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은 살리려고 했지만 가망이 없음을 알고, 유의태의 몸에 칼을 대었다. 그러면서 장기를 하나씩 꺼내 의학저서를 위하여 도해를 하였던 것이다. 다음의 영상을 보면 해부하는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
동의 보감에는 실제로 인체내부 묘사도가 있다. 이는 해부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묘사이다.
동의 보감
허준은 동국(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 ≪동의보감≫이라 이름하였으며, 훈련도감 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한국 최고의 한방 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해부의 경험에 힘입어 동의보감을 저술하게 된다. 허준은 해부를 하지 않고서 동의 보감을 저술할 수가 없었다.
동의 보감은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동양 의학사에서 최초로 정·기·신론에 근본을 두고 내장기의 생리적 기능변조와 그 직접적인 병증을 일괄하여 내경편(내과)에서 새로 다룬 저작이다.
350여 년 전에 현대 의학의 선구적인 학설과 치료법이 이미 강구되었다는 것은 해부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책이다.
『동의보감』은 총 25권 2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596년 선조의 명으로 허준 등 5인이 공동으로 편찬을 진행하다가 병란으로 중단된 것을 허준이 단독으로 추진하여 1610년에 완성하였다.
병의 치료보다 예방을 강조하고 중국과 조선 의학의 핵심을 잘 정리하여 백과사전에 맞먹을 정도로 뛰어나게 편집한 책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의서이다.
중국에서 30여 차례 출간되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될 정도로 국제적인 의서가 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허준은 유의태로부터 배운 의술에 힘입어 동의 보감이라는 대작을 완성하게 된다.
산청군은 허준과 유의태의 활동을 연고로 동의보감촌에 유의태와 허준의 동상을 세운다.
경상남도한약협회는 산청출신인 신의 류의태 선생과 그의 제자인 허준 선생이 활약한 전통한의학의 본고장으로 산청군이 추진하는 전통한방휴양관광지 조성사업에 적극 동참하고 전국 회원들의 뜻을 모아 허준 상을 건립, 기증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의태의 약수터
산청군은 유의태의 약수터까지 만들었다.
유의태는 설화속의 인물
유의태는 사실관계라기 보다는 설화속의 인물이다. 그러나 유의태와 관련한 유적이나 유물들이 더러 있다. 유의태는 명의임에는 분명했다.
허준이 유의태로부터 의학수업을 받았다는 설은 노정우 선생이 한의학논문에 쓴 것을 인용한 것이다.
노정우 선생이 처음 주장
1965년 9월 1일에 발간된 <대한한의학회보>에 노정우가 기고한 한 편의 논문에 유의태가 처음 등장한다. 노정우는 이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허준의 할아버지가 경상도 우수사를 오래 역임하였고 허준의 할머니는 진주 출신의 류 씨인 점으로 미루어 그의 어렸을 때의 생장은 역시 경상도 산청이라고 생각된다. (…) 당시 산청 지방에 유의태라는 신의가 있었는데, 이 유의태가 바로 허준의 의학적인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었다는 것이 여러 각도로 미루어 보아 부합되는 점이 있어 수긍이 간다."
유의태의 실존 가능성
그러나 유의태라는 인물이 논산에도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 유의태의 존재도 무시하지 못한다.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왕암리에서 유의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2005년 민속원에서 출간한 『한국구전설화집』14에 유의태에 대해서 수록하였다. 다음과 같은 유의태의 설화가 있다.
유의태의 설화
옛날 어떤 남자의 아내가 몸이 퉁퉁 부은 채 앓아누웠다. 남자는 다급한 마음에 유의태를 찾아갔다. 유의태가 “어찌 오는가?” 하고 물으니 남자는 “안식구의 몸이 갑자기 탱탱 부었습니다. 어떻게 낫게 해 줄 수 없습니까?”라고 다급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유의태는 “지금 집에 가서 부인한테, 아침에 물을 길러 가서 샘의 대추를 먹었는가 물어 보게.”라고 말하였다.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유의태가 말한 대로 물어 보았다. 아내가 주워 먹었다고 말하자 남자는 유의태를 찾아가 그런 적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유의태는 약 세 첩을 지어 주면서 “이걸 먹으면 나을 것이네.”라고 말하였다.
남자는 유의태 말대로 약 세 첩을 달여 아내에게 먹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부기가 내리고 이내 나았다. 남자는 다시 유의태에게 가서 물었다. “대체 어째서 그 대추를 먹고 이렇게 됐습니까?” 그러자 유의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 샘가에 대추나무가 있을 것이네. 대추는 초하루가 되면 빨그레 익게 되지. 고놈이 샘가로 떨어지자 그 옆에 독사가 있다가 그 대추를 콱 물었겠지. 뱀이 대추를 먹는 법은 아니라서 그냥 도로 뱉어 놓았어. 그런데 그 대추에 독이 들어간 거야. 그리고 물 길러 간 자네 부인이 그 대추를 먹은 거지. 그래서 내가 해독제를 지어 주었네.”
이처럼 유의태와 관련한 설화가 있기 때문에 유의태의 실존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산청군청은 자기 지역을 한의학 본고장으로 만들기 위해 유의태를 상징인물로 선정하고 동의보감촌을 만들었던 것이다.
①산청한의학 단지 조성 ②한의학박물관에 유의태 영정 전시 ③유의태 유적지 건립 ④‘산청을 빛낸 인물 유의태’ 산청박물관 전시 및 산청군청 홈페이지와 어린이산청 홈페이지에 게재 ⑤류의태 약수터 조성 ⑥약수터 안내판과 이정표 설치 ⑦산청군 관광지도에 류의태 약수터 표시 ⑧유의태 설화 게재 ⑨홍보 카탈로그 발행 ⑩단행본 《동의보감·산청 류의태와 허준 이야기》 저술 등을 실행했다.
유이태와 유의태
유의태가 아니라 유이태는 허준 (1539~1615)보다 100년뒤 어의로서 활약한 유이태(1652-1715)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설화속이라도 유의태의 등장도 무시하지 못한다.
허준의 한계
그러나 구한말이 되어서야 한방의 한계가 드러났다. 전염병치유가 어려웠고,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의 유혈을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우정국 개원식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민영익은 심한 자상(刺傷)을 입고 조정 외교 고문이던 묄렌도르프 집으로 옮겨졌으나 사경을 헤맸다.
여러 어의가 달려왔지만, 칼에 찔리고 베인 상처를 지혈하는데 실패하고, 치료의 한계를 느끼자. 묄렌도르프는 미국 공사관 소속의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을 불러 치료하게 했다.
동의 보감의 한계
알렌은 지혈과 봉합치료로 민영익을 살렸고 이를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조정에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올렸다.
이 제안이 수용돼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 개원한다. 제중원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재탄생했다. 한의학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당시 한의사 10여 명이 침으로 지혈을 하여도 피가 멈추지를 않았다. 선교사 알렌이 서양의 의료기기를 갖고서 지혈을 하여 민영익의 치료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다. 진정한 치유는 육신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심령의 치유가 필요하였다. 진정한 허준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서의 보감 시대 도래
조선중기는 신의 유의태와 허준이 활동하였지만 구한말에는 선교사들을 통하여 진정한 치유자 예수가 활동하게 되었다. 유의태는 백성들의 치유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까지 백성들을 사랑했지만 예수 역시 자신의 온 몸을 버리면서까지 온 인류를 사랑했던 분이다.
허준 역시 유의태의 유언을 받들어 유의태의 몸을 해부하여 동의보감을 써서 의술에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백성을 치유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의사들은 의료윤리가 사라지고, 물질의 윤리만 남은 상태이다. 유의태, 허준, 장기려같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산청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을 버리면서까지 백성들을 위하여 살았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진정 치유자이면서 자신의 몸을 버려 온 민족을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전조였던 것이다.
산청은 유의태와 허준의 삶, 동양의술에서 벗어나 예수가 중심되는 서구의 의술과 서구의 기독교가 전파되는 서의 보감 시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