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문경)

교회야 말로 진정한 문경새재

편집인 | 입력 : 2022/05/28 [05:29] | 조회수: 359

 

 

 

 

 

 

 

문경시는 경상북도 북서부에 있는 도시로 우리나라의 동남부, 경상북도의 서북단 내륙에 자리잡은 중산간지역으로서 동쪽으로는 예천군과 남쪽으로는 상주시, 서쪽으로는 충청북도 괴산군, 북쪽으로는 충청북도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충청도와 가장 접근해 있는 지역이다. 

 

문경의 역사

 

신라시대에 고령군(古寧郡, 상주시 함창읍) 소속 영현으로 관산현, 호계현, 가선현, 가유현, 안인현이 있었다. 고려시대는 모두 상주목의 속군이었다. 이 당시에는 문경이 상주(사벌주)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문경 지역 사람이던 견훤과 아자개가 상주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경현이었다가 1895년 안동부 문경군이 되었다. 1896년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되어 경상북도 문경군이 되었다. 1914년에 용궁군의 서면, 함창읍의 동면 일부를 문경군에 편입시켰다. 1986년에 점촌시와 문경군이 연합하여 1995년에는 문경시로 되었다.

 

 

 

 

문경새재

 

문경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은 문경새재이다. 문경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재로서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문경새재 제1관문(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새재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자로 풀면 조령(鳥嶺)이다. 제3관문, 즉 조령관이 위치한 곳의 해발 고도가 642m인 만큼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서울남부를 지키고 서 있는 관악산의 정상고도가 629m이니, 조령의 그 위치도 높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제3관문 조령관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에 과거를보러 가기 위해 고개를 넘었고, 보부상들은 장시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고, 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넘었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담아낸 공간이었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과거를 보러 나서는 경북 영주나 강원도 삼척의 선비들은 가까운 죽령을 넘지 않았다. 경북 김천이나 성주 등지의 선비들도 추풍령을 넘지 않았다. 죽령은 '주욱 미끄러진다'라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기피 대상이었다.

 

대신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문경'이기에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필수코스처럼 밟고 지나갔다. 심지어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까지 문경새재를 넘으며 합격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으뜸 고갯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다. 하지만 그 길에 선 발자국들이 모두 다 좋은 걸음은 아니었다.

 

견훤의 탄생지, 문경

 

후삼국시대는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우자, 이 곳은 후백제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나 고구려의 남하로 세력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왕건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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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는 900년 완산주에서 견훤이 세운 나라로 후삼국의 하나였다. 견훤은 문경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서남해의 방수군으로 파견되어 전공을 세우고 비장(裨將)이 되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상주출신이라기 보다는 문경출신이다.

 

견훤은 867년에 상주의 농부였던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 지역 금하굴은  견훤 설화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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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설화>는 뱀으로 변해 찾아온 남자와 관계를 맺은 처녀가 비범한 아이를 낳았다는 내용의 야래자형설화()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광주(光州) 북촌에 사는 부자집 딸이 부친에게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교혼(交婚)하고 간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친이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으라고 하자 딸이 그 말대로 하였다. 날이 밝은 뒤 실을 따라 갔더니 큰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다음날 실을 따라가보니 금하굴로 이어져 있고 굴속에는 커다란 지렁이가 몸에 실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그 후로 태기가 있어 사내를 낳으니 이가 곧 후백제 시조 견훤이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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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굴속에서 금빛이 번쩍이고 풍악소리가 들려 금하굴이라 불린다.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소문듣고 찾아왔는데 이 마을 부호가인 심정자가 손님 대접하는게 너무 힘들어서 금하굴을 묻어 버렸다고 한다. 그후로는 풍악소리도 끊어지고 심장자 집도 망했다는 이야기가 들려 해방 후 다시 굴을 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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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경시는 후백제 초대왕 견훤을 스토리텔링화하고 역사유적지 개발 사업을 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문경 일대 가은읍 갈전리에 견훤왕 탄생 설화가 깃든 금하굴, 생가터(추정)가, 농암면 연천리에는 견훤왕과 군마(軍馬) 설화가 있는 말바위 등 관련 유적이 산재해 있다.

 

전투와 관련된 가은읍 견훤산성 가은성 희양산성, 산양면 근품산성 등이 있다. 견훤산성은 문장대가 있는 속리산 해발 540 미터에 약 600여 미터의 돌성곽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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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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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는 지역에 산재한 견훤의 유적지를 정비하고, 역사를 재조명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전라도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을 동서화합의 아이콘으로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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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는 상주가 아니라 문경이다. 그래서 문경시는 견훤을 문경의 인물로서 특성화하기로 했다.

 

견훤은 신라가 국정이 문란하여 각지에 도둑이 창궐할 때 질서를 바로잡고자, 기회를 포착하여 군사를 일으켜 호남의 무진주(光州)에 쳐들어가 이를 점령하였다(889년). 수도를 세운 전주에서는 후백제견훤이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동고산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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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892년에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견훤은 건국하면서 중국의 오(吳)·월(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고, 왕건이 세운 고려와도 여러 차례 싸웠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견훤은 배다른 아들들이 많아 이들이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면서 견훤이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던 금강이라는 네째아들을 죽이고, 배다른 아들인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마침내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936년에 멸망하였다. 논산에 가면 견훤의 왕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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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암서원의 한음 이덕형

 

문경에 가면 근암서원이 있다. 1544년(중종 39)에는  근암서당으로 창건되었다. 여기에는 지방 유림인 홍언충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 있다.

 

이후 1693년 김홍민과 홍여하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669년(현종 10)에 근암서원으로 승격이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인물은 한음 이덕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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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1561∼1613)은 오성 이항복(1556~1618)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영의정을 지냈던 명신으로서 문경의 근암서원에 위폐 되어있다. 더군다나 이 두사람은 당쟁에 얽매이지 않고 소신을 지킨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능력과 경력도 뛰어났지만, 소신을 지켰고 모두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막역한 친구였다. 이항복이 다섯 살 위여서 지금으로 보면 선후배 사이에 가깝지만, 10대 후반부터 그들은 나이를 잊고 사귀었다. 그 우정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덕형은 왜란을 극복하고 당쟁을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덕형은 불과 37세의 나이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1598년(선조 31) 4월 우의정, 같은 해 10월 좌의정) 4년 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1602년). 41세의 영의정은 조선 역사 전체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그는 오성과 한음의 예화에서도 보듯이 이항복 못지않게 명민한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이덕형이 세운 주요한 공로는 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왜란 발발 직후 그는 명에 청원사(使)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1593) 1월 이덕형은 이여송의 명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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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당쟁은 격화되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광해군을 지지한 북인(北人)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무리수에 가까운 이런 조처는 당연히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신하들은 당파에 따라 찬반의 양론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는 북인과 대척점에 서있는 남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즉위에 공을 세웠고, 임란이 발생하자, 속히 세자책봉을 완수하여 조정의 안정을 주장하였다. 그런데다가 임란이 발생할 당시 명에 건너가 명의 도움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오성과 한음의 예화에서 보듯이 영특한 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특한 신하라 할지라도 당쟁의 여파 속에서 이항복과 함께 살아남지 못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자 그는 이항복과 함께 강력히 반대했고, 탄핵을 받자 즉시 용진(, 지금의 양평군)으로 낙향했다.

 

그때 이항복도 같은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망우리에 동강정사()를 짓고 지냈다. 1613년 9월에는  죄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 명부에서 지워버리는 삭탈관직 사건이 발생하여 10월에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한음 이덕형은 30대의 나이에 재상에 올라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하는 화려한 경력을 성취했다. 당시의 사가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전 영의정 이덕형이 세상을 떠났다. …… 이덕형은 일찍부터 재상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과 대등했지만, 관직은 이덕형이 가장 앞서 38세에 이미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왜란 이후 두드러진 공로를 많이 세워 중국과 일본 사람 모두 그의 명성에 복종했다. 사람됨이 솔직하고 까다롭지 않았으며 부드러우면서도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다. ……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 했다(1613년(광해군 5) 10월 9일).

 

문경에 한음 이덕형의 위폐가 있다는 것은 이덕형의 소신과 절개의 정신을 추구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이덕형의 소신은 독립운동으로 무장한 문경출신 박열에게 항일정신으로 이어진다.  

 

무정부주의자 박열

 

일본에서 애국운동을 했던 박열은 1902년 문경시 모전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문경에서 태어났지만  머리가 비상하여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까지 가서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이다. 문경은 이처럼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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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1910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지만 일제의 강한 탄압에 더 이상 국내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한양이 아니라 문경새재를 넘어 동경으로 진출한다. 그는 일본에서 신문 배달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다양한 서적을 탐독하며 여러 사상가들의 사조를 공부했다.

 

그가 주목했던 사상은 바로 무정부주의(아나키즘)였니다. 아나키즘을 접하면서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등과 절대 자유에 집중했다. 그는 18세의 나이로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박열이 참여했던 단체는 흑도회뿐 아니라 의혈단, 조선 고학생 동우회, 흑우회, 불령사 등이 있었다.

 

일본 생활을 하면서 박열은 이론의 한계를 체감했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목표로 폭탄 테러를 준비하게 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군은 희생양을 찾기 위해 한국인들을 약 6,000 여명 살해를 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이 지진의 혼란을 틈타 폭행, 약탈, 방화, 집단 습격, 여성 능욕 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에 선동된 일본 민중은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박열이 항일 운동을 꾀하던 시기의 일본은 혹독하고 잔인함 그 자체였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와 요코하마 등 관동지방 일대를 강타한 규모 7.9의 대지진으로 10만5천명 이상(행방불명자 포함)이 사망했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조작되고 일본 사회의 내부 불만이 조선인에게 향하면서 도쿄, 지바(千葉)현, 가나가와(神奈川) 등 관동 일대에서 재일동포가 일본군과 경찰, 자경단 등에 의해 대량 학살됐다.

 

 '쇠갈쿠리(쇠갈퀴)로 개잡듯이 학살', '죽창으로 복부를 찔렀음', '곡갱이(곡괭이)로 학살' 등 일본의 관동(關東·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참혹성이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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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이들까지 길거리에서 군인, 경찰, 자경단으로 역할을 나눠 꼬챙이 같은 막대기를 들고 조선인 역할을 맡은 아이를 찔러 죽이는 시늉의 '자경단 놀이'를 하고 있는 삽화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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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열도 관동대지진의 피해자 였다. 그러나 그는 철두철미 독립투사로서 해방될 때까지 사형선고라는 어려운 고비를 넘어서면서까지 무정부주의자로서 항일정신과 민족정신을 한 시도 잊지 않고 법정투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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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온 몸을 바쳐온 독립운동의 일꾼으로서 한 병졸로서 일한다.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 것을 지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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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때 이승만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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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다. 일본내각은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면서 무정부운동을 벌였던 박열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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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열은 일본의 계략을 눈치채고, 자신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적 재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정부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하여 여론화하였던 것이다. 그의 폭탄투척 목적과 이유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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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옆에는 그의 여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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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성인 가네코는 책 편집을 하다가 어느날 박열이 쓴 '개새끼'라는 시에 반하여 서로 동거하면서 사랑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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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개새끼'라는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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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의 시 《개새끼》는 개처럼 힘이 없어도 끝까지 짖어댄다는 것이다. 즉 강력한 약자의 저항을 말하는 것이다. 개새끼처럼 비천한 자이지만 강자에게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힘있는 자가 자신에게 소변을 누어도 자신 역시 비천한 개와 같은 자이지만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박열의 시와 정신에 반한 가네코는 박열과 함께 구속되어 사형판결을 받지만 끝까지 변하지 않고 박열의 입장에 서고 사형판결을 받을 때 한복을 입고 오히려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박열과 가네코는 일본의 천황제도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자였다. 

 

 

 

가네코는 옥중수기에서 "저는 일본인이기는 하지만 일본인이 매우 증오스러워 화기 치밀곤 합니다. 그 때 그저 눈에 비쳤을 사건들이 지금은 크나큰 방향의 뿌리가 되어 제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에서 사는 동안 보고 들은 것 때문에 저는 일본제국주의를 향한 조선인들의 모은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경으로 오자마자 많은 조선이 사회주의자 혹은 민족 운동가와 벗이 됐습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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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복을 입고 재판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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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심판사 다테마스가이세이는  박열 부부가 실제로 폭탄테러를 계획한 적도 없고 그저 관심을 받으려고 허위자백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상층부에서는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에 맞추어 기소하라고 요구하면서 판사까지 정의관의 갈등을 겪는다.

 

결국 내무재신 미즈노가 (그리고 박열도) 바라는 대로 박열을 대역죄로 기소하지만 판사는 끝까지 박열이 진짜 대역죄인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대심판결에서는 이들 모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예심판결을 받으면서 가네코는 다정하게 박열의 무릎위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이 한 장의 사진으로 죄인을 우대한다며 들고 일어나자, 내각이 총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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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실에 아랑곳 하지않고 감형장을 발기발기 찟어버리고 일본정부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결을 선택한다. 

 

그녀는 남편 박열과 함께 일왕 부자 폭살을 목적으로 폭탄 반입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옥살이하던 중 1926년 옥중에서 23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92년 만에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는 2019년 11월 일본 국적의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여사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그의 무덤은 문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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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명의 국가유공자인 일본인이 있다. 그는 당시 변호를 맡았던 후세다츠지이다. 후세다츠지는 약자들의 변호를 맡아 무죄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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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의 신들러’라고도 불린다. 그는 원래 검사였으나 법 제도의 한계를 체감 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인권 변호사가 되었고 한국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변호했으며 그가 변호했던 사건 중 박열과 후미코의 일본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결혼식을 추진할 수 있었다.


후세 다츠지는 박열이외에 일제 치하에 체포된 조선인들을 변호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발생한 대학살 사건을 두고 일본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는 사죄문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보내기도 했다.

 

2004년, 후세 다츠지는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기도 한다. 노무현정부는 핍박받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하여 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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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열은 22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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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7월 2일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를 위해 400여 명의 납북/월북 인사, 300여 평양 시내 각 기관 및 업소 인사들이 모였다.

 

납북자중에 조소앙과 안재홍, 박열이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협의회가 민족세력으로 독자적 존재를 영위하고 민족진영의 목소리를 내어 평화 통일로 나아가자고 했다.

 

당시 납북자들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헌신했고 상무위원과 최고위원, 회장으로 활동하다 여생을 마감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남북한 자유왕래와 교류, 총선거 실시와 통일헌법 제정 등 5단계에 이르는 민주적 통일 방안을 제안했다.

 

비운의 민족운동가 박열은 일본과 북한에서 애국운동과 민족 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74년 1월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97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고 이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

 

청운각과 박정희대통령

 

문경에 가면 박정희 대통령이 묵었던 청운각이라는 하숙집이 있다. 그가 문경새재를 넘어 혁명을 하기위해 한양으로 가기 전 문경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혁명을 통하여 한반도의 경제혁명을 추구하고자 했다. 나름대로 경사스런 소리가 들려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정치적으로는 불운했지만 그는 한반도에 경제개혁 5개년과 새마을 운동을 통하여 경제의 경사스런 소리를 들려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초등학교에서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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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초등학교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는 1966년 문경초등학교에 문희관이라는 이름의 강당을 하사하였으며, 1979년에는 문정관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을 준공하여 하사하였다.

 

문희관은 문경초등학교의 문자와 박정희의 희자를 딴 것이고, 문정관은 문경과 박정희의 정자를 따서 이름 붙인 것이다. 박대통령은 문경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청운각에 세들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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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방 우측에는 문경시민교회가 우뚝 서 있다.박정희 대통령 옆에는 항시 교회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는 구미 상모교회에 다녔다. 교회만이 진정한 경사스런 소리를 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마을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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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교회들

 

문경시민교회

 

문경은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과거에 합격하는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 것이 목표였다. 한양으로 가는 첫번째 관문으로서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 고개인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나 진정한 문경새재는 교회였다. 교회를 통해서만이 하늘이 경사스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문경에 세워진 100년 이상된 교회를 통하여 문경은 하늘의 기쁜 소식을 듣는 계기가 되었다.

 

문경시민교회는 미래의 박정희를 통하여 경제의 경사스런 소식이 들려질 것을 예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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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교회 

 

1903년 설립된 동성교회는 문경지역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로 여느 교회들과는 달리 문경에 항일운동과 사회봉사를 통하여 경사스런 소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교회는 선교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전형적인 ‘자립·자치·자전’이 이뤄지는 교회이다. 1903년에는 노목교회로 설립되었지만 1975년에 동성교회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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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설립자는 전승달 성도였고,  일본경찰은 전승달 성도를 연행해갔다. 교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1908-1912년 까지 4년 동안 문을 닫았으며, 1912년에 문을 다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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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의 순교의 정신은  지역 주민을 위하여 공부방과 마을문고를 운영하여 봉사를 하면서 실현하고 있다. 국가인원위원회에서 탐방을 나왔을 정도이다. 학생들은 대학입시를 위하여 강남까지 공부하러 유학을 갈 필요도 없다.

 

현재 컴퓨터가 9대 구비돼 있어 강남의 유명 강사진으로 이뤄진 학습사이트와 연결,인터넷 동영상으로 강의를 듣는다. 

 

초·중·고생이 40여 명 정도가 공부하고 있는데 신앙교육 뿐 아니라 학습지도도 하고 있어 수 년후에는 결실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공부방과 병행한 마을문고도 지난해 설립허가를 받아 운영하고 있다  

 

 동성교회

 

이외에 문경시의 협조로 설립된 아동 급식소를 운영하여 학기 중에 주중 매일 저녁을 제공한다. 또 방학 중에는 주중 매일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11명의 성도가 4000평의 농장을 교회로 기증해 만련한 농장에는 감나무 1100주를 심어 가꿔 서울 명성교회와 부산진교회 등과 직거래를 하고 있다.

 

이 수익금은 공부방, 마을문고, 장학사업에 쓰이고 있다. 성도들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없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경새재이다. 어려운 고비를 신앙을 통하여 넘고자 하는 것이다.  

 

마성 침례교회

 

문경 마성에는 100여 년 전에 마성침례교회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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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문경은 한양의 과거합격이라는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 고개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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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넘기 어려운 이 고개를 사람들이 걸어서 넘어야 했다. 류성룡은 27세에 이 길을 거쳐가면서 과거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경사스런 소식을 들었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영의정까지 오른다. 그가 쓴 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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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막에 묵으면서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시를 썼다. 진정한 경사는 과거합격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새재에서 묵다>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 오네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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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진정한 경사는 하늘의 복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문경의 교회들이야말로 항일운동, 지역봉사 등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길이 아닌 하늘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진정한 문경새재였다. 

 

그래서 문경새재를 넘어선 박원영목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강해설교학교를 열었고, 권태진, 고명진 목사는 하늘의 경사스런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재를 넘어 한 명은 군포로, 다른 한 명은 수원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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