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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카타르의 월드컵을 통하여 한국민들은 2주 동안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특히 가나에게 지다가 조규성이 헤딩으로 두 골을 넣은 장면, 포르투갈에게 지다가 마지막으로 황희찬이 골을 넣은 장면들은 두고두고 반복될 장면들이다.
1973년 삼환기업의 중동진출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주변국들과는 달리 중동산유국과는 일찌기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은 1973년 오일파동이후 1974년부터 국내 삼환기업을 시작으로 건설업계가 진출했다. 삼환기업의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카이바-알울라 고속도로 공사, 첫 중동진출이었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울라와 카이바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중동진출 기업 1호’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이후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대우건설 파키스탄 고속도로 건설 등 1985년까지 7백억 달러의 공사를 수주하였다.
현대 건설의 정주영은 1975년을 ‘중동 진출의 해’로 선포하고, 아랍어로 현대건설 홍보영화를 만들어 중동에 배포토록 했다. 그리고 오일달러가 가장 풍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의 해외건설 수주를 위한 전략팀을 구성했다.
아스리조선소 공사는 1975년 착공, 2년여 만인 1977년에 완공되었다. 이 공사는 바레인의 무하라크섬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매립지에 드라이 도크를 세우는 공사였다. 현대는 이 공사를 위해 토목공사 33만명, 건축공사 26만명, 전기공사 25만명 등 연 90만여명을 투입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외에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인 주베일 지역의 산업시설을 위한 신항만 공사까지 맡았다.
또한 110만㎥의 콘크리트 작업량은 웬만한 항만공사의 흙 매립량보다도 많은 양이었다. 이것을 현대건설이 수주한 것이다. 그만큼 정주영의 존재는 위대했다.
중동에는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해 몇십 배 오른 석유 값으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이 넘쳐났다. 그들은 몇십 년, 몇백 년을 내다보고 도로·항만·주택·공공시설 등 건설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한인 노동자들은 절제된 생활, 고된 노동,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싸우며 그들은 보다 나은 내일을 소망했다. 그리고 땀방울과 눈물로 얼룩진 그들의 꿈은 열사의 땅, 중동 건설에 앞장섰다. 그것이 살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자들은 사막에서 열사와 싸워야 했다. 중동에도 새벽종이 울렸고 새아침이 밝았다.
공교롭게도 동명인 김삼환목사는 1973년 당시는 농촌교회나 개척교회를 전전할 때였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으며, 1974년 중동에 근로자를 파견할 때는 3차 계획때였다.
이러한 한국의 경제 상황과 중동의 경제 시장이 맞물리면서, 국내 기업들은 중동의 건설공사를 수주하였고, 많은 건설 기능 인력들이 중동으로 나가게 되었다. 즉 중동의 경제개발에 동참하여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오일머니로 되찾은 경제 활력
중동 진출 첫해인 1974년 수주액은 2억6,000만 달러였으나 다음해에는 그 세배인 7억5,000만 달러, 1980년에는 다시 10배 이상으로 늘어 82억 달러가 되었다. 1975-1980 기간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가 중동건설에서 번 달러였다.
1981년과 1982년 해외건설 수주 총액은 각각 137억 달러와 133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파견 근로자 수도 급증했다. 1975년 6,000명이던 것이 1978년에는 10만 명에 육박했고 한때 20만 명까지 이르렀다. 성취욕이 강하고 근로기강이 엄정한 한국 근로자들은 해외 건설업체와 중동 현지인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다. 한국의 건설 업체는 공기(工期)를 맞추는 데 만족하지 않고 늘 완공 일정을 단축해 명성을 쌓았다.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기업들
중동건설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대표적 기업이 현대건설이다. 현대는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다.
1976년에는 기술적으로 난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현대는 이런 공사에 필요한 초대형 철구조물을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대형 바지선에 실어 대양을 항해하여 현지로 보냈다.
동아건설, 리비아 수로 사업
당시 카다피는 민심을 얻기 위해 반대 세력이 많은 벵가지 지역에 최우선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1990년에 착공한 2단계(서부 지역) 공사는 자발하소나 취수장에서 트리폴리까지의 1,730km 송수관 단계 공사비만 102억 달러에 이르렀다.
대수로공사는 카다피가 아프리카의 식량난을 해결하겠다며 추진한 녹색혁명의 핵심이다.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것뿐 아니라 사막에 물을 대 농토로 바꾸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카다피는 대수로를 활용해 한반도 전체 면적의 8배에 이르는 176만㎢의 사막을 옥토로 만들겠다고 했고, 특별법까지 만들어 대수로 공사를 국가 최우선 사업으로 진행했다.
당시 리비아 내에서 ‘당장 국민들 먹을거리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며 극심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카다피는 “대수로는 농토를 늘려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며 밀어붙였다. 동아건설은 카다피의 목적대로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게 하였다.
리비아 대수로(영어:Great Manmade River Project,GMR)는 남부 사하라 사막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북부 지중해 해안에 있는 도시들을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로이다. 지름이 4m이고, 길이 7.5m, 총길이가 약 4,000km가 되는 거대한 송수관을 사막을 가로질러 지하에 매설해서 하루 650만t의 물을 북부 지중해 연안을 공급하는 공사이다.
중동건설시장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이 지역의 전쟁과 정정불안으로 침체기를 겪었다. 한국의 업체들은 동남아지역으로 진출을 모색하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각종 공사를 수주했다.
초기의 중동건설진출에는 한국의 건설근로자가 대거 참여했으나 90년대부터는 동남아와 서남아 지역의 근로자를 쓰고 있다. 수주내역도 초기의 단순건설에서 이제는 원자력발전소, 대형교량, 댐, 초고층빌딩, 지하철, 복합주택단지, 항만과 물류센터 등 기술적으로 고도화되고 규모도 대형화되고 있다.
그 실례로, 삼성건설은 세계 최고층 빌딩인 두바이의 부르즈할리파(높이 829m)를 시공했다.
현대건설은 세계최장 교량인 말레이지아의 페낭대교를 건설했다.
이러한 중동와 동남아의 건설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던 것이다.
국내경제 상황
당시 국내 상황은 오일쇼크로 인해 외환이 부족하고 인플레 등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중동 건설 붐으로 많은 건설 기능 인력이 중동으로 파견 되자, 고용 안정 효과 뿐만이 아니라 외화 획득으로 국민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해외 건설 시작, 태국부터
우리나라는 경제계획에 힘입어 현대건설이 1965년부터 태국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를 최초로 수주하면서 해외 건설 공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는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석유 수입 대금의 36%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한국 기업과 함께 한국 건설 노동자들도 중동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73년부터 증가한 중동 건설 노동자는 1982년 정점을 찍고 점차 감소하였다.
1973년부터 본격화된 중동인력진출은 급격히 확대되어 1975년에는 총 해외진출 인력의 30%가 중동 파견 인력이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 수치가 80% 선을 넘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는 원활한 기능 인력 파견을 위해 1976년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동경제협력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1978년에 노동청(현행 노동부)에 해외근로국을 신설하여 해외인력 수급의 합리적 조절, 해외현장 노사협조의 정착화, 해외취업 근로자 모집·송출 업무 개선, 근로자 사기 진작, 해외 취업 근로자 가족 지도 등의 시책을 펴나갔다.
이후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세계 경기침체로한국 해외 인력진출의 주된 대상이었던 중동 산유국들이 원유의 감산, 가격 하락 등의 이유로, 건설계획을 축소 내지 폐지하였고, 공사대금 지불 지연, 준공공사 인수 지체 등은 물론 자국의 실업증가를 이유로 하여 외국 근로자 유입을 제한하는 등, 중동으로의 인력 파견은 매우 어려운 위기를 맞이했다.
게다가 중동 및 동남아 및 중국의 저임금 근로자 진출이 늘어나고 국내 근로자의 임금이 급증하자 해외 취업에 대한 매력이 상실되어, 해외 파견 근로는 위기에 봉착했다. 이 외에도 귀국 근로자들이 풍토병으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해외 파견을 기피하는 풍조도 만연하였다.
역사적 의의
1973년 10월의 중동전 재발 이후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으로 제1차 석유파동을 겪은 한국에게 중동 건설 파견은 중동진출을 통해 석유파동의 충격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국내 원유 가격이 폭등하자, 해외건설용역수입으로 통화량이 증가하는 등 불황의 계기도 되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석유 파동
1973년의 1차 오일쇼크로 한국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원유가격이 한꺼번에 4배나 오르자 국내 물가는 두 배로 올랐다. 국제적 경기침체로 수출이 줄자 달러 유입은 줄고 해외에 지불해야 할 원유대금은 급증하면서 외환위기마저 겪게 되었다. 반면 산유국들은 고유가에 힘입어 오일머니가 쌓이게 되자 이 돈을 경제건설과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원유대금을 지급하기 위해 중동으로 빠져나간 달러를 건설시장에 진출하여 되찾아 오자는 역발상을 했다. 마침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고속도로공사 2,400만 달러 계약을 체결했다. 정부 정책은 적중했고,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중동건설시장에서 벌어드린 오일머니로 한국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80년대와 90년대 고도성장을 이룰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한국교회도 급성장을 하였다.
한국의 건설업체는 초기에는 공사전체를 맡은 해외유명회사의 하청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신용과 기술을 축적하면서 독자적으로 대형공사들을 맡게 되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한국건설업체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
한강의 기적
한인교회의 설립
중동에는 한인교회가 20교회 정도 된다. 대부분 중동진출을 계기로 중동에 진출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바레인 1개, 쿠웨이트 2개, 아랍에미리트(UAE) 11개, 카타르 1개, 오만 1개, 사우디아라비아에 3개 교회 등 이다.
카타르
카타르의 경우는 사우디와 같이 교회가 전혀 없었으나 2005년 5월 외국인들에게 종교 부지를 50년간 임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교회당 건축이 가능해졌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한인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한인공동체가 3개의 지역에서 예배를 드린다.
카타르 교회 성도 수는 약 250명으로 이곳 전체 교민의 10%를 차지한다. 중동 지역의 다른 한인교회처럼 NECK에서 예배를 드린다. NECK에서는 86개국 교회들이 365일 예배를 드릴 정도로 왕성한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이다.
중동건설은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이바의 알올라-카이비 사이의 164키로 도로공사를 수주(24억 달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중동선교는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건설업체가 진출하면서 중동선교는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동건설현장에 이미 기독교인이었던 한인들이 예배공동체를 형성함으로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기도모임은 중동 각 나라 각 건설현장으로 퍼져나갔고, 이슬람선교모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교운동은 점점 가속회 되어 교회와 선교단체를 창립하고 선교사가 파송되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아라비아 반도 국가의 공통 특징은 자국민에 대한 선교는 엄격히 금지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수많은 무슬림들이 복음을 찾고 있으며, 다양한 건설 현장을 찾은 외국계 그리스도인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
이러한 선교활동으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리야드에 3교회, 담맘에 1교회, 제다에 3교회들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은 자국인 교회나 교인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외국인 교회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두 국가 모두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엄격히 적용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우디인들이 비밀리에 성경을 읽고 예수를 발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복음화율은 5.4%에 이른다.
예멘은 7세기 이슬람교가 발생하기 전까지 기독교가 융성했던 곳이다. 3000년 전엔 시바 여왕이 예멘 왕국을 다스렸고 솔로몬에게 지혜를 구하기도 했다(왕상 10:1∼13). 예멘은 아라비아반도 중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0.08%. 극심한 테러 이전엔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도 많았다.
2004년과 2011년에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에 의해 특별관심국으로 지정된 사우디아라비아는, 헌법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거나 보호하지 않고 있다
쿠웨이트 한인교회 쿠웨이트한인교회는 1978년에 모이기 시작했다.
아랍에미레이트
1980년에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 한인교회가 창립되었다.
요르단 한인교회
요르단 열방 한인 교회는 14년 전 수도 암만에 설립됐다. 한인들 중에는 주재원이 대부분이다. 요르단은 전 국민의 95%가 무슬림이며 5%는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 현지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편이며 5개의 현지 개신교단도 존재할 정도로 기독교선교에 대해서 박해는 하지 않는다. 한인교회도 3개가 있다.
중동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중동건설 붐에 따라서 대부분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데 초기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정부가 경제적 차원에서 중동건설과 투자에 대한 일을 지속하는 한, 중동선교는 계속 될 것이다.
오일쇼크는 미션쇼크로
중동은 여전히 기독교의 잔재가 역사적으로 계속되었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슬람지역에도 복음의 씨앗을 내리기 때문에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동건설이라는 붐을 타고 중동에 하나씩 한인교회들이 뿌리를 내려 중동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일쇼크는 우리에게는 중동에 교회를 세워 선교할 수 있는 좋은 계가 되었다. 오일쇼크는 미션쇼크로 이어졌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중동근로자들을 통하여 약 100억 달러 이상 공사를 함으로 피와 땀으로 형성된 나라이다. 최근 화물연대와 민노총 파업으로 인해 경제적 손실이 2조 4060억이 발생했다. 주사파가 한 가운에 있을 때, 국가가 해체되는 것은 하루 아침이다. 한국사회가 먹고 살만하니 파업으로 인한 해체 작업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말고 각교회마다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교단이나 연합단체는 성명서라도 발표해야 할 것이다. 70-80년대 한국의 중동노동자들이 피담흘려 벌어들인 돈들이 하루 아침에 날라가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뉴스와논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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