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후 가난과 빈곤에 시달렸던 1960년대 한국은 4.19 학생운동, 5.18 군사혁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아프리카와 맞먹는 최하의 빈국이었다.
4 19
5.16
북한보다 못한 삶이 었다. 당시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1950년대 미국 원조가 끝난 데다 가뭄과 흉년이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초근목피를 끼니로 연명해야 했다.
1960년 한국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9년 실업자는 229만 명, 1960년에는 노동인구의 23.7%에 달하는 213만명이 실업자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부. 간호사를 서독으로 보낸 1960년 대 한국의 경제지표는 1인단 GNP 87 달러, 한국은행 외회보유잔고, 2,300만달러, 연간물가상승률 42%, 민간저축률 3%의 열악한 경제상태였다.
박정희정권의 입장
이런 와중에 박정희정권은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입증이라도 해야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즉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정당화시켜줄 토대를 마련해야 했다.
박정희대통령은 1961년 11월 방미해서 케네디대통령에게 경제원조 요청을 하였는데 미국무부 산하 국제개별처장은 7.1%의 경제개발계획을 문제삼으면서 "이들 공장을 지으려면 약 20억 달러가 필요한데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누가 투자하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미국은 경제성장률의 지표를 5%까지 낮추라고 권고하기 까지 했다.
미국은 불안한 경제성장보다 안정된 성장을 원했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에 협조를 하지 않았다. 군사정부인 것도 한 몫을 했다.
박정희와 케네디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권을 잡자마자, 재정을 확충하기 위하여 1962년 화폐개혁부터 시작하여 부정축재 환수, 한국은행의 정부 기구화를 비롯 은행국유화, 금리현실화를 추구하였으니 재정을 끌어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원조는 1950년대 말부터 급속히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외자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무상원조하던 것을 유상원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에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외자확보를 위하여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 브라질 이민선 출발, 선원수출과 원양어업 개척, 울산공장에 대한 걸프의 투자와 같은 외자유치, 환율현실화외 외자도입법 개정, GATT가입, 한일국교정상회추진, 베트남 파병 등으로 외화를 벌기 시작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정부는 10억 달러에 달하는 수입과 35억 달러가 넘는 차관을 들일 수가 있었다.
청룡부대
서독의 경제적 상황
미국이 1차 경제개발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미국대신 독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박정희와 에르하르트
다행히 독일은 동서독이 분리되어 있어 남한정부에 대한 동변상린의 정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군사정부 이전, 장면정부부터 1961.3.18. 한. 독 기술원조협정이 체결되었고, 대한석유공사에 5백만 달러(6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주는 형식으로 시설 용량 10만 키로와트의 화력발전소를 영월에 건설한다는 계획이 성사되었다.
1961년 12.13. 독일은 한국에 경제협력및 기술협력에 관한 의정서를 맺고, 7천500만 마르크(1천 9백만 달러)의 재정차관을 제공했다. 1964년 방독이전까지 서독으로부터 차관 도입 확정액은 2천 382만 8천 마르크(5억 95만 7천달러)에 달했다.
서독은 전후 1940대 말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시작하였다. 마셜플랜은 1947년말 서독의 경제재건을 도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에 행한 대외원조계획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RecoveryProgram,ERP)이지만,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마셜(G.C.Marshall)이 처음으로 공식 제안하였기에 ‘마셜 플랜’이라고 한다.
마셜플랜 발표
1947년 6월 5일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 참가한 마셜(Marshall) 국무장관은 연설을 통해 “시장 경제 체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이 그들의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집행하는 계획에 대하여 미국은 대규모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며 대규모의 유럽 경제원조 계획을 밝혔다. 이러한 마셜플랜 계획하에 독일의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광업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철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으나 노동력이 절대 부족했다. 독일 사람들이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독일의 광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많은 독일인 노동자들이 광산을 떠났다.
서독 광산업계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면서 1962년 기업별로 인력 유치 의사를 밝히며 서독 정부를 압박하고 1963년 5월에 공식적으로 서독 노동부 차원의 유치 의사가 전달되면서 1963년 12월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한․독 정부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독일은 저임금의 광산노동자가 필요했고 정치적으로 동독의 노동력을 유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독의 광산업자들은 개발원조의 명분으로 값싼 한국의 광부들을 모집하였다.
1963년 12월 21일 김포공항 출국 대기실. 이곳에는 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독일 광부 모집에 합격해 뒤셀도르프 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파독(派獨) 광부 1진 123명의 설렘이 가득했다. 대부분 고졸이상 대졸생들이 선택되었다. 그들은 엄격한 심사와 체력훈련을 통하여 선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지에 가서 마주친 것은 40도가 넘는 지열(地熱)과 날카로운 톱니를 가진 기계들이 있는 지하 1000m의 막장. 광부들은 이곳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글뤽 아우프”라며 서로 인사했다. 영어로는 ‘럭 업(Luck Up)’, ‘무사히 살아나와 지상에서 다시 만나자’란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