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독일편)

편집인 | 입력 : 2022/08/18 [07:32] | 조회수: 362

 한국의 상황

 

6.25 이후 가난과 빈곤에 시달렸던 1960년대 한국은 4.19 학생운동, 5.18 군사혁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아프리카와 맞먹는 최하의 빈국이었다.

 

 

  4 19


  

  5.16

 

북한보다 못한 삶이 었다. 당시 국민소득 80달러로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였다. 1950년대 미국 원조가 끝난 데다 가뭄과 흉년이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초근목피를 끼니로 연명해야 했다. 

 

 

  

 

 

1960년 한국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9년 실업자는 229만 명, 1960년에는 노동인구의 23.7%에 달하는 213만명이 실업자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부. 간호사를 서독으로 보낸 1960년 대 한국의 경제지표는 1인단 GNP 87 달러, 한국은행 외회보유잔고, 2,300만달러, 연간물가상승률 42%, 민간저축률 3%의 열악한 경제상태였다. 

 

박정희정권의 입장

 

이런 와중에 박정희정권은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입증이라도 해야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즉 정권의 태생적 한계를 정당화시켜줄 토대를 마련해야 했다.

  

  

 

박정희대통령은 1961년 11월 방미해서 케네디대통령에게 경제원조 요청을 하였는데 미국무부 산하 국제개별처장은 7.1%의 경제개발계획을 문제삼으면서 "이들 공장을 지으려면 약 20억 달러가 필요한데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누가 투자하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미국은 경제성장률의 지표를 5%까지 낮추라고 권고하기 까지 했다. 

 

미국은 불안한 경제성장보다 안정된 성장을 원했기 때문이다.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에 협조를 하지 않았다. 군사정부인 것도 한 몫을 했다.

 

 

  박정희와 케네디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권을 잡자마자, 재정을 확충하기 위하여 1962년 화폐개혁부터 시작하여 부정축재 환수, 한국은행의 정부 기구화를 비롯 은행국유화, 금리현실화를 추구하였으니 재정을 끌어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원조는 1950년대 말부터 급속히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외자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무상원조하던 것을 유상원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에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외자확보를 위하여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 브라질 이민선 출발, 선원수출과 원양어업 개척, 울산공장에 대한 걸프의 투자와 같은 외자유치, 환율현실화외 외자도입법 개정, GATT가입, 한일국교정상회추진, 베트남 파병 등으로 외화를 벌기 시작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정부는 10억 달러에 달하는 수입과 35억 달러가 넘는 차관을 들일 수가 있었다. 

 

 

  청룡부대


 서독의 경제적 상황 

 

미국이 1차 경제개발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미국대신 독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박정희와 에르하르트

 

다행히 독일은 동서독이 분리되어 있어 남한정부에 대한 동변상린의 정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군사정부 이전, 장면정부부터 1961.3.18. 한. 독 기술원조협정이 체결되었고, 대한석유공사에 5백만 달러(6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주는 형식으로 시설 용량 10만 키로와트의 화력발전소를 영월에 건설한다는 계획이 성사되었다.

 

1961년 12.13. 독일은 한국에 경제협력및 기술협력에 관한 의정서를 맺고, 7천500만 마르크(1천 9백만 달러)의 재정차관을 제공했다. 1964년 방독이전까지 서독으로부터 차관 도입 확정액은 2천 382만 8천 마르크(5억 95만 7천달러)에 달했다.     

 

서독은 전후 1940대 말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시작하였다. 마셜플랜은 1947년말 서독의 경제재건을 도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에 행한 대외원조계획이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지만,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마셜(G. C. Marshall)이 처음으로 공식 제안하였기에 ‘마셜 플랜’이라고 한다.

 

 

  마셜플랜 발표


1947년 6월 5일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 참가한 마셜(Marshall) 국무장관은 연설을 통해 “시장 경제 체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이 그들의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집행하는 계획에 대하여 미국은 대규모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며 대규모의 유럽 경제원조 계획을 밝혔다. 이러한 마셜플랜 계획하에 독일의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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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국전쟁으로 독일의 경제가 더욱 발전을 했다. 막대한 무기를 팔아먹은 것이다. 그런 결과 1960년대의 서독의 수출은 1950년대에 대비할 때 4.5배 증가했다.  

 

서독이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용도 6%에서 10%로 성장하였다. 독일의 경제호황은 1966-1967년 일시 충당하기는 했으나 석유파동이 일어나기 직전 1973년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 서독의 수준은 미국의 수준에 근접했다. 1950년과 1960년 사이 서독의 자동차 산업은 5배 증가했고, 실업자도 거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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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거의 완전고용 수준에 달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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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조하에 경제성장률은 1960년대에도 지속했고, 1944년는 4%대의 경제성장률이 1968년에는 7.3%대로 성장했다.

  

1966년 3.5%의 인플레도 1.5%로 낮아졌다. 재정부분에서도 막대한 누적 채무를 상환하고서도 1969년에는 15억 마르크의 재정흑자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9년까지 농업 부문 종사자가 20%에 달했으나 1970년도에는 10%로 줄었다.  

 

그 결과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튀니지, 터키, 포르투갈, 유고, 한국 등에서 약 약 2백 40만명의 단기 방문, 혹은 손님 노동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에게 되었다.

 

특히 부족한 간호인력을 조달하기 위해 한국이외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취업내지 교육을 권고 하였을 정도로 노동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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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광업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철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으나 노동력이 절대 부족했다. 독일 사람들이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독일의 광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많은 독일인 노동자들이 광산을 떠났다.

 

서독 광산업계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면서 1962년 기업별로 인력 유치 의사를 밝히며 서독 정부를 압박하고 1963년 5월에 공식적으로 서독 노동부 차원의 유치 의사가 전달되면서 1963년 12월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한․독 정부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독일은 저임금의 광산노동자가 필요했고 정치적으로 동독의 노동력을 유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독의 광산업자들은 개발원조의 명분으로 값싼 한국의 광부들을 모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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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21일 김포공항 출국 대기실. 이곳에는 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독일 광부 모집에 합격해 뒤셀도르프 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파독(派獨) 광부 1진 123명의 설렘이 가득했다. 대부분 고졸이상 대졸생들이 선택되었다. 그들은 엄격한 심사와 체력훈련을 통하여 선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지에 가서 마주친 것은 40도가 넘는 지열(地熱)과 날카로운 톱니를 가진 기계들이 있는 지하 1000m의 막장. 광부들은 이곳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글뤽 아우프”라며 서로 인사했다. 영어로는 ‘럭 업(Luck Up)’, ‘무사히 살아나와 지상에서 다시 만나자’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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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독일의 정치적 환경

 

한국과 서독의 정치적 환경은 냉전이 잉태한 반공의 연대와 선진공업 국가의 이익이 단합한 자본주의의 연대였다. 

 

독일 총리 에르하르트는 소련이 경제 후진국에 지원하는 것에 경각심을 갖고 동남아시아와 극동 지방에서의 공조를 통해 반공적인 연대를 만드는에 관심이 많았다. 즉 정치적인 면에 따라 한국의 원조를 선택했고, 자본주의 면에 따라 한국의 노동력을 수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탄광의 노동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고, 남부및 동부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일부지역, 그리고  일본, 한국의 단기방문 노동자 제도로 노동력을 유입하고자 했다.

 

쉽게 말해서 한국은 전후복구를 위해서 경제개발이라는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고 군사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국의 기술력과 자본이 필요했고, 외화유치를 위해 해외로의 노동력 수출을 원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복구딘 후, 고도의 경제발전하에서 산업노동력 부족을 해외 노동자의 유입으로 해결하려고 했었던 독일의 상황이 부합된 것이었다.

 

1963년 광부들 123명 출국, 3년후 간호사들 출국

 

이러한 협력관계에서 1963년 12월 16일 '한국 광부의 독일 광산 임시 취업계획' 협정체결이 이루어지고, 1963년 12월 21일 제1진 123명이 출국했다. 3년후 간호사들이 떠났다.

 

 

광부들은 1963-1966년까지 2,521명이 출국했고, 1970-1977년까지 5,415명이 출국했다. 모두 7,936명이 출국했다.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파독 광부․간호사의 규모는 광부의 경우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요원의 경우 1960년부터 1976년까지 총 11,057명이었다.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01,530천 달러로, 1965~1967년의 송금액의 경우 총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였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간호학생을 비롯한 기술교육생과 간호사들이 3년 후 1966년에 독일로 향했다. 그들은 돈벌이를 이해 눈물을 흘리며 고국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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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성실성과 부지런함으로 독일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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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에 파송된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위안하기 위하여 독일을 방문하기도 했다.  육영수여사는 그들의 고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처럼 1960-1970년대까지는 가난과 배고픔을 위하여 막장인생까지 살아야 하는 시대였다. 간호사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덩치큰 노인 목욕시키기, 대변치우기 등 현재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족들이 와서 하는 후미진 일들이 주업무였다.  

 

광부들은 1000 미터 밑, 40도 고열이 넘는 곳에서 막장 생활을 해야 했고, 간호사들은 바닥 생활을 해야 했다. 국가가 미약하거나 힘이 없을 때 민중들은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이 우리의 한민족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의례였다. 

 

그래도 약 15대 1 정도의 경쟁력이 있었던 것은 한국보다 약 4배 이상되는 월급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막장인생과 바닥인생을 위한 직업을 구하는데도 15대 1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삶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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