)라는 신사가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문화유산이 일본까지 건네 진 것을 알 수 있다.   

 

  돗토리현 시라기 신사

 

이외에도 야요이 시대는 도래인의 영향을 받은 선진문물의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1884년 도쿄도 야요이마치에서 처음 불견되었다.

이러한 토기는 조문시대보다 훨씬 발달한 것으로 벼농사경작, 금속기 문화와 함께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전하여진 것이다.

 

야요이 시대 토기


요약하면 야요이, 야마토시대에 삼국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 일본에 다양한 문하예술과 건축술, 조선술을 전해 주었다.

 

역도래인 일본

 

그러나 이후 이러한 고급문화전파로 발전한 일본은 임진란이라는 역풍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도래인들이 전해준 문화와 유적, 과학기술들로 인해 성장한 일본은 역도래인으로 변화되어 총칼로서 한반도를 침공하는데 앞장섰다. 일본은 역도래인이었다.(계속)   

  

http://lawtimes.net/4748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일본1)

 

http://lawtimes.net/4074 (독일편)

 

http://lawtimes.net/4098 (독일편2)

 

http://lawtimes.net/3910(하와이편)

 

http://lawtimes.net/3912 (하와이편2)

 

http://lawtimes.net/4283(중동편)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