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국민동요 중에 [자전거]가 있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고흥읍교회 목치순목사의 아들, 목일신씨가 교회에 다니면서 신학문의 영향을 받아 400여곡이나 동요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 중의 한 곡이다
부천에 가면 목일순의 [자전가]시가 쓰여진 비석이 있을 정도로 [자전거]는 국민동요가 되었다.
권태호는 국민동요 “나리나리 개나리 잎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뗴 종종종 봄 나들이 갑니다”를 작곡(작사 윤석중)한 사람이다.
이 노래는 1930년 발표됐고 그때부터 86년을 한결같이 불려오고 있다.
호남의 목일신, 영남의 권태호는 모두 교회에서 서양음악을 배워 근대 국민동요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 한 사람들이다. 목일신이 고흥읍교회 출신이라면 권태호는 안동교회 출신이었다. 목일신이 아동문학가였다면 권태호(1903-1972)는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다.
소천 권태호는 1903년 9월 16일 안동군 법석골에서 출생하였으며 1972년 2월 29일 안동시 예안면 선양동에서 별세하였다. 1920년대에 유명한 성악가로서 현제명, 홍난파, 안익태와 교제하면서 국내.외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한 민족음악가였다.
홍난파는 친일음악가로서 알려졌지만 권태호는 끝까지 민족음악가였다.
권태호에게 풍금을 가르친 선교사 부인은 두 분이 있었다. 한 분은 Crothers 목사 부인 Mary Ellen Bryan(한국명 권애라, 1878∼1966)또 한 분은 Winn 목사 부인 Jessie Catherine Lewis(1883∼1953)이다.
권태호는 두 분의 선교사 부인으로부터 청년기를 거쳐 1923년 20살이 되던 해까지 안동읍 예배당(현 안동교회)에서 보다 탄탄한 음악 교육을 받는데, 1922년 피아노 전공자인 권애라 사모가 피아노를 들여오면서 소천 선생의 음악적 세계는 한층 무르익게 된다.
이윽고 권태호는 성가대의 지휘는 물론 교회의 반주자가 되어 기량을 펼치게 되는데, 찬송가의 4부 악보를 모두 외워 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청년시기에는 안동예배당에서 찬송가집 172장 전곡을 연주하고 찬양대 지휘와 독창까지 하여 일찌기 음악에 대한 발군의 실력을 나타낸다. 안동에는 민족시인 이육사가 있다면 민족 음악가 권태호도 있었다. 이들은 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교회를 통하여 서구의 신학문을 접하면서 민족 시인, 민족 음악가로 거듭나게 된다.
민족 음악가가 되기위해 권태호는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1927년 일본음악학교 성악과 테너 전공에 입학하였다.
일본음악학교 재학 중이던 1928년 잠시 귀국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구에서 독창회를 열기도 하였고, YMCA회관에서 가진 독창회에서는 처음으로 프란츠 슈베르트 등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가곡을 소개하는 한편, 서양음악에 눈을 뜨게 하였다. 동아일보 1928.7. 8자는 권태호의 독창을 알리기도 했다.
그는 성악 뿐만아니라 천재적인 작곡가 실력으로 봄나들이, 눈·꽃·새 등 동요도 작곡하였다. 일본에서는 천재적인 성악가였고 한국에서는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1930년 일본음악학교 졸업 후 도쿄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성공한 이래 일본 각지에서 독창회를 가졌을 정도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천재 성악가로서 각인되었다.
서울에는 현제명, 평양에는 권태호
그 후 귀국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음악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31년 광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교편을 잡았다. 또한 경성방송국에서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하였고, 평양음악협회 설립을 주도하는 한편, 평양음악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서울에 현제명이 있었다면 평양에는 권태호가 있다고 할 정도로 권태호는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1939년 모교인 일본음악학교에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말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변절하지 않았다.
1944년 귀국하여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해방 후에는 부유한 일본인 상인의 별장을 인수하여 경주예술학교와 대구음악학원을 세우고 《국민가요집》을 펴내는 등 활동을 이어 나갔다.
6.25 전쟁 때에는 '승리의 노래' 등 군가를 작곡하였고, 이후 합창단을 조직하여 국민개창운동에 힘썼다.
1966년 상경하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상도동(현 동작구 상도동)에 체류하다가 1969년에는 고향 안동군으로 내려가 예안면 낙동강변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1972년 2월 29일 그곳에서 지병인 중풍으로 별세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독창회를 처음 개최했던 인물이면서 또한 군가, 교가, 가곡, 동요 등을 작곡하며 국민개창운동을 펼치는 등 우리나라의 음악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민족음악가로서 베를린 올임픽의 영웅인 손기정과 남승룡을 찬양하기 위해 '기정과 승용이 너를 보내고'(서환석 작사)를 작곡하여 유치장에까지 들어가기도 하였다.
'기정과 승용이 너를 보내고'는 1936년 일제치하 베를린 올림픽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았던 선수들을 위로하는 노래였다. 삼엄한 시대였지만 선생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작곡하고 성악을 해도 항시 나라에 대한 애국심, 민족에 대한 정신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하였다. 그야말로 유학의 정신에 서구의 음악을 담은 민족 음악가였던 것이다.
평양에서 도쿄까지 선생은 국내외를 넘나드는 왕성한 활동으로 비정기적인 독창회와 합창단 조직을 통한 활동은 물론 음악 교육에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에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많은 애를 쏟기도 하였다.
그 제자 중의 한 명이 얄개시대로 유명한 조흔파(1918-1981)선생이었다. 고개얄개는 조흔파 선생의 원작을 영화화하였다.
그가 소천하자, 그의 자부인 청마 유치환의 셋째딸 유자연이 시아버지인 소천 선생을 모시고 안동에 내려와 '권태호음악연구소'를 열게 되었다.
이처럼 유교의 마을 안동에서 권태호가 교회를 만났을 때 천재적인 음악가를 탄생시켰다. 교회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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