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김천편)

편집인 | 입력 : 2022/05/13 [05:47] | 조회수: 476

 김천의 명칭 유래

 

김천시의 이름에는 하늘 천(天)이나 내 천(川)이 아닌 샘 천(泉)을 쓴다. 물이 맛있어서 귀한 물이라는 뜻의 김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경북의 김천시는 금지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으로 출동했던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이 이곳을 지나다가 남산의 샘물을 마시고, 그 ‘맛이 중국의 과하천()과 같다’고 찬양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천의 인구는 약 14만 명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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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지리적 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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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는 동쪽으로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성주군과 접하며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과 접하며, 남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과 접하며 북쪽으로 경상북도 상주시와 접한다.

 

 

김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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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은 조선시대에 김산(金山), 지례(知禮), 개령(開寧)의 3개 고을이 있던 곳이며, 1914년 김산군을 중심으로 개령군, 지례군을 통합하고, 철도역이 설치된 김천면의 이름에서 따와 김천군이 설치되었다.

 

1931년 김천면이 김천읍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김천읍이 김천부(府)→김천시(市)로 승격되었으며, 김천군의 잔여지역은 옛 김산 고을의 별칭(別稱)인 '금릉(金陵)'에서 따와 금릉군(金陵郡)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 당시 김천시와 금릉군이 다시 통합하여 현재의 김천시가 되었다.

 

교통

 

김천은 대구광역시와 대전광역시의 중간쯤에 위치 (각각 40~50분여 소요)하여 도로망은 잘 발달된 편이다.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가 놓여져 있어 교통은 아주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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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정 편수의 경부선 KTX가 2010년 11월 1일부터 남면 옥산리에 김천(구미)역에 도착하고 있다.  

 

김천역과 진주역, 거제역을 잇는 남부내륙선도 2022년 착공, 2028년 개통할 계획이다.

 

  


그러나 김천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독 눈물 샘이 많은 곳이다. 동학의 눈물의 샘, 3.1운동의 눈물의 샘, 6.25의 눈물의 샘, 빈궁의 눈물의 샘이 많은 곳이다. 이러한 눈물은 교회를 통하여 씼겨 내려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김천 사람들의 한의 눈물을 씻어 주어 풍요로운 김천이 되었다.    

 

동학의 눈물

 

김천은 동학의 눈물이 있는 곳이다.

 

동학의 2대 교조 해월 최시형(해월) (1827-1898년)이 김천을 두 번이나 머무르면서 김천의 동학이 발전했다. 최시형은 최제우(수운)가  참수당한 후 35년의 긴 세월동안 도망 다니면서 동학을 재건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최보따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최삼경이 아니라 최경상이다. 최삼경은 학력까지 불투명한 엉터리 교리감별사이지만 최경상은 동학의 도를 전파한 동학의 2대 교조이다. 

 

최시형은 고아로 자라 남의 집 머슴과 심부름꾼으로 전전하다 수운을 만나 도통을 이어받았다. 해월이 충청도로 넘어가면서 김천을 처음 방문한 때는 1890년 11월이다.

 

1890년 11월 최시형은 경상북도 김천군 구성면 용호동 김창섭의 집에 머물면서 내수통문을 각 읍에 포고하였다. 김천에서 농민군이 조직된 시기는 대체로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한 이후일 것으로 보이며, 1894년 8월 무렵 김천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김천의 동학 조직은 김천장터를 비롯하여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봉산면 등에 퍼져 있었다. 또한 김천군의 동학 주요 인물 가운데는 양반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뜻의 복호동 마을을 방문했다.

 

  

 

  김천의 복호동 마을


현재 이 곳에는 천도교 복호동 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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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 내칙. 내수도문 반포 기념비가 서 있다. 내수도문은 남녀평등사상이 녹아있는 여성 중심의 가정생활지침서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이념이 있다. 내칙은 일종의 태교(胎敎) 지침서로 태아교육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해월은 1888년 3월 손병희의 누이동생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고, 많은 교도들 특히 여성 교도들이 몰려들자, 1890년 11월 금릉군 구성면 용호동(지금 김천시)에 있는 교도 김창준의 집에서 1달여 머물면서  강론을 하고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돌렸다. 여성의 수도 방법과 지켜야 할 생활 태도를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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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문은 1893년 7월로 알려져 있다. 해월은 ‘동학마을’로 불리던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을 찾았다.

 

당시 김천의 동학교도들은 이미 최제우를 통하여 동학사상을 알게 되었고, 최시형이 방문할 때는  “정부를 공격해 국가를 혁신할 것”을 진언하기도할 정도로 동학교도들이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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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 해월은 김천의 동학농민군에게 기포령을 내리고 선산의 관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농민군의 목표는 선산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없애는 것이었다. 김천에서 가장 대표적인 동학의 지도자는 편보언이었다.

 

1894년 8월 초 접주 편보언은 김천장터에 도소를 설치하고, 동학교도들을 모아 모순된 제도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전천순과 김원창 같은 이는 전라도 전봉준처럼 폐정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김천에서 가장 유명한 동학지도자의 편보언의 조부와 부친은 무과에 급제한 전형적인 무인 가문이었다. 

 

김천장터

 

이들은 양반이었다. 김천에서는 양반들이 동학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특히 강기선은 정조와 순조 대 김천양반사회에서 가장 높은 관직에 올라있었던 강석구의 현손이기도 했다.

 

장기원과 배재연은 대지주이기도 했다. 강기선은 9월 말경 하기(下耆)에 도소를 설치하고 주변의 재산이 많은 양반들을 잡아다가 동학 입도를 강요하거나, 풀어주는 댓가로 군량미와 군수물자의 지원을 독촉하였다.

 

10월 초에는 황간·영동·옥천 지역의 농민군들이 추풍령을 넘어와서 김산과 지례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군수전과 군수미를 강제로 헌납 받기도 했다.

 

9월 24일 최시형의 재기포령이 김천에 전달되자 편보언은 각 지역 접주들에게 이를 알리고 곧 무장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김천 일대의 동학군의 목표는 선산관아와 해평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9월 22일 주변 여로 고을의 동학농민군을 규합하여 선산읍 공격에 나서기도 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장대에 많은 깃발을 달고 해평의 일본인들을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저항도 못하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흩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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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로 말미암아 조선에 도착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인들을 비참하게 살육하였다. 

 

 

대구 감영에서도 병정 2백명을 파견하여 김산의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상주·김천 지역 농민군 진압 과정은 관군이 기록한  <소모사실>에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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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이 김산에 들어온 것은 1894년 10월 5일이었다. 대접주 편보언을 비롯한 접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은신하자 접주와 죄가 있는 사람의 이름을 게시하고 수색에 나섰다.

 

일본군과 관군이 합세하여 순수 한민족으로 구성된 동학교도들을 처형하는 것이었다. 청군을 끌어들인 민비의 대 실책이었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여 일본군까지 오게 돼 수많은 동학교도들을 살육하게 하는 공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민비 역시 일본군에 의해서 죽게 되었다. 자승자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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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0월 6일에는 강기선이 장암(壯岩)에서 체포되어 김천으로 끌려가 총살된 것을 시작으로 김산과 지례 등지에서 관군의 농민군 탄압이 이어졌다. 12월 25일에는 편보언, 남정훈(南廷薰) 등 농민군 지도자 4~5명이 체포되어 김천 시장에서 총살되었다.

 

 

편보언은 1894년 8월 김천 장터에서 도소를 세우고 도집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상주로 피신하였으나 일본군에게 잡혀 타살되었다. 편보언의 아내 역시 도망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죽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잡혀 일본군에게 총살당했다. 10월 이후 경상 감영병에게 잡혀 처형된 농민군 지도자급 인물이 거의 2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일제의 침입으로 동학도들의 혁명은 비참하게 끝을 맺었다. 이러한 살육은 3.1 운동 때 다시 반복되었다. 힘없는 농민들과 한인들은 일제의 총칼에 의하여 비참하게 죽어갔다.

 

수많은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대나무창과 호미, 낫만을 갖고서 근대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대항하여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을 통한 근대화의 여명은 동터오고 있었다. 서학이 들어오면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개신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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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눈물, 교회연합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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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의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벌인 독립운동을교회연합시위운동이라고 한다. 3.1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교파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앙도 중요하지만 애국운동도 중요하다는 것이 김천사람들의 입장이었다. 개신교는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호국종교로서의 성격을 띠어 항일운동, 반공운동,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다.  

 

김천군 황금동[현 김천시 황금동] 황금동교회의 시위가 적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만세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 종교인들은 3월 20일 밤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황악산에서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시내에는 일제 관헌의 경비가 삼엄하여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종교인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하며 밤늦도록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김천군 종교인들의 교회연합 시위는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6.25의 눈물

 

김천은 일찍부터 사회주의가 싹텄던 곳이다. 김천의 인민위원회는 사회주의 계열로서 해방 이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조직되었던 민간 자치 담당 기구이다. 사회주의는 결국 김천의 눈물을 가져왔다.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무렵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변경되어 발족한 것이며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김천 지역의 자치를 담당한 민간 기구이다.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김천경찰서, 김천군청, 김천세무서, 김천읍사무소 등 김천의 주요 관공서를 차례로 장악하고 김천군의 자치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 진주 후 미군이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군정을 선언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활동도 차츰 힘을 잃어갔다.

 

당시 제주도에도 인민위원회가 있었다.  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격주간정보보고(CIC Semi-Monthly Report) 에 의하면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미군측 보고에 의하면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수적으로 대단히 강했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온건한 정책들이 대단히 호응을 얻었으므로 우파에서는 "인민위 세력이 더욱 강력해질까봐 두려워했다"고 보고한다.

 

당시 제주도 인민 위원회는‘민주주의적 애국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만세!’,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일제적 통치기구를 분쇄하라!’, ‘단일 누진제 즉시 실천!’, ‘입법의원을 타도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 파쇼분자의 근멸!’, ‘삼상회의 결정의 즉시 실천!’, ‘인민 경제를 파괴하는 모리배의 철저한 소탕!’,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신앙의 절대 자유!’, ‘식량문제 해결은 인민의 손으로!’ 였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6.25를 통해 실체를 드러냈다. 김천시민들에게 눈물을 가져다주었다.

 
김천은 북한군이 침입한 지 7월부터 약 50일 정도 공산군의 점령 아래 놓여 낙동강 전투에서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공산군의 중요 전진기지가 된 곳이다.

 

북한군의 남침 1개월이 되는 1950년 7월말, 북한군은 김천,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김천은 경상도 북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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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까지 대구를 함락시키고 부산으로 진격하려던 공산군은 낙동강 영천전투에서 크게 지고 9월 15일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김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천에서는 공산군 점령 아래 설치됐던 인민위원회 등 모든 기구들이 해체되었다.

 

김천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공산군의 군사기관・행정기관이 김천에 주둔해 전진기지 역할을 했으며 김일성이 김천에 왔다는 사실이 유엔군 정보망에 탐지돼 8월 31일과 9월 2일 두 차례에 걸친 전투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김천 시가지는 일시에 초토화됐되었다.

 

김천은 전쟁을 겪으면서 시가지의 80% 이상이 소실돼 폐허가 됐다. 김천은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정도가 전국에서 가장 격심했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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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6・25 참전용사 1,795명 위폐봉안


김천시 성내동에는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신 고 이종호 소령 외 1천794명의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충혼탑이 있다. 충혼탑은 1962년 최초 건립됐으며, 2010년 10월 20일 순국선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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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항지서 망루

 

등록문화재 제405로 지정된 김천 부항지서 망루는 한국전쟁 직후 북한 인민군의 습격을 막기 위해 주민들과 경찰이 힘을 합해 콘크리트로 건축한 자주적 방어시설이다. 망루(望樓)란 방어, 감시, 조망을 위해 높은 곳에 설치돼 주위를 살펴볼 수 있게 한 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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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콘크리트 4면체 형태로 높이는 7미터이며 4면에 근대적인 사격용 총안 시설을 2개씩 설치해놓았다. 지붕과 내부에 망루 위로 접근할 수 있도록 설치한 사다리 시설 등은 소실되었지만 망루에서 부항파출소로 통하는 지하통로 입구는 그대로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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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북한군 1,000여 명과 교전해 경찰과 주민 5명이 전사했지만 끝까지 지서를 지켜낸 곳으로 한국전쟁 때 경찰이 운용한 망루로써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이며 이 지역에서의 민·경 합동 전투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현재 경찰청이 소유,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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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한 북한군이 김천시 부항면을 수차례 습격하자 주민들은 부항지서를 지휘소로 두고 방어에 대비했고, 같은 해 10월 북한군 유격대가 공격해오자 참호와 망루에서 다음날까지 북한군과 맞서 싸워 물리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이후 부항지서 망루는 경찰과 주민들이 힘을 합쳐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낸 전적지로 인정받아 지난 2008년 10월 ‘등록문화재 405호’로 지정됐으며, 망루와 경찰서를 연결하는 지하 통로는 현재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부항 면민들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별동대(60여 명)를 창설해 2차에 걸친 북한군의 부항 지서 공격을 물리치고 삼도봉 일대에 은신하고 있는 다수의 북한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특히 1951년 10월 20일로부터 21일까지 1천여 명의 적이 막강한 화력으로 공격한 2차 전투에서 경찰관 1명과 청년단원 4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총상을 당했으며 끝까지 지켜낸 역사의 현장이다.

 

이처럼 김천은 동학의 눈물, 3.1운동의 눈물, 6.25전쟁의 눈물, 가난의 눈물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러나 김천에 세워진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의 눈물을 씼어냈다. 

 

 

김천의 교회

 

송천교회

 

김천 지역의 교회는 초창기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송천교회는 아담스의 뒤를 이어 대구에 온 부해리 선교사가 김천, 선산, 군위, 칠곡 등 4개 군을 담당하여 선교 활동을 하다가 이재욱과 함께 1901년 3월 1일 송천리 이사윤의 사랑방에 세워지면서 김천 지방 개신교 교회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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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로는 김중권, 이사윤, 이영화로 나타난다. 송천교회의 설립당시 첫 조사는 방명원 조사였다. 방명원 조사는 청도군 청도읍 평양1리 출신으로 부해리(H. M. Bruen) 선교사를 따라 송천교회를 설립한 첫 해 조사로 시무했다.

 

방명원장로는 1919년 당시 달성군 내당동에 거주하였으며, 64세의 고령으로 장로로 시무하면서 최재화(崔載華, 1892~1962)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에게 비밀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앞장섰다. 이처럼 송천교회는 항일운동의 전초 기지로서 신앙뿐만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한 애국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송천교회



1902년 3월1일 송천리[하송] 239번지에 초가삼간을 13원에 매입해 교회당으로 활용하고 양성학교를 설립했다. 1903년 교회 부흥으로 황금동교회, 추풍령교회, 구미시 무을면 대원교회, 개령면 덕계교회 등 4개 지구 교회로 분립되었다.

 

 황금동교회

 

 

황금동 교회(1903)

 

1901년 부해리 선교사가  송천교회를 설립한 후 1903년 김천 시내 지역 선교를 위해 전도사 2명을 황금동으로 파견해 황금동 183번지 박상순의 자택 사랑방에서 최초로 예배를 보았다. 이것이 황금동 교회의 시작이다. 

 

1907년 집을 매입하고 가건물을 건립해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김천 개신교의 역사를 열었고 1922년 132㎡ 규모로 확장 신축했으나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1953년부터 재건 사업을 시작해 1957년 615㎡ 규모의 교회와 교육관을 세웠고 1988년 3월에 4층 2083㎡ 규모로 교회를 신축하였다. 부해리(H. M. Bruen) 선교사가 첫 당회장이었다.

 

황금동교회는 1919년 김천 지역 3·1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고,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리고 장로 석수일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한일중학교 전신인 배영학원을 운영했고 1974년부터는 김천유치원을 운영하여 근대 교육에 많은 공헌을 했다. 교회는 항일운동과 근대교육의 요람이 되어 선으로 악을 극복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그 길만이 김천지역 사람들의 눈물을 씼어주는 길이었다.

 

김천지역의 이러한 교회의 설립과 분리의 역사(1901~1957)는 부해리(H. M. Bruen)가 직접 설립한 교회(송천교회, 광기교회, 복전교회, 송곡교회, 신암교회, 황계동교회, 신곡교회, 대신교회)와 부해리(H. M. Bruen)가 설립자를 도와서 설립한 교회(월명교회, 관기교회, 대양교회, 중감교회)가 있다.

 

그리고 현지인들만으로 설립된교회(류성교회, 지좌교회, 인의동교회, 하강교회, 작내리교회)와 기존교회에서 분립된교회(황금동교회, 능치교회, 평화동교회, 김천제일교회)가 있다.

 

 브루엔(부해리) 목사가 참여한 교회개척상황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


송곡교회 

 

 송곡교회(1911)

 

관기교회


관기교회는 1905년 부해리 선교사와 이해석, 김원기, 장선학, 김현문이 창립을 했고 1대 교역자로서 부해리 목사가 부임했다.

 

 관기교회(1905)

 

 능치교회

 

▲ 능치마을

 

 

  능치교회(1908)


김천출신의 인물로는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김재한,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재범, 씨름선수 이태현이 있다. 이외 독재정권에 맞섰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완상 교수도 김천에서 성장하였다.  

 

현재 김천시 경제를 떠받치는 것은 응명동, 대광동과 어모면 일대의 김천산단이며, 현대모비스 김천공장과 코오롱인더스트리 김천공장, 유한킴벌리 김천공장, KCC 김천공장 등이 입주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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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모산업단지로 인해 일자리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며, KTX역의 신설, 혁신도시의 건설과 김천-진주 / 김천-전주 철도건설로 교통과 물류 중심으로 재도약하고 있다.

 

현재 김천의 새로운 성장동력은 율곡동 일대의 혁신도시로, 한국도로공사와 한국전력기술 등 공기업들이 이전해 오면서 김천시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상태이다. 김천의 눈물이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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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부터 교회가 세워진 김천은 대구와 대전의 중간지역으로서 동학의 눈물, 3.1운동의 눈물, 6.25의 눈물, 가난의 눈물을 잘 극복하면서 풍요의 미래 웃음의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그들의 눈물을 씼어줄 수 있었다. 현재 김천은 풍요의 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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